전편 모음


-부우우우웅…


“...왔군.”


기둥에 기대있던 은발적안의 여인이 조그맣게 읊조렸다.


세단 2대, 밴 1대, SUV 다수로 이루어진 차량 군단이 목적을 달성하고 위풍당당하게 돌아온 걸 조용히 지켜보며 은은한 웃음이 피어오르는 걸 참았다.


밴 안엔 그녀를 그토록 괴롭혔던 남자가 있을 것이고, 마침내 그의 이마에 통풍구를 내줄 수 있다. 홀스터 속 권총을 뽑고 싶어서 온몸이 근질거린다.


차량들이 멈춰서자 여인은 곧장 밴으로 가 문을 열어젖혔다.


“…?”


“찾으시는 분이 계신가요?”


“놈은 어디다 두고 온거지?”


“후훗, 글쎄요…”


“장난치지 말고 말해. 당장.”


하지만 무언가 이상한 걸 알아차리고, 자신과 비스무리한 또다른 은발적안 여인의 멱살을 잡아올리며 분노를 드러냈다.


갑자기 몸이 들어올려졌음에도 여유를 놓치지 않던 Kar98k는 눈 앞의 그라프 체펠린을 향해 제대로 된 대답 대신 비웃음을 보냈다.


“야만스러운 행위는 삼가주시죠?”


“빨리 뱉어내. 뭔 짓을 한거냐.”


“후후…”


“내 손으로 죽이겠다고 수십번을 일러뒀을텐데.”


“욕심도 많으셔라. 영광스런 일을 혼자 하려고 드시면 안 되죠.”


“그 녀석 때문에 지휘관 경을 코앞에 두고 한참을 만나지 못했지. 네가 그 기분을 알려나?”


“그래서요?”


“그래서? 내가 원한이 제일 크다고 자부할 수 있으니, 내가 죽이겠다. 그러니 당장 이 앞에 데려와라.”


“데려오고 싶어도, 못해요.”


“뭐?”


“헤르만 씨가, 없으니까요.”


“분명히 정찰기로 녀석을 잡은 걸 봤다. 이깟 말장난이 재밌어보여?”


“정말인데… 아, 이건 일단 놓으시죠?


“으윽?! 큭…”


“얘기를 들어보고 손을 올리세요, 경박한 그라프 씨.”


“네년이 감히…!”


“후후, 이래뵈도 저 역시 나름 억울하다구요? 그러니, 일단 전말을 좀 들어보고 싸우던가 해요.”


“맞아, 일이 좀 많이 꼬였어. 그래서 헤르만이 이 자리에 함께 하질 못하게 됐네.”


“...만약 날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지금 일을 뼈저리게 후회할 거라고 장담하지...”


그라프 체펠린의 말을 따박따박 쳐낸 뒤, 그녀의 손목을 잡아꺾어 무릎을 꿇리고, 또 비웃음과 함께 다시 일으켜 세워주며 그 높디 높은 자존심을 살짝 밟았다.


두 소녀는 밴에 같이 걸터앉아서 우선 오해를 풀고, 오해가 생겼던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얘기했다. 마침 현장에 있었던 또 다른 소녀, 비스마르크도 온 덕에 상황파악은 빨리 끝났다.


“헤르만 씨를 밴에 태우고 돌아오던 중 일이 일어났어요.”


“갑작스런 굉음에 뒤를 돌아봤는데, 차가 지붕에 구멍이 뚫려 나뒹굴고 있었지.”


“그러면 이 차는?”


“블러핑으로 가져온 물건이랍니다.”


“...계속 해.”


“바로 멈춰서 가보니까, 오른팔이 날아간 상태로 누구랑 통화를 하고 있었어.”


“그 상대는…”


“누구겠어. 그 년이지.”


“미사일로 헤르만 씨를 죽이려던 거죠.”


“그 년이 아군인 헤르만을…? 이해가 안 가는군… 무슨 생각인건가…”


“저희가 헤르만 씨를 태우기 전에 잠시 추궁을 했는데, 그 분과 모의했던 계획을 싹 다 털어놓았답니다. 그래서 보복으로 먼저 암살을 시도한 게 아닐까요?”


“확실하지. 무조건 그 이유야. 뭐, 우리는 손에 피 안 묻히고 녀석을 처리한거니까 좋게 생각해.”


“모의계획?”


“짧으면 이번주, 길어야 2주, 그 사이에 794를 폭격한다, 에요.”


“...후후, 원하는만큼 폭격하라 그래. 그만큼의 파멸을 되돌려주지.”


“어차피 아직 남은 목표들도 제거하면, 루프트바페는 크릭스마리네와 헤어의 손에 떨어진다. 그럼 이 나라는 곧 우리의 것이 되겠지.”


“꼭두각시가 된 루프트바페로 대서양 건너에 있는 귀여운 참새를 꼬시고, 지휘관 경을 되찾는다.”


“우선, 람슈타인부터 정리해볼까요?”


“아니, 람슈타인은 아직이야. 마저 남은 목표들을 제거하고 들어가자고.”


비스마르크가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검은 정복의 부하들이 그녀에게 진동이 울리는 전화기를 공손히 가져다줬다.


덮개를 열자 달랑 “UMP” 3글자 박힌 화면이 그녀를 반겨주고, 곧 신이 난 듯한 삼자매의 목소리가 분위기를 바꿔놓는다.


“지휘관의 고향엔 이런 말이 있다고 하지.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


“UMP인가?”


“응.”


“안녕 아가씨들~ 1차는 처리했고 이제 2차 가는 중이야🎶


“목소리가 들뜬 걸 보니, 수월하게 해냈나보군.”


“빙고! 지금 너희들이 말해준 호텔로 가고 있어!”


“얘만 처리하면 다 끝나는거지?”


“그래.”


“오케이~ 그럼 내일 다시 전화할게! UMP 시스터즈 아웃!”


아주 빠르고 간결하게, 자신들이 가진 모든 정보를 풀어내고 간 UMP 자매의 신뢰에 세 소녀들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부하들을 해산시키고 숙소로 돌아갔다.


누군가는 욕조에서, 누군가는 침대에서, 또 누군가는 소파에서, 그이를 그리워하거나, 아니면 그이와의 아이를 생각하며, “계획” 끝에 있을 그이를 향한 욕구를 풀어냈다.



.



.



.



.



.



.



.



“와, 오랜만에 베를린 오니까 좋다~”


“언니! 우리도 나중에 저런 건물 사자! 그리고 지휘관이랑 아이들과 함께 사는거야!”


“오, 좋은데?”


베를린 시가지를 유유히 활보하는 검은색 세단, 그 안에선 앞자리에 탄 두 소녀의 이야기꽃이 끊이질 않는다.


그에 비해 조용하던 뒷자리의 또다른 소녀가 암레스트를 펼쳐 전화기를 내려놓자, 낌새를 알아차리고 이야기꽃의 대상을 바꾼다.


“45, 공군에서 뭐래?”


“멍청이들답게 아직도 자기네 사람이 없어진 줄 모르나봐.”


“진짜? 대장이 죽었으니 이목이 다 쏠려서 그런가?”


“흠~ 이 친구도 그렇게 낮은 직급은 아닐텐데🎶 어떻게 생각해? 네가 직접 대답해볼래?”


“으브으으읍!! 으으으읍!!!”


“미안, 아파? 내가 힘조절을 잘 못하거든.”


소녀가 묻자 암레스트 너머의 어두컴컴한 트렁크 속에서 한 남성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사지가 완전히 결박되어 트렁크에 실린 그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평소처럼 제복을 빼입고 상관을 만나러 가던 중 누군가가 자신을 기절시켰고, 시간이 흘러 정신을 차리니 이 꼴이었다.


-덜컹, 쿵!


-끼이익!


“나인, 꺼내! 손님, 다 왔습니다~”


“응! 자, 다 왔으니까 내리자!”


“으… 너무 힘들어… 보는 사람 없지?”


“아무도 없어!”


“으으읍!! 우읍!!!”


잠시 후 차가 잠시 덜컹거리다가 멈춰섰고, 곧 강렬한 햇빛이 그의 눈에 꽂힌다.


햇빛에 적응을 마치고 다시 눈을 떴지만, 지금 위치가 모 고물상인 것만 알아냈을 뿐 곧바로 두 소녀가 겉옷을 붙잡아 트렁크에서 끄집어냈다.


나올 때까지만 해도 비가 왔었는데, 지금은 젖은 바닥에 햇빛이 내리쬐고 있으니 하루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고 가늠할 수 있었다.


마침 별모양 동공과 생머리를 가진, 운전을 담당했던 소녀가 그를 앉혀서 물었다.


“많이 답답했지? 떼줄게.”


-촤악!


“프핫?! 허억… 허억… 당신들은 누구신데…”


-퍽!


“커흑?! 아악…”


“이마에 구멍 나기 싫으면 묻는 말에만 대답해. 알겠어?”


“크윽… 넵…”


그의 몸이 순식간에 뒤로 밀려났다가 쓰러진다. 가슴에서 욱신거리는 느낌이 퍼져나가고, 땀과 피로 걸레짝이 되어가는 와이셔츠엔 가죽 부츠의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바닥에 쳐박힌 시선을 들어올리자마자 소녀가 살벌한 협박과 함께 앓는 소리를 내는 그의 턱을 붙잡아 돌리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공군 소속이지?”


“네…”


“그럼 우리 지휘관이 미국으로 간 것도 알겠네?”


“네? 지휘관…?”


“지휘관이 무슨 지휘관이겠어? 우리 794의 김얀붕 지휘관 말이야. 정말, 45, 얘 정말 높은 직위인 거 맞아?”


“794, 김얀붕…? 저 잠시만…”


-짜악!


“칵?!”


“묻는 말에 대답하라니까 역질문을 하네?”


남자는 어리둥절했다.


분명히 해체된 794의 이름을 거론하고, 대외적으로 모두 체포될 거라 알려진 이들이 멀쩡히 베를린의 시내를 나돌아다닌 것도 모자라 자신을 납치하는 범죄까지 저질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들을 잡으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이 무슨 거지같은 상황인가, 고민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한편 뒷좌석에서 내려 고물상에 버려진 거울로 머리를 묶던, 좌안에 자상 흉터가 남은 소녀는 완성된 사이드 테일을 여러차례 빗으며 남성을 향해 다가왔다.


“흐흐흥~🎶 우리가 누군진 알 필요 없고, 얘가 말한대로 질문에만 잘 대답하면 돼.”


“첫번째, 어제 총감의 주최 하에 동료들과 연회를 가지려고 했지?”


“ㄴ, 네…”


“두번째, 그 연회에서 뭘 하려고 했어?”


“그냥 친목 모임이었습니다… 총감님께서 정기적으로 군용 별장에서 여시는데, 서로의 일상이나 그런 거 나누는 아주 평범하고 사적인 모임이에요…”


“그래? 뭐, 좋아. 세번째, 너흰 미국과 교류하면서 지휘관의 도피를 깊게 도왔을거야. 맞지?”


“...그건 기밀사항이라 말씀드릴 수…”


“아, 말 못하는거야?”


“......”


“묻잖아. 얼마나 귀중한건데?”


“말씀드릴 수 없…”


“앵무새처럼 나오려고? 좋아, 그럼 말하게 해줄게~”


“네…?”


남성은 직감했다.


‘아, 말할 걸 그랬나?”


그의 예상은 불행하게도 빗나가지 않았다.


-카각, 카가가가각…


“허… 허극… 자, 잠시만요!!”


소녀의 손에 들린 커다란 슬레지해머의 머리가 콘크리트 바닥에 끌리면서 꺼림칙한 소음을 낸다.


소음이 점점 커질수록, 남자의 심장은 더욱 빠르게 박동한다. 


“세번이나 물었는데 대답을 안 하면, 이렇게 해야지.”


“예?! 잠ㄲ”


“40, 눕혀.”


-퍼억!


“케헥!”


“이제 다 말하고 싶어도 내가 못하게 할거야. 손가락 1개당 육하원칙 순으로 받을거거든🎶


“뭐, 뭐뭐, 네?! 다 말씀드릴테니 우리 조금만…! 크헉!”


“우리? 너따위 버러지가 나랑?”


“우리 언니가 제일 싫어하는 게 외간 남자랑 엮이는건데… 어떡해, 더 세게 맞겠네~”


“팔 빼, 안 그럼 다쳐?”


“제발, 선생님들 제발 한번만, 기횔 주세요!! 살려주세요!!”


“후후, 내가 널 왜 죽여? 이제 죽고 싶어도 못 죽을 처지인데 꿈이 크네~”


“팔 빼라고!”


“흐어어억…! 제가 잘못했습니다아…! 제발!”


남성의 울부짖음에, 소녀들은 비웃음으로 답했다.


트윈테일에 우안 자상을 입은 소녀가 사이드테일 소녀로부터 슬레지해머를 이어받아 높게 들어올린다.


“이 악 물어야 돼?”


슬레지해머의 녹슨 머리가 태양을 가려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그림자는 한동안 제자리에 서있다가, 곧 


-부웅!


-쾅!


“꺽, 끄아아아아아아악…!!!!”


바람을 가르는 소리로 시작, 콘크리트를 깨뜨리는 충돌음을 거쳐 새끼손가락을 절반 잃은 남성의 비명으로 끝나는 끔찍한 곡조를 뽑아내고 사라졌다.


하지만 그를 누르고 있던 생머리 소녀는 이 곡조의 결과물이 아쉬운 듯 일어나면서 트윈테일 소녀로부터 해머를 빼앗았다. 


“앗! 빗맞았잖아!”


“언니가 해봐! 의외로 조준하기 어렵다니까…”


“줘봐! 참, 완전히 날려야 제대로 말할 거 아냐!”


-후웅!


-쾅!


“끄어어어억… 아아아악!!!!!”


“음, 오케이, 합격~ 이제 네 차례야. 누, 가?”


다시 나타난 그림자가 아까의 곡조를 재생한다.


새끼손가락은 지면과 완전히 눌러붙어 제 기능을 잃은지 오래, 남성은 남은 손가락이라도 살려보기 위해, 사이드테일 소녀의 질문에 필사적으로 입을 연다.


“으그윽… 총가암… 님과… 올리비익… 으읍… 읍…!”


“그만. 다음은 여기로 하자?”


“으… 으읍… 끄으으… 어억…”


“맘 같아선 친구들 부르고 싶지? 그런데 어떡해, 너네 대장님, 어제 죽었어.”


“어으윽….?”


“못 믿는 반응인데? 한 번 봐봐.”


-공군 총감, 고속도로 상에서 변사체로 발견. 경찰 “교통사고로 추정돼…”


“으으으윽…”


“오, 상관을 향한 존경심이 대단한 것 같네~”


그러나 애석하게도 채 한마디 하기 전에 봉쇄되었고, 눈앞에 놓인 태블릿에선 자신의 상관이 처참한 꼴로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일렁인다.


경찰은 교통사고라고 하지만, 정황상 그 범인은 길게 생각할 필요 없이 이 세 소녀들과 같은 일당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자 그의 눈에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눈물이 차올랐다.


“이쯤이면 됐어. 나머지도 이어서 하자구.”


-후웅!


생머리 소녀로 넘어간 슬레지해머가 다시 햇빛을 가려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연주를 시작한다.


남성의 벌벌 떨리는 입에선, 더이상 비명소리와 처절한 대답 대신 악에 받힌 거친 숨소리만 뿜어져나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하아… 아…”


한숨만이 나온다.


총감님이 비스마르크와 카라비너, 그리고 그 일당들에게 습격당했고, 얀순이가 거기에 미사일까지 쐈단다.


비록 악연으로 점철되었던 사람이지만, 결국 나 때문에 죽었다.


충격적이고 허망한 결말에, 얀순이에게 자신이 잘못한 걸 깨닫길 바라며 물었다.


“얀순아, 이건 아니잖아… 어떻게, 사람한테 미사일을…”


“그게 왜? 오빠도 싫어했던 새끼잖아. 그래서 죽였는데 왜 그래?”


“네 말대로 싫어’했던’이야. 마지막은 좋게 끝났던 분이라고. 근데 총감님이 뭘 잘못했다고 그러는거야…?”


“하다못해 그 년들도 죽일 생각은 안 했던 느낌이던데, 왜… 아…”


“글쎄, 내가 안 죽였으면 살아있는 게 신기할 수준으로 고통받을 인간이었어. 굳이 말해야 된다면, 사정이 있어서 그래. 오빠한테 말해줘봤자 이해 못 할거야.”


“아니, 일단 들어보고 판단할게.”


“...오빠, 한번만 져주면 안 될까?”


“져주는 건 어제로 끝났어. 빨리 말해.”


“저기…”


“넌 빠져. 뭘 잘했다고 껴들어?”


“아, 으… 으응…”


“오빠도 나이 들면서 많이 변했구나… 예전엔 다 받아줬는데…”


“이건 다른 것도 아니고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야! 절대 못넘어가.”


수차례 회유에도 계속 강경하게 나서자, 얀순이가 끝내 체념하고 고개를 내리며 말했다.


“...그래, 말해줄게. 사실 다음주에 헤르만의 도움을 받아서 794를 폭격하려고 했어.”


“뭐?”


“저 년을 포함해서 오빠를 더럽힌 개년들이 있어야 할 곳은 고물상의 용광로일테니, 일단 폭격을 하고 살아남은 년들은 따로 잡아서 갈아버리려고 했어.”


“그런데, 이 새끼가 훼방놓은 전적이 워낙 화려해서, 그냥 내가 루프트바페를 먹는 게 훨씬 쉽고 빠를 것 같더라고. 마침 나랑 일맥상통한 나치년들한테 저걸 그대로 불어버렸네? 명분도 생겼겠다, 신무기 테스트도 할 겸 죽여버렸지. 이게 끝이야.”


“.......”


“자기…?”


깨달음은 커녕 무심하면서도 욕으로 표현된 날선 분노가 섞인 저 대답을 듣고, 충격을 넘어서는 황당함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물론 나도 794의 여인들에게 배신을 당한 게 좆같고, 나의 10년이 더럽혀진 그 공간을 부숴버리고 싶고, 그녀들을 잡아넣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나를 위해 사람이 죽어야 하는가? 온몸에 죄책감이 감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은 분노와 책임전가로 전환되어, 공범인 뉴저지로 향했다.


“뉴저지, 알고 있었지?”


“뭘…?”


“총감님 해코지하려던 거.”


“...ㄴ, 난 모르는 일이야! 애초에 걔네들이랑 친하지도 않았고…”


“걔네들이 누구 명령 받고 갔을까?”


“...글쎄…?”


“엔터프라이즈야, M4야?”


“뭇,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자기, 정말 억울해애…! 나도 오늘 처음 들은 일이라구…!!”


“그걸 어떻게 믿어?”


“만약 내가 거기에 조금이라도 연관되어 있다면 저 여자가 자기한테 뭔 말이라도 했겠지…! 그런데 조용하잖아아… 난, 자기한테 거짓말하는 게 제일 싫은…”


“아, 그래서 그때 아이스크림 먹자면서 연기를 했구나? 음… 그래, 네 말이 맞다면 맞는거지.”


“힛, 그, 그, 일은… 우으…”


“지금도 구라쳤네? 나중에 이번 일과 관련해서 먼지 한톨이라도 나오면, 하, 그때 보자.”


“그건 내, 가 자모태찌마아안… 끅, 이건 저엉말 모, 른다구우… 흐극… 정말이란 말이야아…”


“...참나...”


아까처럼 또 눈물을 글썽이면서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전과가 있으니 당연히 안 믿긴다. 


저 즙은 악어의 눈물이리라 여기며 일단 넘어가고, 더이상 여기 있기도 싫고 있어야 할 이유도 없으니 어제처럼 두 여인의 인사를 무시하고 나온다.


그러면서 무의식적으로 주머니를 뒤적이자 금속 물체가 하나 걸린다.


검은 테두리의 원이 네 조각으로 나뉘어 그 조각에 파란색, 흰색이 교차되어 칠해진 로고가 박힌 스마트키다.


‘총감님도 BMW를 타셨지.’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바로 차를 타고 나가 고급진 와인을 사왔다.


“...좀 친해지려고 하니 이렇게 가십니까…”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죄송합니다…”


주기장 위에 서서, 와인을 한잔씩 흩뿌린다.


내 나름대로 생각한 추모와 사죄였다. 참으로 볼품없고 모양 빠졌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맘 같아선 장례식이라도 참석하고 싶지만, 이미 독일은 그녀들의 손바닥에 놓였고, 그런 곳에 내가 발을 들이는 건 그의 희생을 헛되게 만드는 짓일터, 나중에 사태가 진정되면 꼭 찾아뵙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한잔 두잔 점점 바닥을 보여가는 와인병을 한참 보다가, 지나가던 병사들에게 그가 좋아하던 담배 4개비를 빌려 병의 입구에 꽂아놓고 자리를 떴다. 


“지휘관님~ 히히히~”


“...다녀왔어 카린.”


“어라, 지휘관님,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안색이…”


“...그냥, 요즘따라 잘 안 풀리는 것 같네.”


“네?”


“음… 나중에 설명해줄게. 지금은, 기분이 말하기 좀 그래서…”


“아, 네…”


“미안해. 갑자기 걱정시켜서.”


“아니에요! 지휘관님이 미안할 게 뭐 있어요? 저야말로 분위기 파악 못한 거죠… 그러니, 오늘 점심은 제가 해드릴게요!”


“오, 정말?”


“기대하셔도 좋다구요? 으, 아침부터 배고팠으니 좀 많이 해야겠어요…”


“요즘따라 식욕이 늘은 것 같네?”


“넷, 무슨 소리에요?! 이건… 아! 제가 아니라 우리 아가가 많이 먹는거라구요!”


“아가, 엄마가 거짓말 한다. 그치?”


“지휘관니임!”


“아아! 악! 알겠어알겠어…”


총감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 눈 앞의 제일 사랑하는 그녀도 다신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아…”


“지휘관님…?”


“입맛이 없네… 카린, 미안해. 기껏 만들어줬는데…”


“아, 아니에요… 힘든 일 있을 땐 푹 쉬셔야죠. 이건 제가 다 치울테니 얼른 들어가세요!”


“응… 아아…”


너무 많은 걸 받았음에도 제대로 된 감사 인사 하나 못 전한 것에 후회가 끊임없이 몰려와, 감히 평온하게 살길 바랬냐며 하루 내내 모든 걸 헤집어놓는다.


.



.



.



.



.



착잡한 기분으로 하루 일정을 끝마치고 침실로 돌아가자, 문에 끼인 봉투 하나가 팔랑거리며 카리나의 손에 딱 떨어졌다.


“이게 뭐죠? 으엣?! 호텔…?”


“뭐라고?”


“호놀룰루에 있는 특급 호텔… 지휘관님~ 설마, 깜짝 신혼여행이에요~?”


“응? 나도 모르는 일인데… 갑자기 하와이를…?”


“어, 그럼 누가 이걸…”


“애들 거까지 다 뽑아놨어. 3일 뒤야. 가자, 오빠.”


“...장관님…?”


“아까 말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나가버려서, 결국 직접 와서 전하게 됐네.”


또또 어디선가 나타난 얀순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벌인다.


갑자기 하와이를 간다고? 왜? 슬슬 신년 휴가철이라?


와중에 카리나는 내 뒤에 숨고, 얀순이는 주먹을 꽉 쥐고, 서로 꼴보기 싫다는 눈빛으로 기싸움을 벌이지만 어제의 더러운 거래로 얀순이가 먼저 꼬리를 내린다.


“카린 씨도 쉬고 싶지 않아? 요즘 일 많았잖아.”


“대부분이 장관님 때문에 벌어진 일이죠.”


“...그렇게 생각한다면 미안하네. 그러니 이거 사과의 의미로 받아주지 그래?”


“무슨 속셈이세요?”


“속셈이라니, 그냥 놀러가는 건데. 오빠, 어떻게 할거야?”


“...완전 투명한 휴가지?”


“응, 어제 약속했잖아.”


“어제…?”


“허, 뭐, 그래, 가자. 3일 후라고 했으니까 애들한테도 내일 말해둘게.”


“수상해…”


카리나는 유순하게 나오는 얀순이의 태도에 경계를 낮추지 못한다.


나도 뭔가 찝찝하지만, 일단은 물증이 없고 공짜로 보내준다고 하니 일단은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공군장관답게 전세기를 이리로 불러서 단체로 타고 간다는 거대한 스케일에 감탄이 나온다.


“오빠 부하들도 고향 구경 시켜주고, 바닷가에서 시원하게 놀면서 머리도 좀 식히고, 아, 수영복이나 여벌옷은 많이 챙겨와, 알겠지? 이만 갈게 오빠. 내일 봐.”


“어, 응. 잘 가.”


“그리고 카린 씨.”


“왜요?”


“...후후, 아니야. 그냥 한 번 불러봤어. 그때 봐?”


“으으으…! 칫! 어서 들어가요, 지휘관님…!”


꼬리를 내린다고 못 긁는 건 아니지. 


뭐 어쨌든 얼떨결에 하와이 여행을 가게 됐다.


부하들을 말한 걸 보면 요크타운 자매와 M16, SOPII도 같이 가는 그런 여행이고, 아주 당연히 내 딸들도 함께 간다…만.


다음날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던 중, 이 이야기를 꺼내자 다들 귀여운 환호를 지르는데, 그중 엔터프라이즈의 아이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아빠...”


“응.”


“우리 이미 여행을 왔는데 또 가?”


“...아… 그게…”


아이들에게 794를 떠나 텍사스로 간다는 걸 단순한 여행이라고 말했었다. 헌데 이미 여행을 왔는데 거기서 또 여행을 간다는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으니 저런 반응이 나올만 하다.


그리고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


“엄마는… 왜 엄마는 안 와…?”


“엄마 보고 싶어… 아빠아, 엄마한테 무슨 일 있는 거야아…? 이모들도 제대로 안 말해줘… 맨날 곧 온다 일이 있다 이렇게만 말하고 삼십밤이나 안 오자나아아… 흐아아앙… 엄마아아…”


“......”


한 소녀가 엄마를 찾아 서글피 울자, 다른 소녀들도 잠시 잊고 있었던 엄마의 존재를 떠올리고 분위기가 급격히 침울해진다.


난 이런 상황 속에서, 아무 말도 못했다.


내 딸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음에도 닦아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 아이들이 진실을 모르고 사는 걸 원하지만, 그러면 지금처럼 부녀관계에 금이 갈 것이 필연적이다. 왜 난 평범한 가정을 가지지 못하는건가. 왜 내 아이들은 다 친모가 다른건가.


“오빠, 애들 왜 그래?”


“......”


“오빠?”


“아, 어어, 어… 하, 얀순이 왔구나…”


마침 구원의 동앗줄을 내려주려고 온 얀순이.


아빠 아래서 눈물을 흘리며 엄마를 찾던 아이들은 아빠보다 더 힘이 센 고모에게 가 묻는다.


-고모오…


“엄마는 언제 와요…?”


“엄마 보고 싶어…”


“아, 우리 강아지들, 엄마 기다리느라 지쳤구나…”


(끄덕끄덕…)


“흠, 그래. 고모가 마지막날에 엄마들 데려올게. 이것들이 엄마가 돼선 자기 딸내미 놔두고 나돌아다녀? 그러면 안 되지.”


“정말…?”


“그럼. 자, 약속. 공항에서 만나서 같이 집으로 가자.”


“훌쩍, 응…!”


“뭐? 야, 잠깐만 이리 와봐. 얘들아, 미안해. 아빠가 고모랑 잠시 얘기 좀 하다 올게. 조금만 기다려!”


순간 귀에 꽂히는 말에 깜짝 놀라 얀순이의 손을 잡고 잠시 자리를 이동한다.


얀순이 역시 ‘이 오빠 또 이러네’ 이런 표정으로 순순히 날 따라온다.


“후후, 단둘이서 있으니까 좋네…”


“너 미쳤어? 걔들을 어떻게 데려오려고?”


“어제 말했잖아? 폭격한다고.”


“네 말대로 폭격을 해. 그건 나도 그러고 싶어. 그런데, 걔네들이 폭격 당일날에 모두 794에 박혀있겠다는 확신은 있어?”


“도망가면 도망가는대로 잡거나 죽이면 돼.”


“그게 네 마음대로 될까? 혹여나 민간인 사이에 숨어들어가면 일이 무지막지하게 커진다고!”


“그저께 봤잖아. 사람 하나만 정확히 맞춰서 죽이는 미사일도 있고, 아님 마음 편하게 경찰 써도 되고, 방법은 많지. 아 맞다, 거기 경찰은 이미 먹혔지? 음, 전자가 편하겠네.”


“잘못하면 세계대전까지 갈 수도 있는 상황인데, 누가 보면 식당에서 메뉴 고르는 줄 알겠다?”


“잘못 따윈 고려도 안 해. ‘오빠를 위한 거라면 오직 완벽만 추구하자’가 내 철학이야.”


“하아… 얀순아, 제발 진지하게 하자. 이건 게임이나 소설이 아니라니까?”


“게임이나 소설 같은 현실을 보여줄게. 걱정말고 그 년들한테 할 욕이나 생각하고 있어.”


“백번 양보해서 만약 데려온다고 치자. 그러면 그 이후는? 걔네들을 어떻게 애들한테 보여주고 어떻게 감옥에 쳐넣을건데?”


“걱정 말라니까 그새 흘려 듣네. 다 생각이 있어.”


“그 생각으로 7일 안에 작전 수립부터 수행까지 이 모든 걸 다 할 수 있겠어? 국제분쟁까지 갈 일을?”


“응.”


“...참, 아휴, 어렸을 때 고집 어디 안 가네… 하긴, 이 넓고 푸른 하늘이 다 네건데 뭐라도 되긴 되겠지…”


“오빠가 귀찮을 일은 전부 처리해줄테니까, 그 년들에게 선만 제대로 그어.”


“알겠어...”


막강한 여동생의 힘을 빌려 꼬일대로 꼬인 일을 풀어나가는 이 패턴이 몇번이나 반복되는지 모르겠다.


확실한 거는, 지금으로부터 일주일은 이전과 차원이 다른 파도가 온 지구를 덮칠 것이다.


나 하나 때문에 7대 선진국 독일의 공군이 사실상 와해되었고, 오대양 육대주 중 최소 유럽과 대서양이 혼란에 빠졌다. 


이 모든 게 결국 내가 만든 일이니, 내가 마무리 지어야 한다.


“얘들아, 오래 기다렸지? 고모 말대로, 여행 마지막날에 엄마랑 만나서 돌아갈거야.”


-우와!!


-아빠 고모 최고!


“무려 한달만에 만나는 엄마이니, 다들 엄마한테 무슨 말 할지 준비하고… 그리고… 어…”


-아빠?


“...하하, 너무 행복한 미래가 생각나서 순간 할 말을 잃었네… 아이구, 우리 공주님들, 엄마 얘기는 잠시 뒤로 하고 거기서 뭐 하면서 놀지 고민해볼까?”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 싶은 역겨운 시나리오들이 뇌리에 수없이 스친다.


하지만 난 가족을 위해서라면 이깟 몸따위 희생할 자신이 있는 아빠이자 남편이자 오빠이다. 설령 그 시나리오들 중 하나가 실현된다 하더라도, 내 가족이 행복한 결과가 나온다면 상관없다. 


그러니 부디, 이 세상 모든 신들에게 내 선택이 내 가족의 안전까지 해치는 최악의 결과가 나오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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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달부턴 최소 월 3편을 올려보려고 합니다.


오래 기다려주셔서 죄송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