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론 베르티아 공작과 그의 부인 지젤 베르티아 사이엔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다.

그들 부부의 나이가 40이 넘어갈 때 지칠대론 지친 지젤이 테론의 손을 잡고 말했다.

 

“테론, 나는 더이상 안 될 것 같아요. 다른 처를 구해서 후사를 도모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자식이 없었던 것만 제외하면 금슬이 좋았던 부부였기에 테론은 그 이야기를 듣고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안 돼! 다른 처를 구하라니? 그게 지금 무슨 말이오? 내가 어떻게 당신을 두고 다른 여자와 몸을 섞으란 말이오? 당신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 몰랐소.”

 

지젤은 테론의 말에 기뻐했지만 슬펐다.

그의 눈에 고뇌가 섞여있다는 걸 모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보, 잘 생각해봐요. 나는 이미 늙었어요. 아이를 밴다고 해도 그 아이가 건강하다고 할 수 없는 나이예요. 다른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구해 적장자를 낳아요. 이건 당신의 부인이 하는 말이예요.”

“젊고 아름다운 여자? 그게 무슨 소용 있소? 이 제국에서 황녀를 제외하고 당신보다 고귀한 피가 어디 있단 말이오? 내 말이 틀렸소?”

 

사실이 그렇다.

엘티아 제국에서 공작가는 베르티아와 나타 이 두 가문 뿐이다.

테론과 지젤은 태초부터 제국과 역사를 함께한 두 가문의 영원한 우애를 위해 맺어진 정략결혼이었다.

그리고 테론은 철저한 계급주의자였다.

지젤이 말했다.

 

“클린다 후작가의 영애가 혼기가 꽉 찼다고 하더군요. 또……”

“안 돼! 당신 말고는 감히 내 피를 더럽힐 수 없소! 당신이 쓸데 없는 걱정을 하니깐 애를 못 배는거 아니오? 걱정하지 마시오! 신이 자애롭게 우리를 보살펴줄 것이니!”

 

테론은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방을 나갔다.

방에 쓸쓸히 홀로 남겨진 지젤이 얄쌍한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제발 태어만 다오….

모든 사랑을 담고담아 황제의 자식보다 귀하게 키워줄테니…….

 

지젤은 간곡히 바랬다.

 

 

 

*****

 

 

 

 

1년이 지났다.

테론은 누가봐도 안달이 나있는 사람처럼 문밖을 계속해서 서성이고 기웃거렸다.

안에는 여자가 찢어지는 목소리를 냈다.

그 목소리를 들을수록 테론은 더욱더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숨 돌리러 온 늙은 산파가 문을 열고 나오자 테론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산파는 테론 공작이 밖에서 바로 기다리고 있을 줄 몰랐기에 놀랐다.

 

“고, 공작님 계셨습니까?”

“아이는 어떻게 됐어?! 아이는!”

 

테론은 흥분한 기색으로 산파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두렵고 지체 높은 가문의 공작이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산파는 긴장이 풀어지자 담담히 말했다.

 

“네. 지젤 부인께서 건강한 아이를 낳으셨습니다.”

“아아! 아아!”

 

테론은 통곡했다.

기쁨이 넘쳐흘러 잠시 이성을 잡아먹었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왔다.

 

“아들이오? 아들이야?”

“……딸입니다.”

“아아!”

 

기왕 낳았으면 아들이면 더 좋았을 것을!

테론의 기쁘고 들뜬 마음이 순간 가라앉았다.

테론이 문을 열고 들어가려하자 산파가 말렸다.

 

“아직 부인께서 안정을 찾으셔야…”

“괜찮아!”

 

테론이 들어서자 시녀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그는 누워서 얕은 숨을 헐떡이고 있는 지젤의 손을 꼭 잡았다.

지젤이 간신히 말했다.

 

“아이가… 아이가…”

“정말 고생 많았소. 정말 잘했소! 내가 말하지 않았소? 나는 당신을 늘 끝까지 믿었으니깐!”

“아이가… 아이가…… 딸이네요….”

 

지젤이 아쉬움을 삼키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테론도 입맛이 썼지만 온갖 노력 끝에 늘그막에 얻은 첫 아이였다.

고생한 부인을 나무랄 수 없었다.

 

“괜찮소! 딸이면 어떻고 아들이면 어떻소? 아이는, 아이는 어디 있지?”

“제… 오른 품에… 있어요…. 우리 아가….”

“어디!”

 

지젤이 오른 팔을 살짝 들어보이자 울고 있는 아기가 보였다.

테론은 자신의 자식을 보자 충동적으로 번쩍 들어올렸다.

 

“하하하하! 그래. 네가 내 딸이구나! 베르티아와 나타 공작가의 귀한 핏줄을 이은 우러러 볼 수밖에 가문의 적장자! 네가 내 딸이구나…! 하하하!”

“응애!”

“하하하하!”

 

테론의 아쉬웠던 마음은 자신의 아름다운 핏덩이를 보자 물밀 듯 사라졌다.

아들이면 어떻고 딸이면 어떻단 말인가?

잘 키우면 되는 일이다.

잘 키우기만 하면 격에 맞는 사위를 가문에 잇게 할 수 있고, 그럴만한 배필이 없다면 전통을 무릅쓰고 딸을 후계자로 내세울 수 있다.

테론은 아기의 볼에 쪽쪽 소리를 내며 볼뽀뽀를 했다.

시녀들이 평소답지 않은 공작주인의 주책스러운 모습에 웃음 소리를 참았고 지젤은 진심으로 기뻐하는 테론을 보며 조용히 안도했다.

 

“우리 딸의 이실리아로 하는 게 어떻소? 여보.”

“좋네요…. ‘귀하고 귀하다’는… 말이 딱 들어… 맞아요….”

 

지젤이 버거워하며 대답하자 테론은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

 

‘내 정신 좀 봐라.’

 

테론은 얼른 아이를 지젤의 품에 놓고 옆에서 지켜보던 산파와 시녀들에게 산모의 건강을 유심히, 엄중히 지키라는 말과 함께 방을 나왔다.

 

“후후후…. 후후후후….”

 

방을 나오고 집무실로 돌아가는 내내 테론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한 아이의 아빠가 됐다.

이보다 뜻 깊은 일은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테론은 생각했다.

 

 

 

*****

 

 

 

6년이 지났다.

두 부부와 염원과 축복 속에서 태어난 이실리아 베르티아는 6살이 됐다.

소녀는 옆에서 자신을 가르치던 존 마코스를 보고 말했다.

 

“존.”

“예?”

 

턱수염을 풍성히 키운 중년의 남성은 자신의 제자가 자신을 올려보자 볼이 간지러웠다.

 

“오늘 수업 여기까지 해. 재미 없어.”

“하, 하지만…….”

 

베르티아 가문의 역사는 500년이나 됐으며 과거에는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일을 해왔으며 어떻게 일을 해결했는 지에 대한 지혜를 역사를 뒤집어보며 배운다.

베르티아 가문의 자식이라면 누구나 배워야하는 기초적인 공부다.

마코스는 베르티아 공작가를 대대로 따른 귀족 가문이기에 존 마코스는 역사학을 맡으며 이실리아를 가르쳤다.

그런데… 이 영애는 어리고 어린데도 자신의 위치를 너무나도 잘 안다.

 

 

“하지만?”

 

이실리아가 눈을 흘기자 존은 식은땀이 났다.

 

“…알겠습니다. 공작부인껜 제가 잘 말해두겠습니다.”

“흥. 알았으면 가봐.”

“예.”

 

존이 방을 나가자 이실리아는 머리에 팔을 대며 자신의 넓직한 침대에 누웠다.

 

“재미 없어.”

 

이 넓은 방에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은 없다.

 

“지루해.”

 

그렇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이실리아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들어와.”

 

들어온 젊은 여자는 자신의 유모였다.

성이 없기에 이름을 외우기 쉬웠다.

 

“아카, 무슨 일이야?”

“아가씨….”

 

아카는 예쁘게 땋은 머리를 헝클어드린 채 누워있는 이실리아를 두렵게 바라봤다.

이 시간에 존이 나온 것을 우연히 본 아카는 소녀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술 담당 선생님께 점심식사가 끝나고 오라고 할까요…?”

“아니. 영원히 오지 말라고 해. 그럴 기분 아냐.”

“……저녁에 오라고 전달하겠습니다.”

“아카.”

 

이실리아는 상체를 일으켜 아카를 쳐다봤다.

아카는 본능적으로 눈을 피했다.

이렇게 작은 몸의 아름답기만한 소녀는 심연 같은 눈에 똬리를 튼 것 같은 뱀같은 무서움과 카리스마를 갖고 있다.

아카는 두려움을 참고 이실리아가 말하는 걸 가만히 들었다.

 

“유리아는 언제 오지?”

 

유리아는 이실리아와 비슷한 나이로 나타 가문의 영애다.

아카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제가 알고 있기론 한 달 뒤에 내방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직접 가는 건?”

“안 됩니다. 공작님께서 자리를 비우셨으니 여주인님께서 이곳에 계셔야합니다.”

“…….”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난 아무 말 하지 않았는데?”

“죄송합니다….”

“…….”

 

이실리아는 아카를 돌려보내고 닫힌 문을 잠궜다.

그리고 발코니로 나와 푸른 하늘과 대지의 자연을 바라봤다.

싱그러운 바람이 분다.

팔을 뻗어도 아무것도 잡을 수 없다.

아무것도….

 

“감옥 같네. 이 저택이…….”

 

오로지 격에 맞는 상대와만 놀 수 있다.

시간의 대부분은 그 신분에 걸맞는 교육이며 안전에 우려해 함부로 나다닐 수도 없다.

답답하다. 라고 이실리아는 생각했다.

 

-호호호! 너 진짜 못한다.

-시, 시끄러워!

 

“응?”

 

이실리아의 눈이 1층으로 향했다.

대문 근처에서 청소를 하다말고 남자 아이와 여자아이가 실로 무엇을 하고 있는게 보였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여자아이는 웃고 남자아이는 분에 차고 있었다.

이실리아의 눈에 불이 켜졌다.

내 속은 이렇게 썩어들어가는데, 감히 주인인 날 놔두고 저렇게 태평하게 논다고?

 

“저 녀석들…….”

 

이실리아는 서둘러 방문을 열고 나갔다.

 

 

 

*****

 

 

 

‘시발.’

 

아론은 자신에게 혀를 내보이며 다이아몬드를 내보이는 달리아에게 분을 삭혔다.

베르티아 공작가의 시종으로 빙의되고 뇌가 롤로 절여진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지나가는 자신 또래의 시녀에게 실뜨기를 가르쳐주며 놀았다.

일주일은 재밌었다.

자신에게 지고 분에 찬 나머지 울 것 같은 달리아를 보며 아론은 어째선지 십년 묵은 체증이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순간 현타가 왔다.

 

‘이게 뭐 하는 거냐… 애 하나 이겨서 뭐가 좋다고….’

 

싫증이 난 아론은 초등학교때 배웠던 비기들을 달리아에게 모두 알려주고 놀이를 접었다.

그리고 한 달 뒤.

달리아가 갑자기 자신을 찾아와 겁대가리도 없이 실뜨기를 하자고 제안해왔다.

애초에 자신이 말을 건 것부터가 시작이었지만 이제는 애랑 놀아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든 아론이었기에 계속해서 거절했지만 달리아는 청소 시간에도 끊임없이 달라붙었다.

할 수 없이 빗자루를 놔두고 구석에 숨어 실뜨기를 했다.

결과는 완패였다.

 

“다시 해! 다시!”

 

달리아가 손으로 웃음을 가리며 말했다.

 

“응? 싫어. 안 해. 후후.”

“뭔 소리야? 난 다시 해줬잖아. 이러는 게 어딨어?!”

 

달리아의 눈이 커지더니 빗자루를 주웠다.

 

“아, 나,난 저쪽 청소하러 가야겠다. 하하….”

 

그러더니 서둘러 다른 곳으로 뛰어가는게 아닌가?

아론은 입술을 핥으며 저 가증스러운 뒷모습을 쳐다봤다.

 

“한판튀하네. 저 약은 놈. 어휴. 씨.”

“한판튀? 그게 뭔데?”

“그게 뭐냐면, 딱 한판만 이기고 도망가는…… 어? 누구야?”

 

아론은 순간 섬뜩함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이실리아였다.

 

‘…시발. 이게 왜 여깄어?’

 

아론은 서둘러 고개를 숙였지만 이미 늦었다.

고개 위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종이 언제부터 내게 반말을 할 수 있었지?”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가씨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어머니가 방에 계시려나?”

“아가씨!”

 

아론은 순간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였다.

 

‘뭔 눈이 저렇게 무섭냐…. 괜히 악역 영애가 아니구나. 시발. 좆됐다. 어떡하지? 방심하는 게 아니었는데. 시발.’

 

번뇌에 찬 아론의 머리 위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전 차가운 목소리와 달리 이번엔 뭔가 부끄러움을 숨기려는 듯한 목소리였다.

 

“…시종, 너. 죽고 싶지 않은 거지?”

“예! 정말로 실수였습니다! 아가씨!”

“그럼 나한테도 가르쳐줘.”

 

아론의 눈이 이실리아의 손가락 방향으로 향했다.

잔디 위에는 달리아가 바닥에 버리고 간 실이 놓여져 있었다.

순간 상황 파악이 안 된 아론이 멍청한 소리를 냈다.

 

“…뭘 말입니까?”

“저 실로 아까 도망간 애랑 놀고 있었잖아? 뭐하고 논 거지?”

 

그제야 이실리아의 의도를 알아챈 아론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잘하면 살 수 있겠구나!’

 

그리고 최대한 정중하고 말끔한 미소를 지었다.

이실리아의 눈이 찡그려졌다.

 

“시종. 너 웃는 모습이 별로구나. 아까처럼 썩은 표정만 지으렴. 그게 잘 어울려.”

 

‘시발년…. 존나 솔직하네…….’

 

하지만 어쩌겠는가?

빙의된 아론이란 캐릭터가 신분과 재능은 미천하고 얼굴은 평범한 것을….

아론이 표정 관리를 못하며 찡그리자 순간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후훗.

 

“어?”

 

너무 놀라 고개를 드니 이실리아는 여전히 차갑고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아론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럼 그렇지. 이실리아는 어릴 때 단 한번도 웃은 적이 없다는 설정인데, 환청이었네.’

 

아론은 실을 줍고 생각했다.

달리아에게 범한 실수는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실리아에게 실뜨기를 가르쳐주되 비기를 가르쳐주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결의하고 실을 펼쳤다.

아론이 엄숙한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이실리아는 조금은 긴장한 표정으로 아론의 손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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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썼던 암살자 5화 짜리는 쓸 때는 몰랐는데 다 써놓고보니 전개가 심각하게 늘어져서 아예 그냥 뜯어고쳐야해서 접고 말았습니다..


거기서 배운 경험으로 이번에는 늘어지지 않게 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