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 됐다.

오랜 세월 명실상부한 한국 제약회사 1위에 빛나는 명일제약 진성열 회장은 딸의 결정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반고로, 가겠다는 거니? 딸아.”

 

그의 딸 진세연은 귀까지 덮는 단정한 머리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워지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이 미동도 없이 서있고 자신을 그저 무뚝뚝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노라면 딸의 웃는 얼굴을 못 본 지 오랜 세월이 지났구나, 하고 진성열은 느꼈다.

진세연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거기 아빠가 이사장이잖아? 집에서 가깝기도 하고.”

“그렇긴 한데, 그래도 아빠 생각은 좀……”

 

진성열은 차마 특목고나 자사고에 가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속을 썩여본 적이 없는 딸이다.

다른 재벌 집안 자식들은 그 어린 나이에 벌써 노는 것에 맛 들여서 부모 속을 썩이기가 부지기수인데,

우리 딸은 어떤 시험이든 단 한 번도 만점을 놓친 적이 없다.

그뿐일까? 행동거지는 얼마나 사려 깊은지 밑에 있는 하수인에게도 무시하거나 부려 먹는 법도 없다.

술 자리에서 재벌 회장들에게 그렇게 딸자랑을 해도 시간이 모잘랐고 늘 새로웠다.

시샘하는 눈빛을 받으면서 먹는 술 한 잔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다.

그런 소중하고 귀중한 딸이 처음으로 부모에게 부탁의 말을 했다.

진성열은 단순한 부모의 욕심으로 딸의 부탁을 감히 덮을 수 없었다.

 

“그… 알겠다. 오늘 바로 수속을 밟아주마. 근데 뭣 때문에 일반고로 가는 건지 물어봐도 되겠니?”

 

진세연은 별거 아닌 듯 답했다.

 

“그냥, 지루해서.”

 

 

 

********

 

 

 

그 사건 이후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빠진 이빨이 다시 재생하거나 그런 일은 당연히 없었다.

내 불어터진 얼굴과 텅 빈 치아를 본 집주인은 사건의 경위를 듣고 노발대발해서 경찰을 부르려는 걸 내가 겨우 막았다.

할머니가 말했었다.

 

“그 씨발 놈한테 줘터지는데 왜 경찰에 신고 안했어?!”

“그럴 경황이 없었어요.”

“왜?!”

“쌍둥이가… 생겼거든요.”

 

내 말에 입을 멍하니 벌린 할머니의 표정을 보며 속으로 ‘거봐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할머니한테 들은 애기지만 아빠란 놈은 바로 한국을 빠져나와 수많은 사기죄로 형량이 확정돼 인터폴에 적색 수배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애초에 맡겨놓고 찾을 생각도 없었던 사람이다.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처음 돈을 벌기 시작한 때부터 오늘 3월 1일까지 벌어놓은 돈이 총 625만원.

삼촌의 방에서 날 쫓아낸다는 말을 듣고 난 후 쫓겨날 때까지 3개월간 벌어놨던 돈이 194만원이었다.

그 전 월세 50만원과 새로 낸 월세 12만원을 더해 62만원이 그 날 한꺼번에 나갔다.

즉 132만 원을 갖고 있는 상태로 방학동안 계속 일을 했으니 3개월간 432만원을 더 번 셈이다.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미성년자가 번 것치곤 많은 액수다.

하지만 부족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원래 계획대로라면 더 벌었어야 했는데…….’

 

1월 중에 갑자기 쌍둥이를 맡게 된 직후부터는 쌍둥이를 돌보느라 낮에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내가 먹은 식비,공과금,월세,통신비 등이 통장에서 빠져나갔고.

쌍둥이가 쓸 3달 치 기저귀값과 분유값만 하더라도 한번에 90만원이 나갔다.

거기다 젖병,쪽쪽이,애기가 입을 내복,모자,양말,옷들과 침대,이불,베개까지 사고 욕조와 아기전용 목욕 용품까지 사니 한순간에 뼈를 삭히며 벌어놨던 돈이 뭉텅이째 빠져나가 사라졌다.

이미 각오 하고 예상했던 바였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상상 이상이다.

아기 하나 키우는데도 곡소리가 나온다고 하는데 난 심지어 쌍둥이였으니….

 

‘이제 결단을 내려야겠지.’

 

학교에 가게 될 것을 대비해 보육원과 지자체 지원도 알아봤었다.

하지만 돌봄 서비스는 쌍둥이가 내 밑으로 돼있지 않기 때문에 받을 수 없었고, 주변 보육원의 절반은 이미 예약이 차있거나 0세 아이를 받아주지도 않았다.

집으로 아기를 맡아줄 사람을 불러야하는데 비용 감당이 도저히 안된다.

 

“…관두자.”

 

자퇴를 결심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쿵쿵.

소심한 두드림에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문을 열어주자 할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애들 자냐? 깰까 봐 초인종도 못 누르겠네.”

“네, 잘 자요. 무슨 일이세요?”

“이거….”

 

할머니가 종이백을 내밀었다.

안에는 각종 반찬이 오밀조밀 꽉 차있어 들려니 무거웠다.

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늘 감사합니다. 할머니. 잘 먹을게요.”

“내가 주겠다고 했으니 신경쓰지마러. 그건 그렇고 내일이면 니 입학하지?”

“네? 네.”

“아빠가 집을 비우면 애들은 어찌할 건데?”

 

나는 조심히 말했다.

 

“자퇴하려고요.”

“뭐? 자퇴?”

“네. 한 달간 키워보면서 고민은 해봤는데, 역시 학교 다니면서 애 키우는 건 힘들 것 같아요. 애가 하나면 몰라도 쌍둥이니깐요.”

“쯧.”

 

할머니는 혀를 차고 말했다.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은 해야지 사회 나가서 뭐라도 할 거 아니냐?”

“말씀드렸잖아요. 애 때문에 안될 것 같다…….”

“내가 맡아주마. 승현아.”

“네?”

 

두 가지에 놀랐다.

하나는 아이를 맡아주겠다는 말이고 두 번째는 처음으로 내 이름을 집주인이 불러줬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안 그래도 우리 집 할배 돌아가고 적적하던 참이다. 출가한 자식은 맨날 결혼하다고 거짓말이나 하면서 내 속이나 썩이고. 그런데, 널 보고 있으면 내가 마음이 쓰여서 못 견디겠다. 이렇게 어린 애도 살려고 아등바등거리는데, 내가 도와주지 못할 게 뭐가 있겠니?”

“……할머니.”

 

갑자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괴팍한 할머니란 말은 취소다.

집주인 어르신은 속이 정말 따뜻한 어른이었다.

이런 따뜻함을 지금껏 받아본 적이 없다.

마음이 어루만져지면서 응어리가 풀어지자 눈물샘이 터져나왔다.

할머니가 어깨를 토닥였다.

 

“나도 형편이 좋진 않아서 금전적인 지원은 힘들어. 대신 네가 없는 동안 잘 보살펴주마. 승현아.”

“네, 그건 당연히 제가 알아서 해야죠 정말 감사드려요…. 할머니.”

“50만 원.”

“…네?”

 

할머니는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보육원 보내면 기본 백 이상은 들지 않니? 거기다 쌍둥이인데. 절반이면 혜자다. 혜자.”

 

아.

잊고 있었다.

눈앞에 할머니는 날 내쫓았던 사람이라는 걸.

돈 문제에 관련해서는 되게 민감한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

 

“조, 조금만 깍아 줘요.”

“49만원.”

“조금만 더요.”

“48만 5천원. 이 이상은 나도 안 된다. 그냥 자퇴하거나 말거나 알아서 해.”

“아, 알았어요. 할머니.”

 

나는 튕기며 돌아가려는 할머니의 손을 잡아챘다.

할머니의 말대로 저 금액으로 내가 비어있는 시간 동안 쌍둥이를 맡아주는 건 값쌌다.

그리고 무엇보다 할머니가 우리 쌍둥이를 잘 돌봐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 사람은 더 많은 돈을 줘도 구하기 힘들다.

어쩌면, 돈을 받는 것으로 자신의 쑥쓰러움을 감추려는 게 아닐까? 란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할머니덕에 나는 자퇴를 면했다.

그리고 내일이면 나는 고등학생이 된다.

 

 

 

********

 

 

 

< 1 - 1 >

 

진세연은 반에 도착해 아무 곳이나 앉았다.

이미 도착했던 학생들이 들어온 자신을 파악하곤 수군거렸다.

똑똑한 체한다는 둥, 예쁜 척해서 재수 없다느니 자신을 헐뜯는 말들이 들려왔지만 이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하등 신경쓰지 않을 거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시간이 지나니 자신의 옆자리를 빼곤 모두 착석해 있는 상태였다.

첫 학기인데 시끄러웠다. 모두 아는 얼굴인가 보다.

그 뒤 담임이 들어와서 출석을 불렀다.

하나… 둘… 자신의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손을 들고 대답한다.

그리고…

 

“이승현.”

“…….”

“이승현! 뭐야? 애 안 왔어?”

“그런가 본데요?”

 

누군가 대답하자 담임이 혀를 찼다.

 

“입학날에 벌써부터 지각이나 하고 뭔……”

 

그때 누군가 우당탕탕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덜컥.

비지땀을 흘리는 남학생이 앞문을 열며 호흡을 골랐다.

 

“헉헉… 죄,죄송합니다. 늦어서.”

 

담임이 고개를 저었다.

 

“얌마. 승현아. 너 이름 내가 벌써 기억했다. 빨리 가서 자리 앉아. 새끼야.”

“네, 네…. 헉헉. 죄송합니다.”

 

이승현은 비어있는 자리를 확인하고 진세연 쪽으로 다가와 앉았다.

얼마 안있어 담임이 진세연을 불렀다.

 

“진세연.”

“네.”

“아 네가 그 개구나. 알았다. 손 내려라.”

 

출석을 마치고 몇 가지 당부 사항과 함께 담임이 교실을 나갔다.

그러자 새학기의 설렘과 함께 교실 안은 다시 시끄러워졌다.

진세연은 한숨을 푹 쉬었다.

 

‘뭔가 색다른 일이 없을까 해서 왔는데, 이래서야 중학교 때랑 뭐가 다를까.’

“쿠울-”

“응?”

 

코고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니 짝궁이 된 이승현이 고개를 숙이고 어느새 잠이 들고 있었다.

진세연은 그를 무시했다.

 

‘밤새 게임이라도 한 건가? 공부를 썩 잘해보이진 않는데…. 한심한 남자네.’

 

고개를 돌리려는 그때.

이승현의 품안 왼손에 들려있는 휴대폰이 보였다.

훔쳐보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 눈에 시야에 들어와 저도 모르게 진세연은 내용을 읽고 말았다.

 

- 아기의 수면 시간

- 애 잘 재우는 법

- 애가 밤새도록 우는 이유

- 부모가 되면 해야하는 것

 

“……?”

 

이승현의 구글 검색목록을 보며 진세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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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날때마다 계속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