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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럭! 케흑! 아으 씨!"


희미한 시야 속에서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입안의 텁텁함이었다. 눈도 귀도 아직 제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촉각과 미각은 그런 혼란한 와중에도 훌륭하게 제 역할을 수행했다. 기분 더러웠다는 소리다.


"웩! 아윽! 억!"


그제야 입에 잔뜩 들어간 것이 모래란 것을 깨달은 나는 황급히 손가락을 집어넣어 모래를 쏟아냈다. 도대체 내 침에 얼마나 적셔졌는지 나오는 모래들은 약간의 끈적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오, 더러운 거! 퉷!"


대부분의 모래를 뱉어내자 어느새 시야가 돌아와 있었다. 낯선 땅, 낯선 해변의 모래사장 위였다. 그제서야 내가 정신을 잃기 전 무슨 일을 당했었는지 깨닫고 급히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살벌하게 날붙이를 들이대는 병사나 강도, 그것도 아니면 이빨을 들이대는 굶주린 짐승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게 내 뺨을 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


바닷바람의 기습에 잠시 몸을 떤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을 매만져 장검을 뽑았다. 다행히 검은 내가 제자리에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다. 서늘하고도 묵직한 감촉에 안정감을 되찾은 나는 제대로 돌아온 시력으로 다시 한번 주변을 살폈다.


"둘리...?"


"뀨...?"


""죽어!"


"뀨...!"


그리고 바로 이상한 생물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내 무릎을 겨우 넘길 정도의 크기, 녹색 피부, 등에 돋아난 우둘투둘한 뿔들, 그리고 사람처럼 흰자위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 두 눈.


"희동이의 원쑤!"


지난 3개월간 이 중세잽랜드에서 온갖 개고생을 반복하며 배운 사실이 있다. 겉모습에 상관없이 뭔지 모르는 건 일단 조져라. 학습된 습관대로 칼자루를 짧게 잡고 힘껏 휘둘렀다. 그대로 호선을 그린 장검은 둘리의 가슴팍에 붉은 실선을 남겼다. 녀석은 잠깐 동안 그것이 뭔지 인지하지 못하고 귀여운 울음소리를 내며 의문을 나타냈지만 곧바로 상처가 퍼지며 녀석의 붉은 피를 아낌없이 뽑아내자 짧은 비명과 함께 앞으로 쓰러졌다.


"그라시아스."


그렇게 나를 기습하려던 녀석은 자신의 몸을 나의 일용한 양식으로 아낌없이 남기며 허무하게 쓰러지고 말았다. 물론 인간에 대한 경계가 옅어 호기심에 접근한 것을 다짜고짜 죽인 것일 수도 있었지만 녀석 사지의 발톱이 모두 빠져나와 있는 것을 보면 나를 덮치려던 것이 맞았을 것이다. 조그맣긴 해도 충분히 내게 유의미한 상처를 줄만한 크기와 예리함을 지닌 발톱이었다.


"...내가 이래서 여기를 벗어나려는 거야."


더럽고, 축축하고, 벌레 많고, 재미없고 주변은 온통 위험한 것 투성이다. 그나마 정을 붙여볼 만한 사람들도 이 때문에 자고 일어나니 죽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좆같음을 꾸역꾸역 견디고 크레오메를 찾아 돌아가기 위한 여정을 시작이라도 해볼 기회를 얻었는데 그게 다 물거품이 되버렸다.


"망할 거..."


이 생각이 떠오르니 겨우 저녁거리 하나 생겼다고 좋아하고 있는 내가 다시 한번 한심해졌다. 그리고 곧 히로인들에 대한 분노가 느껴졌다. 어떻게 얻은 첫 기회인데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날려먹는단 말인가? 게다가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는 끔찍한 상황에 분노는 식을 줄 모르고 더욱 치솟아 올랐다.


"너희들 때문에...는 아니지..."


하지만 그것도 다 쓸모없는 푸념에 불과하다. 이레시아, 밀리아나, 파티마 셋 모두 내가 이딴 일을 당하기 전 내 '딸깍'에 의해 똑같은 일을 당한 피해자들이었으니까. 내가 지금 분노를 향해야 할 대상이라면 깡통이 언급했었던 제작자가 유력하리라.


"야, 깡통. 여기가 어디야?"


-...


"깡통...?"


생각난 김에 현상황을 파악하고자 고철을 불러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의문을 느껴 다시 한번 불러봤지만 역시 대답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보통 내가 부르기도 전에 시덥잖은 화를 거는 것도 자주하던 놈이고 불러도 금방 대답하는 녀석이었는데 지금은 쥐 죽은 듯 아무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에이..."


-...


"야."


-...


"지금 장난하는 거지? 나와 이 또라이 새끼야."


-...


"ㅋ..."


아무래도 지난 3개월 동안 계속 붙어지낸 녀석이다보니 무의식적으로 녀석을 내 옷같은 대상 정도로 여겼던 것 같다. 늘 있는 게 당연한 그런 존재로.


"갑자기 띠꺼워지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녀석이 지금 내 옆에 없다는 게 중요하지.


정확히는 대충 정수기 겸 지도 겸 토치 겸 GPS 겸 지갑 겸 주머니 겸 탐색자 겸 나무위키 겸 파파고 정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녀석이 사라진 거다.


"좆됐네...?"


-그걸 이제 아셨습니까? 앞으로 제 소중함을 깨닫고 더 잘 대해주십시오, 휴-먼.


"???"


이상한 환청이 잠깐 들릴 정도로 정신이 멍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대륙 어딘지도 모르는 땅에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떨어진 거다. 


"니가 그리워질 줄이야..."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박힌다.


-쉬익


-챙


"어...?"


아니, 날아와 박힐 뻔했다. 지난 시간 동안의 단련의 효과로 예민해진 오감이 나를 노리고 날아오는 무언가를 반사적으로 감지하고 쳐냈다. 맑은 쇳소리와 함께 무언가 내 발치에 떨어졌다.손가락 둘을 이어붙인 정도의 쇠침이였다.


"크르르르!"


"고블린?!"


날붙이를 던진 범인은 대륙에서 가장 흔한 하급마족 중 하나인 고블린이였다. 근처의 수풀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는 열 정도의 고블린들은 꽤 오랜 시간 숨어 있었는지 온몸에 이파리가 잔뜩 묻어 있었다. 아마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던 나를 발견하고 관찰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공격하지 않았던 이유는... 크레오메의 마력 때문인가?"


하급마족, 마수는 평범한 인간이 어두운 마력을 지니고만 있어도 대상이 자신의 동족인지 아닌지도 제대로 판별하지 못한다. 고블린 녀석들도 마찬가지로 아마 내게 짙게 남은 크레오메의 마력을 내것으로 착각하고 내가 깨어나기를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둘리가 저놈들이 튀어나온 방향에서부터 내게 다가왔던 걸 보면 내가 둘리를 죽이기 전까지는 내가 인간인지 마족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직접 찔러서 확인 했어야지. 내가 사람새낀지 아닌지."


상황파악을 끝낸 나는 검을 앞세우고 녀석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앞으로의 상황에 대한 고민이고 뭐고 일단 눈앞의 상황부터 해결하고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