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


후방주의)중간에 삽입된 일러스트의 수위가 꽤 높습니다.









다시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 출발 당일, 아이들을 먼저 비행기에 태우고 짐을 점검하던 중 요크타운과 M16이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찾아왔다.


“어, 너희들, 오랜만에 보는 거 같네.”


“응, 거의 일주일만이지.”


“하와이에 간다고 들었어요. 한때 저희와 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한 많은 동료들과 함께 지냈던 장소였죠.”


“얀, 아니, 장관님이 너희들 보고 놀면서 고향 구경이라도 하라고 그러시더라.”


“...그리고 마지막 날에, 아이가 엔터프라이즈도 온다고 그러더라구요.”


“아, 들었구나…”


“지휘관님, 전 당신을 믿어요. 이번 일을 바로잡을 분은 당신밖에 없어요.”


“지휘관, 아직 우리 동생들은 이 일에 대해 모르고 있어. 아마 영원히 모르는 것도 좋은 선택이겠지.”


“하지만, M4를 비롯한 그 녀석들이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건 보기만 할 수 없어. 부탁할게. 어떤 방법을 쓰든, 모든 걸 되돌려줘.”


“설령 그게 폭격일지라도… 괜찮아요. 지휘관님의 심정이야 충분히 이해되니… 이따가 뵐게요.”


“하나 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린 네 곁에서 최선을 다하며 도울거야. 만약 M4와 싸우게 되더라도… 아냐. 그럴 일은 없겠지…”


“......”


뭔 대답을 할지 몰라 얼타던 사이, 그녀들은 내 어깨를 두어번 두드린 뒤 기내로 사라졌고, 나도 잠시 후 그 뒤를 따른다.


안전 비디오가 나오고, 안내방송이 나오고, 이륙하고, 벨트 사인 꺼지고, 밥 나오고, 이런저런 절차들을 지나면 다들 얼마 안 가 잠에 든다. 


이륙한지 7시간 반 무렵, 내 옆에 앉은 카리나도 어깨에 머릴 기댄 채 자고 있다.


-토독, 톡.


“794 스캔들이 일어난지 한달이 되어가고 있는 가운데, 총감을 잃은 독일 공군의 인사들이 국방부 청사 앞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들은 아직까지 794의 병력들이 독일 전국을 활보하면서 범죄를 저지르고 있고, 공군총감도 그 희생양 중 하나가 되었다며 목소릴 높였는데요.”


“......”


“하지만 경찰이 이들을 불법 시위로 간주하여 체포하자, 시민들도 무고한 군인들을 무력진압했다는 반응을 보이며 시위에 가세했습니다. OOO 기자입니다.”


“으윽…”


그녀가 불편하지 않도록 담요를 덮어주고, 조용히 팔을 옮겨 VOD를 켜자 뉴스 채널에선 아직도 나와 794에 관련된 소식이 흘러나온다.


뉴스의 장면과 헤드라인이 바뀔 때마다, 기자와 앵커가 멘트를 칠 때마다, 죄책감으로 온몸이 죄어지는 느낌에 거친 숨결이 기내에 작게 울려퍼진다.


“허억… 허억… 아아아…”


자리를 뜨고 아무도 없는 2층 라운지 소파에 누워, 상황이 왜 이렇게 됐나 한탄한다.


‘난 그냥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왜… 아…’


들어주는 이 하나 없는, 그래서 더 다행인 이 거친 숨소리가 멎을 때가 됐을 땐 카리나가 날 찾으려고 계단을 오르려던 참인 듯 했다.


“지휘관님… 여기 계세요…?”


“어, 카린…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는데 벌써 일어났어?”


“정말, 말은 하고 올라가셔야죠…”


“너무 잘 자길래 깨우기 좀 그렇더라고.”


“으음…”


나한테서 수상함을 느낀 그녀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아까 좌석에서 그랬던 것처럼, 옆에 앉아 어깨에 머릴 기댄다.


하지만 지금은 피곤한 기색 없이, 반지가 끼워진 왼손을 내 왼손과 겹쳐 속삭였다.


“지휘관님, 요즘 고민이 많으신 것 같아요…”


“에이, 아니야… 내가 뭔 고민이 있다 그래.”


“이런 크나큰 일에 고민이 없는 게 더 이상하죠. 괜찮아요. 뭐든 다 괜찮으니까, 저한테만 말해주세요… 전 지휘관님의 아내니까…”


“없다니까 그러네…”


“그러면 이 식은 땀은 뭐에요…?”


“아, 이거는…”


카리나가 오른손을 내 등에 올린다.


땀으로 축축해져 등에 착 달라붙는 이 셔츠 덕에 말 그대로 눈 가리고 아웅한 셈이 됐다.


이러면, 말하는 수밖에 없겠지…


“총감님이, 돌아가셨어…”


“네…?!”


“비스마르크와 카라비너가 총감님을 납치했고, 얀순이가… 미사일로…”


“세상에… 어떻게 그런 짓을…”


“그래서 따지니까 하는 말이 뭔지 알아? 필요 없어서 죽였다 하더라고… 그러면서 우리 돌아오는 날에 총감님을 죽인 그 미사일로 794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싸그리 잡아서 내 앞에 바치겠대.”


“...천명 가까이 되는 인원을 전부요…?”


“응.”


“지휘관님은 뭐라고 하셨어요…?”


“공적인 관계로서 난 철저한 을이야… 다 포기하고 알아서 하라고 했지.”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잔인할 수가 있어요…”


“어쨌든 총감님이 돌아가신 것도, 얀순이가 그렇게 된 것도 결과적으로 다 내 탓이니까… 그런 생각이 계속 들다보니 사람이 이렇게 되네…”


“아니에요, 지휘관님의 잘못이 어딨어요… 장관님, 위험한 분이구나…”


“왜, 그러면 안 돼? 나쁜 녀석들 갈아버리는 게 내 업무인데.”


“히깃?!”


“어머, 그거… 반지 맞췄구나?”


이젠 몇번인지도 모를 얀순이의 난입. 이번엔 조종실에서 나타났다.


깜짝 놀란 카리나가 어깨 뒤로 숨으면서 반지가 보여지자, 얀순이의 눈이 순간 크게 떠지며 지금껏 봤던 것 중 제일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예쁘네. 내것과 다르게.”


“.......”


“반지도 너한테 졌구나… 나는…”


“얀순아…?”


“…분위기 깨서 미안해, 오빠. 먼저 내려가볼게...”


“어어…”


그러나 그 약속이 있으니, 별 말없이 고개를 푹 내리고 터덜터덜 사라져 우리 둘에게 라운지를 양보했다.


얀순이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직전에, 뺨을 타고 내려가던 희미하게 보인 눈물이 머리에 아른거린다. 30초도 안 있다가 사라졌건만 그 영향은 가히 30년은 갈 것이다.


“...…”


“저, 지휘관님…”


“응.”


“장관님과 또 다른 일이 있었나봐요…?”


“아니야. 별 일 없었어...”


“...그런가요…”


“응…”


“우리, 약속 하나 해요.”


“?”


“장관님과 뭔 일이 생긴다면, 꼭 말해주세요. 아내로서 남편을 지키기 위해서니까… 알겠죠?”


카리나는 여전히 얀순이에게 적대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지라, 얀순이와의 관계를 투명하고 깨끗하게 유지하길 원한다.


…이미 한 번 더럽혀진 그 관계가 다시 깨끗해질리는 만무하지만…


얀순이의 등장으로 라운지의 기온이 뭔가 내려간 것 같다.


-또각, 또각, 또각…


그때, 계단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어디 갔나 했더니만 여친이랑 재밌게 놀고 있네.”


“넌… 이글?”


“그 반응은 뭐야? 첫 소개할 때 멍 때리면서 들었어? 정신줄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거야?”


얀순이의 발명품 중 하나인 이글이 등장해 특유의 띠꺼운 말투로 분위기를 전환시킨다.


썬더볼트와 함께 상당히 대하기 까다로운 친구라 일단 경계 자세로 나가보자.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는지?”


“꼬맹이들이 비즈니스 구역을 점거해서 말이지. 당최 휴식을 취할 수가 없잖아.”


“걔네들이랑 같이 어울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난 재밌더라고.”


“그런 수준 떨어지는 애들이랑 놀바엔 비행 중에 오토파일럿의 고도를 0에 놓고 천천히 자살하겠어.”


“말뽄새… 아, 아예 그냥 호놀룰루까지 날아가면 그럴 일도 없겠네.”


“세상 어떤 전투기가 그 거리를 날아가? 난 여객기가 아니라고. 그건 천하의 랩터도 못해. 기껏해야 굼뜬 뚱땡이 녀석들이나 하겠지.”


“밥차 쓰면 되지 않나?”


“밥차는 뭔 밥차야. 그 밥차로 입에 기름칠 해줘?”


“거 참, 애한테 이상한 말 들려주면 쓰나.”


“애라니?”


“여기, 여기 있지.”


“힛, 지휘관니임…!”


조용히 숨어있던 중 내가 배에 손을 올리자 부끄러워 하는 카리나.


이글은 그 모습을 보고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아~ 몇개월?”


“대략 1달 됐어.”


“호오, 재회의 선물이네. 축하해. 아 맞다, 요 아래 깡통 토끼도 애 있던 거 같던데.”


“네 입에서 처음으로 좋은 소리 들어본다. 그리고, 잠깐, 뭐? 축하해 다음에 뭐라고 했어?”


“아래 고철 토깽이도 임신하지 않았냐고. 이번에 잡혀온 물개 한 마리 있잖아.”


“걔가 여기 왜 있어?!”


“내가 어떻게 알아? 너 한눈 팔고 있을 때 올리비아가 이코노미 쪽으로 슬쩍 태우던데?”


“허…”


얀순이가 뉴저지한테서 무언가를 원하나 보다. 설마 오월동주?


이러면 더 불안하잖아… 이글과의 대화로 마음속 답답함을 좀 뚫어내나 싶었건만 또 다른 위협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거 보고 올리비아가 참 착하구나 했지. 저런 범죄자도 휴가 보내주잖아.”


“어떻게 관리하려는건지…”


“다 생각이 있겠지 뭐. 괜히 장관이고 우릴 만들진 않았을 거 아냐.”


“이글, 그리고 너희, 밥 왔으니까 내려와.”


“가요, 가, 멧돼지야.”


“멧돼지…”


“어이, 너한테서 그 소리 듣긴 싫으니까 조용히 하지?”


“흐미… 예예…”


대하기 어려운 나머지 하나가 눈만 빼꼼 내밀고 기내식을 이용해 대화를 중단시킨다.


나한테 앙금이 남아있는 듯한 썬더볼트의 눈빛이 아주 그냥 레이저를 쏴재끼는 것 같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응, 어서 먹자 얘들아… 아니, 얘가 어디 갔대…”


1층으로 내려온 뒤 아이들에게 기내식을 일일히 갖다준 후에야 내 자리에 앉았는데, 그 긴 시간 동안 얀순이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다.


이러면 걱정이 안 되는 게 이상한 법, 하지만 이 좁은 기내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는지라 아마 저 앞의 퍼스트 구역에 있겠지 하고 애써 넘겨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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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호놀룰루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태평양의 낙원, 호놀룰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Ladies and gentle…”


“하와이! 하와이!”


“와! 이! 키! 키!”


“진주만이여, 내가 왔다!”


“제발 가만히 좀 있어라 망할 꼬맹이들아…”


“손님, 아직 안전벨트 푸시면 안 돼요!!”


비행기가 움직이는 중에도 난리법석을 피우는 3인방, 승무원들이 불쌍할 지경이다.


아니나 다를까 게이트가 연결되자마자 직접 문을 열고 뛰쳐나가버린 탓에 언니들의 얼굴엔 노기와 미안함이 짙게 서려있다.


“저렇게 가봤자 어차피 내일에나 해변에 갈텐데…”


“이래서 라운지로 도망갔던 거라고. 비행 내내 저러는데 어떻게 버텨?”


“머리에 우라늄을 박아주고 싶네.”


“왜 그래~ 나도 엄청 신났는데 쟤네들은 오죽하겠어??”


“맞아맞아!”


“에휴…”


“으, 뜨거라…”


여러 불평불만을 쏟아내며 비행기에서 내리던 소녀들은 하나같이 하와이의 강렬한 햇살에 얼굴을 찌푸린다.


그중에서도 참새 친구들은 어딘가에 연락을 하면서 우리보다 뒤쪽에서 밍기적밍기적 걸어오더니, 저 멀리 뛰쳐나간 막둥이를 불러온다.


“야, 꼬맹이, 우린 내일 바다 안 가.”


“와~ 이~ 에? 뭐라고?!”


“얘랑 네 친구들이랑 그 언니들은 가는데, 우린 안 간다고.”


“왜?!!!”


“뭐야, 바다 안 가?! 힝…”


“인정불가!! 우리도 바다 가고 싶다!! 스피릿, 너도 그렇지?”


“으으… 물은 싫은데엡?!”


“뭐라고? 엄청 가고 싶다고? 너무 기대돼서 수영복까지 샀다고? 봐봐! 스피릿도 가고 싶어서 신났잖아!”


“우으으으으븝!!”


“아 씨, 침… 랩터, 네 동생이니까 네가 설명해.”


“라이트닝, 미안하지만 바다는 모레 쯤에나 갈 거야. 히캄에서 할 일이 있거든.”


“우리 휴가 온 거 아니였어?! 왜 하와이까지 와서 일을 하는 거야아… 히잉… 오빠, 오빠가 장관 언니한테 잘 설명해주면 안 돼애…?”


“난 완벽한 을이다…”


“그러지 말고오~~ 장관 언니도 오빠 말은 잘 들어주잖아아~~”


-쾅!


“아야!!”


“그만 해 이 년아. 야, 어서 가. 우린 다른 차 타니까.”


“아으으으… 우이씨…! 언니! 썬더볼트가 나 때렸어…!”


“하아… 다들 미안해… 먼저 가…”


“기억할게 라이트니이이이잇?! M16, 언제 왔어?!”


“미안해, 지휘관. 먼저 탈게.”


“라이트니잉! 꼭 구하러 갈게!”


“죄송해요, 지휘관님. 짐은 다 실어뒀어요.”


느낌을 보아하니 얀순이가 부른 것 같네. 기지에서 일을 한다는 말은 곧 얀순이도 거기로 간다는 소리니까 나름대로 안심이 된다. 


3인방을 빠르게 제압한 언니들의 활약으로 지체되는 일 없이 버스를 타고 호텔로 이동했고, 아이들 저녁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하니 벌써 어두컴컴해졌다.


얀순이가 아이들과 함께 잘 수 있는 거대한 방을 예매해준지라 간만에 아빠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모두 잠에 든 걸 확인하고 베란다에서 바람을 쐬던 중 누군가가 허리를 감싸 안는데, 졸린 몸을 이끌고 온 카리나였다.


“하아아암~ 지휘관니임… 여기서 머해요오…”


“하와이 바람 한 번 쐬는 거지 뭐… 어서 자. 곧 갈게.”


“으음… 시러요… 가치 가아아…”


“내일 열심히 놀려면 푹 쉬어야지.”


“전 지휘관님 곁에만 있어도 활력이 난다구요…”


“하하, 그래? 우리 와이프 고집은 못 꺾겠네. 알겠어. 가서 자자.”


“우음…”


“잘 자. 우리 아가도…”


이렇게 보채는데 일단은 들어가야겠지?


얼마나 피곤했던건지 공주님 안아들기를 시전했는데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잠에 든다.


아직까지 묶여있던 사이드 테일을 풀어서 침대에 눕혀주고, 뱃속의 아이한테도 인사하고 뒤따라 침대에 눕는다.


‘대체 어딜 간거야… 불안하게…’


다만 안심할 명분을 찾았다곤 해도, 여전히 반나절 가까이 행방불명인 얀순이가 걱정되어 그리 잘 자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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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린, 카린, 일어나. 해가 중천이야.”


“으음… 전 안 갈래요오…”


“응? 왜?”


“이따가 알려드릴 거에요… 헤헤헤…”


“또 뭐 준비했어?”


“글쎄요오… 조심히 놀다 오세요…”


“어, 쉬고 있어엇?!”


“히히… 쪽, 저녁 먹고 해변에서 뵈요…”


다음날 아침, 무언가를 꾸미는 듯한 카리나를 두고 방을 나선다.


아이들은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거실을 우당탕탕 돌아다니고 있었다.


“얘들아, 바다로 가자아~”


-우와아아!


그토록 기다렸던 아빠의 출발 선언에 모두가 신이 나 질세라 바다로 뛰어간다.


사전에 말해둔 모임 장소로 가자 다들 목이 빠지게 내가 오길 기다렸나 보다. 하지만, 아무리 물에 들어가고 싶어도 이걸 빼먹을 순 없지.


“이상, 준비운동 끝! 이제 여러분들이 할 건… 바다에서 시원하게 놀며 체력을 소진시키는 일이다. 실시!”


-옛썰!


-가자!


얀순이가 없는 지금 상황에서 총책임자는 곧 내가 되니, 아주 중요한 안전수칙과 일정을 톡톡히 일러둔 후에야 바다를 향해 출동시켰다.


그렇게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아 파라솔 아래에 몸을 뉘여 쉬던 중, 저 멀리서 귀를 간지럽히는 소음이 들려온다.



“하하하하하! 이깟 파도 쯤이야 상대가 안 된다구! 휴! 다음은 누가 탈래?”


-나! 나!


-저요!


저걸 어디서 가져온걸까?


아이들에게 인기만점인 호넷의 제트스키가 다시 바다를 가르며 우렁찬 굉음을 낸다.


안전장치는 최대한 해두긴 했지만 아빠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고역인지라 


“호넷, 애들 태우지 마.”


“엥?? 왜…!”


“위험하잖아.”


“그럼 수심 낮은 곳에서 탈게~”


“어허.”


“그럼 이렇게 하면 되겠네! 얘들아, 아빠가 타지 말라는데 어떻게 생각해?”


-어…


“아빠가 타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으응…”


“들었지? 역… 뭐뭐뭐?!?”


“크으, 역시 우리 공주님들. 얼마나 의젓한거야.”


바로 컷 해준다.


그리고 해변에 왔으면 시원한 음료 한잔 해야겠지?





“짜잔~ 주문하신 블루 하와이와 바라쿠다 나왔습니다~”


“고마워 SOPII. 그래서 너랑 M16은 바다에 못들어가서 어, 뭐라고 해야 되냐… 미니 바? 하고 있는거야?”


“아니? 이건 지휘관을 위한 서프라이즈고, 우린 오전까지만 하고 들어갈거야!”


“SOPII, 안주도 가져갔어야지. 지휘관, 주문했던 모듬과일이다.”


“와… 안 더워?”


“슬슬 짜증이 올라오려고 하긴 해. 이따가 시원하게 적셔야지.”


“아빠~ 무우우울~”


“자, 꼬마 아가씨를 위한 주스.”


“감사합니다아~!”


“오, 센스 뭐야?”


“하하하, 이 정도로 놀라면 되나?”


뒷쪽에서 조그마한 술집을 연 SOPII와 M16의 작품을 음미하자, 이게 곧 신선놀음이다. 시원하면서도 달콤씁쓸한 알코올이 환상의 콜라보를 맞춘다.


다시 바닷가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호넷이 제트스키를 주차하고 자신의 음료를 찾으러 오던 중 어딘가를 보고 깜짝 놀란다.


“언니…?!”


“뭐야, 왜?”


“읏… 지휘관님, 보시면 안 돼요…”


“어, 잠깐만 있어봐. 가릴 것도 없고 큰일이네…”


‘휘’에서 고개가 돌아가기 시작해, ‘님’에서 100° 정도로 완전히 돌려진 시야에 비춰진 것은…




“이래서, 안 된다고 한건데…”


“어잌, 어… 크흠… 미, 미안…”


상당히 곤란한 상태의 요크타운이 M16과 SOPII의 도움을 받아 옷을 정리하고 있던 모습이었다.


“수영복 끈이 갑자기 풀…”


“아냐아냐! 안 말해줘도 돼! 잠시 비켜줄테니까 다 정리되면 전화해…!”


엄청 당황해버린 탓에 몸과 사고가 본능적으로 자리를 피해버렸고, 정신을 차렸을 땐 대충 백여 미터 정도 떨어진 백사장의 암초 앞에 덩그러니 서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 암초 건너편엔 뭐가 있을까? 해변과 상점가도 쭉 이어져 있는 것 같은데 음… 남자가 빨리 죽는데엔 이 호기심도 한 가닥 하니까… 바로 가자!


“읏, 차하! 뭐야, 아무 것도 없네…”


천천히 바위 곳곳을 디뎌가며 오른 그 너머엔 파라솔 하나 안 꽂혀 있는 아주 썰렁한 백사장 뿐이었다. 이러면 재미가 어없?!


“오우씨! 악! 아… 쓰으… 악… 아오 씨이…”


아, 결국 설마가 사람 잡아버리네. 남자들의 사인 1위는 무조건 호기심일 것이다.


잠시 주의를 놓친 대가로 발을 헛디뎌 바위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아까 안전수칙을 그렇게 말해놓곤 그 장본인이 이렇게 됐으니, 참 모양빠진다.





“힛?! 어… 자기…?!”


“뭐, 뭐야…? 네가 왜…”


마침 바위에 밑둥이 가려져 있던 야자수 쪽에서, 지금 상황에 제일 보기 싫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설상가상이 따로 없다.


대체 왜 여깄는지 모를, 범죄자 + 임산부 주제에 천하태평하게 비키니까지 입고 음료를 마시면서 일광욕을 즐기던 뉴저지가 뒤에서 펼쳐진 가관에 깜짝 놀란다.


곧이어 놀란 표정은 패닉에 빠진 표정으로 진화하여 헐레벌떡 나에게 달려든다.


악감정은 여전한 그녀에게 이런 꼴을 보여줬으니 고통보단 짜증이 앞서 나온다.


“괜찮아?! 어쩌다ㄱ”


“아, 씨… 안 꺼져…?”


“아, 아니, 자기…”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꺼지라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가슴을 봐! 가슴!!”


“...아, 염병…”


가로로 주욱 찢어진 래시가드의 틈 사이로 시뻘건 선혈이 흘러나와 상반신을 적신다.


어떻게 자빠졌길래 가슴팍에 이런 상처가 나는건지… 이게 바위에 긁힌건지 검에 베인건지 헷갈린다. 억까를 2연타로 쳐맞는 불운에 한숨만 나온다.


“어떡하지?! 붕대도 없는데…! 으… 미안, 자기… 잠시만 실례할게!”


“뭐야, 뭐해?! 하지마 미친년아!”


“으, 미안해…! 그치만 지혈은 해야되잖아…!!”


우왕좌왕하던 뉴저지가 뭔가를 결심한 듯 내 래시가드를 걸레짝으로 만든다. 아무리 저항을 해봤자 출혈 때문에 힘이 안 들어가 말짱 도루묵이다.


그리고 상처에 0.5L 생수 한통을 다 들이붓고, 래시가드를 두어번 접고 소매를 뒤쪽으로 돌려 팽팽하게 만든 다음 상처에 맞게 위치를 잡아 묶는다. 그에 딸려오는 엄청난 고통이 마침내 짜증을 이겨낸다.


“아악… 큭…”


“미안해, 조금만 참아… 됐어…!”


“하아… 하아… 아오 진짜… 열 뻗치네…”


“자기…?”


“...넌 도대체 왜 여기 있는거야?”


“나도 몰라… 그냥, 그 장관이 오라고 하길래 왔는데… 도착하니까 하는 말이 맘껏 놀라고 하더라구…”


“참, 어이가 없네…”


음, 사라진 얀순이가 무슨 꿍꿍이로 뉴저지를 데려왔는진 아직까지 모르겠지만, 가까이 해서 좋을 건 없으니 거리를 좀 두고 야자수에 몸을 기댄다.


응급처치 과정에서 땀을 워낙 흘린지라 칵테일로 보충한 수분이 순식간에 사라져 갈증을 유발한다.


“으윽…”


“자기, 움직이면 안 돼!”


“닥쳐… 어우 목말라…”


쓰라린 가슴을 불이 나도록 문지르며 타월 옆에 놓인 레모네이드를 주워 와 세번에 걸쳐 나눠 마셨다. 


그러나 최소 반이 바닥으로 흐른 레모네이드가 상처에 닿자 다시 찾아온 고통에 몸이 저절로 쓰러진다.


“아아악…!”


“자기!!”


“되는 거 하나 없네엑… 아오 씨…”


“근처에 의무실 있을거야…! 부축해줄게!”


“내가 미쳤다고으윽, 네 도움 받겠냐…?”


“계속 그렇게 있는 것보단 낫잖아! 나도 스스로가 염치 없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아! 근데, 근데에… 이렇게 해서라도, 자기한테 용서를 구하고 싶단 말이야…”


“...하, 그래, 네 맘대로 해라…”


“...정말…?!”


“뭐해… 부축해준다며…?”


“어, 으응…! 고마워 자기! 어, 여기야 여기!”


자존심을 좀 굽히고 뉴저지의 어깨에 팔을 두른다.


마침 지나가던 레스큐팀 형님누님들께서 우릴 발견하고 바로 달려와 의무실로 데려간 덕에 한두발짝만 걷고 확실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래시가드 풀어줄게. 아파도 참아!”


“으윽… 악…”


“오… 상처가 꽤 심각하네요… 저흰 기껏해야 소독과 붕대 정도만 해드릴 수 있으니, 조금 진정되실 때까지 쉬다가 바로 병원으로 가세요.”


“예예…”


“보호자분, 실례지만 저 좀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내가, 자기의 보호자…?! 응!”


“보호는 개ㅃ…”


“뭐라고요 환자분?”


“...에휴, 아니에요…”


“됐다! 어, 전화 왔어!”


“줘…”


“누구… 어, 요크타운이네…”


요크타운은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수영복 정리를 다 마치고 약속대로 어디론가 사라진 상관을 불렀는데 의무실에서 답신하면, 얼마만에 올까?


“거리도 거린데 금방 오지 않ㅇ”


-지휘관(님)!


-아빠아아…!!


“까아아앗?!?!”


“어…”


“뉴저지…?”


“네가 왜, 여기에…”


이야, 겨우 30초도 안 돼서 도착하네.


아무리 거리가 가깝다곤 하지만, 이건 인간 기준으로 전력질주를 한건데? 역시 전술인형과 칸센은 다르구만. 그리고 그들의 딸들도 마찬가지인 듯 하다.


-아빠아아…


“아이구 우리 공주님들… 재밌게 놀았어?”


“아빠아… 으으…”


“가슴에 피 엄청 나아…”


“별 거 아냐. 괜찮아… 마저 놀아도 돼. 응.”


“싫어! 아빠 다쳤는데 어떻게 우리끼리만 놀아…?”


“왜 다친거야…”


“의사선생님… 아빠 많이 아파요오…?”


“괜찮아… 정말 괜찮으니까…”


아이들은 상반신이 피투성이인 아빠를 보고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다. 얼마나 충격적일까.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아무리 달래주려고 해도, 지혈이 제대로 되지 않은 탓에 적은 양의 혈액이 지속적으로 새어나와 아이들이 더욱 걱정하게 만든다.


그리고 아이들 너머에는…


“뉴저지, 움직이지 마.”


“자,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 응…?”


“팔 뒤로 하고 엎드려! 계속 지시에 불응하면 내 재량으로 사살할 수 있다. 지휘관과 아이들 앞에서 그런 꼴 보여주고 싶어?”


“너야말로 왜 몰아붙이는데?! 우선 내 말을 들어보라니까!!”


“요크타운, 수색해! 호넷 넌 계속 잡고 있어!”


“미안해 뉴저지. 하지만, 이건 지휘관님, 더 나아가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야...”


“수영복만 입었는데 숨길 게 뭐 있다고 그래?! 손대지 마!”


“지휘관, 잠시만 고개 좀 돌려줄래?”


“정말 벗기려고?! 싫어! 꺄아악!!”


요크타운과 호넷에게 팔을 잡히고, M16과 SOPII한테 정수리를 조준당한 채 제압당한 뉴저지가 과거의 동료들에게 결백함을 호소하고 있다.


이러면 얀순이가 뉴저지의 생포를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았다는 소린데, 음… 우선 총책임자로서 상황을 진정시킨다. 이 좁은 의무실에 스무명이 넘게 들어와서 난장판을 피우니까 말이다.


“M16, SOPII, 총 내려. 요크타운, 호넷은… 응, 너희들도 놔주고 옷 좀 다시 입혀줘.”


“...그래.”


“하지만 지휘관, 위험할텐데…”


“걱정마.”


“으흐윽… 자기이… 난, 최선을 다해끅! 자기를 도왔는데에… 흐으으…”


가까스로 제압에서 풀려난 뉴저지는 브래지어의 끈이 완전히 풀린 것도 모자라 팬티도 호넷에 의해 반쯤 내려가 사실상 알몸과 다름없는 꼴이었다. 공과 사는 구별해야 하니 담요를 둘러주자 억울하고 수치스러웠는지 눈물을 터뜨린다.


어째 요즘은 볼때마다 우는 것 같은데, 좀 미안한 마음도 들긴 하네. 악감정은 잠시 치워두고 그녀를 변호해주자.


“우선 이 상처는 내가 헛짓거리 하다가 생긴거야. 뉴저지는… 자기도 어쩌다가 따라 왔는지 모른다고 하지만, 어쨌든 응급처치를 해줬어.”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이미 체포된 상태인데 장관님이 무슨 이유로 계속 놔두시는거야. 그러니 큰 걱정은 하지 마.”


“잠깐만요, 지휘관님, 만약 뉴저지가 통제에서 풀려나면 어떻게 대처하시려고요?”


“...그건, 그 여자가 말하길… 훌쩍, 나한테, 24시간 내내 미사일을… 겨누고 있대애… 그러니 허튼 수작 부리면, 죽으읍?!”


“이게 애들도 있는데 어디서 그런 소리를 하는거야? 당장 니 뱃속에 누가 있는지 생각해봐.”


“우으… 으응…”


정작 나는 뉴저지에게 수없이 비속어를 뱉었던 게 머리에서 스쳐지나가지만, 내로남불 한 번 쯤은 괜찮다고 자기합리화를 해본다.


그렇게 아이들을 마저 달래주면서 어느 정도 휴식이 됐다 싶었을 때 일행의 부축을 받아 병원으로 향했다.


“지휘관, 갈아입을 옷이랑 수건이야.”


“아까 남은 과일도 갖고 왔어! 얼른 먹고 나아야 돼!”


병원에서 진료를 받는 동안 다들 옷을 갈아입고 와서 사후 처리를 도와주었고, 병원에서 완전히 치료를 받고 나오자 연락을 받고 온 카리나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으로 내 품에 안겨들었다.


“지휘관님… 흐윽…”


“왜 그래. 별로 안 다쳤으니까 걱정 마… 우왓?!”


“이게 어떻게 별로에요…?! 붕대가 피칠갑이 되어있는데에…! 제가, 따라나섰어야 됐어요…”


“아니야. 하나도 안 아프고, 이상한 것도 전혀 없으니까…”


“어쩌다가 다치신 거에요오…”


“내 불찰이지 뭐… 바위에 세게 긁혔을 뿐이야.”


“뿐이라뇨…? 하마터면 죽을 수도 있었는데에, 어떻게 뿐이라는 말이 나와요…”


뭔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테니, 그저 꼭 안아주며 그녀를 달랜다.


그리고 카리나도 뒤를 보고 무언가 이상한 걸 눈치챈 것 같다.


“지, 지휘관님…! 뒤에…”


“알아. 쟤가 날 도와줬어.”


“뉴저지가…?”


“며칠 전에 얀순이가 생포해서 데려왔거든. 그런데 마침 내가 떨어진 곳에 있더라고.”


“어떻게 여기 있는 거에요…?”


“자기도 모른대. 뉴저지?”


“어, 으, 으응!”


“...고마워. 도와줘서.”


“에…? 아, 아아아…! 응…! 천만에! 난, 언제나 자기를 지킬 거니까…!”


“따라와.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사줄게.”


“아, 아니야! 괜찮아… 내가 무슨 염치로 자기한테 아이스크림을…”


“뭐, 안 먹을거면 말고.”


이 사소한 감사에 큰 감동을 받은 것 같은 그녀에게 옅은 미소로 화답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두세걸음 정도 멀어지자, 뒤에서 희미하게 무슨 소리가 들린다.


“그러고보니… 자기는 저 여자와 있는게, 나와 있을 때보다 훨씬 행복한 것 같네…”


“뭐라고?”


“에?! 어, 아무것도, 아냐…”


“얼른 들어가. 괜히 나돌아다니다가 잡혀가지 말고.”


“응…”


“어서 가요, 지휘관님. 이제 곧 점심이니까 밥 먹고 푹 쉬자고요!”


“잘, 가…”


꽤 시무룩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카리나의 재촉에 다시 고개를 돌린다.


뭔가 찜찜한 심정으로 정오가 되어 더욱 쨍쨍해진 하와이의 햇빛에 나른해지는 몸을 이끌고 아이들에게 돌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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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