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 미샤엘(Michaël),

아름다웠던 시절 '벨 에포크'의 종식을 알리며 시작된 전쟁은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고, 그 참혹함만큼 전상자도

많았던 지라, 프랑스만 하더라도 사망자만 135만명에 달하는

피해를 입어, 프랑스 전역에서 건장한 청년 남성을 찾기가 힘들었었다.

그런 때에 기적처럼 살아남은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과 재회하여 대학 공부를 마치고, 파리 외곽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 

꼴레쥬(collège: 중학교)의 교사로 부임받았다.


학생들의 모습은 전쟁이 있기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학생들간에 풍기는 묘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고

그 긴장감엔 증오가 서려 있으며, 그것이 어디로 향하는지 

오래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바로 독일과 접경 지역인

알자스에서 전학온 여학생 마리엔느(Mariénne)를 향한 것이었다.

동료 교사들에게 듣자 하니, 전쟁이 있기 전까지 그녀는 매우 쾌활하고 

적극적인 학생이었다고 했다. 예의 바르고, 학업 성취도도 훌륭하여

예쁨을 많이 받던 학생이었는데, 전쟁이 발발하고서 그녀의

태생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녀는 이민 2세였고, 부모는 독일계였다.

어른들의 증오가 아이들에게 흘러 들어오고, 가장 순수하기 때문에

또, 가장 악할 수 있는 존재였던 그들이었기 때문에 반 친구들이

마리엔느에게 뿜어내는 적개심은 순도가 아주 높았다.


"너 때문에 우리 형이 죽었어, 독일인들은 저주 받아서 다 죽어야해!

니 엄마, 아빠도 독일 것들이라지? 너희 더러운 족속들은 우리 땅에서

다 꺼져버려. 아니면 내가 찾아가서 너희들 모두 목 매달아 버릴 거니까"


이 정도의 표현을 매일같이 들어야 하고, 학급의 모든 이들이

그녀를 투명 인간 취급했고, 그들을 말려야 할 이전 담임들도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 결과로 그녀의 모습은 180도 달라졌다.

우울하고, 소극적이고, 단 한 마디 조차 할 수 없는 벙어리 신세가 되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본 동료 교사들은 새로 부임한 미샤엘에게 이런 사실을 말해주며

그녀를 잘 보살펴 주기를 부탁하는 일 밖엔 할 수 없었다. 

자초지종을 설명들은 미샤엘이 어두운 얼굴로 책을 끌어 안고

복도를 지나는 마리엔느를 보고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마리엔느, 안녕? 내가 네 새 선생님이야."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멈칫하며 서있더니, 대꾸도 없이 그대로

빠른 종종걸음으로 도망치듯 달아났다. 미샤엘은 생각했다.


"시간이 좀 걸리겠네."


......,


반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자기 소개를 하게 된 미샤엘

그는 칠판에 자기 이름을 크게 적어 놓고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선생님 이름은 미샤엘이고, 여러분과 함께 수업할 수 있게 돼서

너무 기뻐요. 제가 이 반에 선생님이 되었으니까, 여기있는 모두와

즐겁고 행복하게 학교 생활을 하며, 여러분이 무사히 졸업할 때까지

잘 지냈으면 해요."


그러자 누런 더벅머리를 한 소년이 물었다.


"선생님, 전쟁터 갔다 오셨죠? 독일놈 몇명 죽였어요?"


훅 들어오는 그 순수한 악의에 찬 물음.

반에 마리엔느가 있는 것을 알기에 던진 그 물음에,

억지로라도 잊고 살고 싶었던 그 기억이 그 짧은 문장 하나에

맹렬하게 되살아났다.

처절한 절규, 온몸을 적신 핏물, 상황을 더 최악으로 만든 참호 내 돌림병, 

서로를 죽이려 달려드는 아군, 적군 가릴 것 없는

그 광기어린 얼굴이, 묻어두었던 기억 저편에서 

무너진 둑에서 물이 새어나오듯 흘러 넘쳤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고,

저릿저릿함이 오른쪽 어깨를 타고 오른 팔 전체를 휘감았다.

그가 총검으로 사람의 숨통을 끊을 때 힘을 줬던 팔이어서 그럴까? 


"니꼴라, 여기는 학교에요. 그런 질문은 매우 실례되는 질문이고,

우리 학급 안에서 살인, 전쟁 같이 폭력적인 주제를 장난처럼 말하는 건

금지하겠어요. 필요하다면 토론 시간을 줄테지만,"


미샤엘이 다음 말에 힘을 실었다.


"전쟁은 장난처럼 떠들 수 있는 게 아니야, 알겠니?"


......,


아무래도 그 니꼴라라는 녀석이 반의 우두머리쯤 됐었나 보다.

그가 미샤엘의 포스에 깨갱하자, 다른 아이들도 감히 그의 앞에서는

노골적으로 마리엔느에 대한 적개심을 보일 수 없었다.

일단 학급내 분위기가 그렇게 정리가 되었으니, 미샤엘은

다시 마리엔느와 대화하기 위해 그녀를 불렀다.

아직 여리고, 작기만 한 소녀가 미샤엘 앞에 섰다.

그녀를 보니 우울감에 빛을 잃었을 지언정

갈색이 섞인 검은 단발에, 오밀조밀한 그 이목구비가

단연 돋보이는 소녀였다. 이런 예쁜 아이가 어른들의

일에 휘말려 삶의 빛을 잃은 것이 더욱이나 안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몸 곳곳에 살며시 보이는 붉은 멍자국, 또 입술에 피가 마른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크게 묻지 않아도 어떤 고통을 그녀가

겪고 있을지 대강 눈에 잡혔다. 구태여 "뭔 일 있니?"하고 물어보는게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로. 미샤엘은 그녀를 앉히며 물었다.


"...선생님도, 주변 선생님들로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길 들었어.

마리엔느, 많이 힘들었을텐데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씩씩하게 매일

학교에 나와줘서 고마워."


미샤엘의 말에 마리엔느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차피, 동네 어딜 가든 똑같아요... 여기라고 다를 것 없는 걸요, 뭐.

그러니, 애써 저한테 잘해주려 안 하셔도 돼요. 어차피 선생님은..."


"선생님은?"


미샤엘이 되묻자, 마리엔느가 어렵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선생님은... 전쟁에 나가서 독일 사람들이랑 싸웠잖아요...

선생님도 독일 사람이 미울 것 아녜요?"


그녀의 말에 미샤엘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마리엔느."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그녀의 우울 가득한 그 눈동자를 마주치지 않으려

이리저리 피하려 했다. 그러나 미샤엘이 고집스레 그녀를 불렀다.


"마리엔느. 선생님 좀 봐줄래?"


몇 번 시선을 피하려다, 이내 어쩔 수 없겠는지 고개를 들어

미샤엘을 바라다 보았다. 그녀와 드디어 시선을 마주치자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 난 프랑스 군인이니까 전쟁에 나가서 독일 사람들과 싸웠어.

근데, 그거 아니? 난 프랑스 군인이니까 전쟁에 나갔다는 것을?

적이 독일 사람이라 전쟁터에 간 게 아니라, 미국, 영국, 스페인

어느 나라가 프랑스를 쳐들어 오더라도 선생님은 전쟁터에 나갔을 거야.

그 사람들이 증오스러워서? 아니. 적들이 쳐들어와 내가 아끼는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려고. 그게... 이번엔 안타깝게 독일 사람들이었을

뿐이지, 난 절대로 그들을 미워하지 않아. 너는 내 학생이니까

더더욱 미워할 이유가 없고. 만약 너희들을 지키기 위해 그 끔찍한 전쟁을

다시 겪어야 한대도, 선생님은 주저하지 않을 거야.

선생님이 너를 도와줄테니, 마리엔느. 너도 포기하지 말아줄래?"


미샤엘의 진심어린 말을 듣자 마리엔느의 그 공허한 눈에

희미한 빛이 희미하게 다시 살아나려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