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12월쯤 종강 타이밍에 적으려고 했는데 그 때 못써서

근데 수강신청 망해서 적습니다.

작중에 등장하는 이름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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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점퍼를 입었다. 살짝 따끔, 하고 정전기가 느껴졌다. 불쾌했지만 참았다. 추운 것보단 나았으니까.


12월 말. 다음 달, 아니 2주 뒤면 연도가 바뀐다. 겨울이 되었다. 이미 겨울이 된 지 한참 되었지만.


나는 신발을 신었다. 두꺼운 이 신발은 눈밭을 걸어도 눈 녹은 물이 들어오지 않는다.


일어선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기숙사에 남은 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종강 후 휴학. 휴학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학과에 적응하지 못했다. 이 길로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거운 전공서적들, 이제는 아마도 필요 없을 종이더미들이 든 가방들을 옮기고, 고향 시골 마을로 내려가는 기차를 탔다.


종이더미들이 한층 더 무거워진 느낌이 들었다. 어깨가 가볍지 않다. 기차 좌석에 푸욱 몸을 파묻고,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들었다.


격렬한 리듬의 노래, 고민을 잊기 위한 노래. 몸의 노곤함 덕분에, 잠에 푹 빠질 수 있었다.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반복재생으로 선정된 노래의 리듬 사이로 익숙한 기차역의 이름이 같이 들려왔다.


잠에서 깼다. 꿈에서 깨어나 창문을 보았다.


하얀 설원이, 밭과 논과 집지붕과 길에 소복하게 쌓인 눈이 창문으로 보였다.


...아까까지 꾸고 있던, 어린 시절의 꿈이, 그 아이가 떠올랐고.


...머리를 흔들어, 떠오른 기억을 머릿속에서 흩어내며, 가방을 메고 내릴 준비를 했다.



  *  *  *  *  *  *  *



시골 마을의 풍경은 하얬다. 눈이 하얬다. 그 외에는 달라지지 않았다. 느릿하지만 한 발씩 나아가고 있는 마을.


집으로 들어갔다. 부모님이 잘 맞아주셨다. 아직은 괜찮다며 이야기하는 부모님의 말씀을 들었다.


기뻤다. 한편으로, 스스로가 부담스러웠다.


역시 뭐라도 했어야하지 않았을까.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몸 좀 움직이고 다니면 마음도 풀리고 그럴거야."


"맞아맞아. 아, 뒷산에 가끔 올라가고 그래보지?"


...뒷산, 은.


"...그래도 눈 때문에 좀 미끄러울테니까..."


"그정도 산 가지고 뭘 그래?"


가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그래도...


아냐,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  *  *  *  *  *  *



눈이 녹고, 얼고, 다시 쌓이고.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빙판이 되어간다.


관리가 거의 되지 않은 뒷산은 상당히 미끄러웠다. 계단이라도 있으면 좋았겠지만.


한 발 내딛기 위해 나무를 붙잡고, 바위를 붙잡으면서 나아가던 중, 저 멀리 돌계단이 있었다.


"저, 쪽...?!"


아. 너무 성급했던 모양이다.


발이 허공을 딛는다. 중력이 끌어당기는 느낌, 지면에 쓸려나가는 옷과 손, 나뭇잎.


그렇게 저 아래 쪽으로 밀려 내려간다. 팔로 머리를 감쌌다. 다치지 않기를 신에게 빌었다.


......턱, 하고 멈췄다. 자연스레 멈춘 것은 아니다.


그럼...


"어...?"


눈 앞에. 어떤 소녀가.


"여기는, 무슨 일로."


여린 팔로, 미끄러지려고 하는 내 몸을 붙잡아 받쳐주고 있었다.


"아니, 그..."


살짝 짧은 은색 머리카락이, 개성적인 눈과 얼굴이, 입은 하얀 옷이, 너무나도 닮아있어서,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  *  *  *  *  *  *



"자기소개부터 하는게 좋을까. 내 이름은 ■■■."


응?


"저기, 미안한데..."


"어?"


"안 들렸어."


"목소리가, 작았나?"


"아니, 그 뭐랄까... 듣긴 했는데, 그대로 부를 수는 없을 거 같은데."


"아."


살짝 당황한 건가.


"...그럼, 이름을 지어줘."


"...네?"


"어차피 부를 사람은 너밖에 없어. 지어줘."


"........."


참 유감스럽게도, 떠오르는 이름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지혜."


"'이지혜'? 이지혜, 이지혜... 고마워."


그 아이의 이름. 여러번 되뇌이는 그 이름. 얼굴과 외모와 체형만 같지만, 전혀 다르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서.


"그래서, 너는 누구야?"


"맞다, 그거 말하다 말았었지."


소녀는 두 손을 모으고 나를 보았고.


"이 뒷산의 사당에 모셔진, 자그마한 신. 수호신이라고 보면 돼."


"수호신...?"


"신...이라고 해도, 힘이 많지가 않아서 능동적으로 뭔가 해본적은 지금이 처음이지만."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며칠 전의 나라면, 내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도망쳤을 것이다.


"......"


하지만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작은 체구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든든하게 자신을 구해준 소녀의 묘하게 커보이는 새까만 눈동자로 올려다보니.


"...그래, 고마워. 덕분에 살았네."


그 말을 의심할 도리가 없었다. 감사는 표해야 했다.


소녀는 싱긋 웃었다. 감사는 됐다는 듯이.


"그럼 돌아가야?!"


팔로 지면을 짚고 일어서려고 했을 때, 심한 통증을 느꼈다. 팔에선가, 다리에선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괜찮아?"


"...으...아...!"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힘을 줘도 원하는대로 몸을 지탱하기보다는 통증만 강해질 뿐이었다.


"안 되겠다. 잠시만..."


소녀가 다가왔다. 내 몸을 가볍게 들었다. 이 몸 상태로는 저항할 수 없었다. 그대로 가볍게 어딘가로 향하는 이 상황이 얼떨떨했고, 조금 불안했다.



  *  *  *  *  *  *  *



소녀는 노란색과 갈색의 무늬가 인상깊은 나무문을 몸으로 밀어 열었다.


욱신욱신거리는 팔과 다리를 늘어뜨리고, 새파란 하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도착했어."


"...여긴, 어디?"


"집."


"...여기가?"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 발이 빠지고, 나무는 낡아서 등을 기대면 바스스하고 부서져 쓰러질 거 같은 집.


여기가, 소녀가 말한 사당이었을까.


"응. 여기가 집."


"집? 여기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시골 마을의 낡은 집...보다 더했다. 최소한 그런 집은 관리라도 받지 않는가.


하지만 무성한 잡초와 까맣게 얼룩진 벽들은, 관리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쉬다 가. 어차피 그 상태로는 다시 내려가지도 못해."


"어, 어."


마루에 내려진 나는, 블안함을 품고도 소녀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  *  *  *  *  *  *



같이 가져온 짐가방은 내 옆에 놓였다.


소녀는 뭔가 먹을 걸 가져온다면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픈 팔을 천천히 움직이면서, 짐가방을 열었다.


휴대폰은...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 초코바나 보온병은 그대로 들어있지만, 지금은 꺼내지 않는 게 좋겠지.


소녀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락모락 김이 나는 무언가를 들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허여멀건한 죽과 쇠숟가락이었다. 이런 집에서도 숟가락은 녹이 슬지 않았구나.


소녀가 그릇을 가져와 옆에 앉았다. 마치 그릇을 만지면 데여버릴 것처럼 열기가 느껴졌다.


"고마워."


"지금은 뜨거울 테니까 식은 다음에 먹어."


"...응."


모락모락 나는 김을 보며, 초코바가 있다고 미리 말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뜨거운 건 잘 못먹기 때문에, 아마 한동안 내버려둘 테니까. 


"그래서, 여기는 어떤 일로 왔다고 했더라?"


나를 돌아보며, 소녀는 만났을 때의 질문을 했다. 나는 아직 대답하지 않았다.


"...뭐, 특별한 일이 있는 건 아니고, 고민이 있다 보니까."


"......흐응, 그래?"


소녀는 살짝 입꼬리만을 올려 웃었다.


소녀를 처음 만났을 때 느낀, 묘한 꺼림칙함이 스멀스멀 그 표정에서부터 다시 일어났다.


"여기서 조금 더 쉬고 가지 그래? 어차피 억지로 내려갈 수도 없잖아."


"......"


"뭔가, 불안해?"


"...어? 아, 아니."


모르는 곳에 발을 들이는 것이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지금 몸 상태로는 고민해봤자 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없다. 


"그럼, 저기 안쪽 방을 써. 바깥 쪽은 추우니까."


소녀는 내가 지낼 방을 가르쳐주었다. 어차피 복잡한 구조도 아닌 것 같으니, 돌아다닐 수 있다면 문제 없으리라.



  *  *  *  *  *  *  *



누워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길었다.


나무 뼈대 사이사이로 보이는 나무 무늬를 질릴 정도로 눈에 담는 것도 슬슬 지겨웠다.


하루 세 번, 소녀가 죽그릇을 가져올 때가 그런 지루함을 잊을 수 있게 해주었다.


"들어갈게."


"어, 어."


들어온 소녀는 죽 그릇을 이부자리 옆에 두었다. 푹신한 이불이 간직한 온기가 열기로 덮어 씌워지고 있었다.


"...오늘은 네 어린 시절에 대해 듣고 싶어."


"..."


산 아래의 바깥 세상에 대해서, 아무래도 소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했다.


소녀는 알고 싶었고,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는 시간이 너무나도 많았다. 


나는 소녀에게 이야기를 해줬다. 모습도, 그리고 지어준 이름도 어렸을 때의 기억을 연상하게 했다.


그러다보니 거짓말을 섞어 과장할 셈이었는데, 말하면서 어느새 사실을 줄줄 읊고 있었다. 처음부터 말하지 않는 게 더 나았을까.


"...아, 말하기 힘들어?"


"아, 아냐. 괜찮아."


...나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에 이야기했었지? 이 지역이 내 고향마을이라고."


"응, 외동이라고 들었어."


"그 어렸을 적에 소꿉친구였던 이웃 집의 여자 아이가 있었어."


"...소꿉친구?"


소녀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소녀와 만날 때마다, 소녀의 표정은 조금씩 더 풀어지고, 다양해졌던게 느껴졌지만, 지금 같은 표정은 처음 보았다.


"아, 소꿉친구라는 건 어렸을 때 같이 놀면서 지내는 친구라는 의미."


"...아하."


소녀는 다시 미소짓고는 내 말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어느 겨울날에, 그 여자 아이랑 몇몇이랑 뒷산에서 놀고 있었어."


"...그 산이 여기?"


나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날이 어두워졌고, 내가 술래였던 때였어. 길 구석으로 뛰어가던 걔를 잡으려고 하다가."


"잡으려고 하다가?"


"그 날이 겨울이어서, 미끄러지면서 길 아래쪽으로 떨어졌어."


"......!"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고 해봤지만, 잘 됐을지는 모르겠다.


소녀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놀란 것을 최대한 참아보려는 것일까.


"그, 그래서?"


"어떻게든 달려가서, 팔을 잡고 끌어당겼지. 지금 그 아이는... 모르겠네."


......그렇게 말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 눈 앞의 소녀의 모습과 함께, 떨어져버린 아이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새빨간 피가 지면에 튀었던 그 모습은, 기억에서 흐릿해질지언정 사라지지는 않았다.



  *  *  *  *  *  *  *



그리고 며칠, 아니 몇 주 후일까. 천천히 팔과 다리를 움직여도 아프지 않은 날이 되었다. 드디어 몸이 멀쩡해졌다.


개운한 아침이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이렇게 상쾌할 수가 있을까.


마루에서 작은 발소리가 울렸다. 꼬박꼬박이구나, 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챙긴 짐을 풀은 적이 별로 없으니 챙기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때, 등 뒤에서 끼익, 하고 문이 열렸다.


"...어?"


"아, 안녕."


"다 나았어?"


"...응, 덕분이야. 고마워."


소녀는 그릇을 방 한쪽 구석에 내려놓았다.


"...같이, 내려갈래?"


"...괜찮겠어?"


"같이 내려가면 괜찮아."


"...? 괜찮지?"


소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고, 나는 그런 모습이 전혀 괜찮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다시 들고, 허리에 맸다. 방을 나와 신발을 신었다.


소녀의 낡은 신발과 자신의 낡은 등산화가 눈에 들어왔다.


소녀가 앞으로 나서며, 대문을 밀어 열었다. ...묘하게, 끼이익 하는 소리가 불쾌했다.



  *  *  *  *  *  *  *



"그러고보니, 내려오면 뭐할거야?"


아, 소녀에게는 이 마을 너머의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었지.


"음... 1년 정도 쉬고, 다시 대학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대학?"


"엄청 큰 학교 같은 느낌."


"...도시로 가는 거야?"


"......어... 그렇지? 내가 다니는 대학은 여기에 없으니까. 아직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소녀는 나에게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숙였다.


대학으로 돌아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멈춰 있을 수만은 없을 테니까.


"......아."


소녀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말을 멈추고, 곰곰히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눈 앞에 내가 미끄러졌었던 돌계단이 있었다. 이 계단을 지나면 얼마 안 있어 마을에 다다른다.


"그럼, 고마웠어."


소녀에게 다시 한번 감사인사를 했다.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등을 돌렸고, 등이 밀리는 감각을 느꼈다.


공중에 붕 뜨는 느낌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고, 이번에는 나무에 다리가 부딪쳐, 익숙한 쓰라림이 느껴졌다.


나는, 떨리는 눈꺼풀로 돌계단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어째선지, 소녀는 내가 살아있는 것을 바라보며, 웃었다.



  *  *  *  *  *  *  *



올해도 첫눈이 내린다.


눈은 평등하게 지상의 모든 것을 덮어 새햐얗게 감춘다.


작년 언젠가, 새하얀 산에서 어느 대학생이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의 부모님은 경찰에 신고, 주민과 경찰들이 수색을 실시했지만 허탕이었다.


새하얀 산에는 몇십개의 발자국이 찍혔지만, 성과는 없었다.


그 겨울산은 조용해질 날이 없었다. 봄이 될 때쯤, 더이상의 수색은 의미가 없다고 결론 짓고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다시 첫눈이 내리는 어딘가에서.


"일어났어?"


"......"


"응, 일어났구나. 아침 먹어야지. 아, 아직은 힘드려나..."


무거운 솜이불을 덮은 채, 뜨거운 방에 누운 남자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옆에 가만히 앉아있는 소녀만이, 싱긋 미소짓고 있었다.


겨울산은, 다른 누구도 다가가지 못할 아름다움을 품고, 새하얗게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