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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프리?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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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보셨을까요? 키는 이 정도에 금발인 남자인데..."

 그년이었다. 인파로 북적이는 광장에서도 그 목소리만은 뚜렷하게 귀에 박혔다. 사람들 사이에서 누구 하나를 찾기가 쉽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여름 뙤약볕이 내리는 곳은 마음 한켠에 불안을 불러왔다. 되도록 가려진, 어두운 곳이 필요했다. 음습한 건물 뒤, 천막 밑 그림자, 설령 작은 상자의 뒤라면 그것도 좋았다. 몸이 끼지도 못할 벽 틈이라도 마다할 수 없었다. 그러던 도중, 건물의 사이사이에 난 골목을 발견한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저쪽이요?"

 검은 천이 한 걸음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골목에 다가가면서도 보이지 않도록 몸을 숙여야 했다. 별난 것을 보는 듯한 시선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년의 걸음은 나보다 훨씬 빨랐다

"어이! 조심 좀 하쇼!"

 수레를 뒤엎을 뻔했지만, 돌아볼 시간도 없었다. 순진하게 뛰어다니는 아이 무리도, 몇 차례 담소를 나누는 이웃 사이 늙은이들도 기다릴 수 없었다. 조잡한 몸은 짧은 거리조차도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뭐 하는 거야?"

 낮은 곳에서 들려온 불청객의 질문은 거칠게 부서진 소리가 아니었다. 아직은 매끄러운, 아무것도 모를 듯한 남자아이의 것이었다. 그 아이 딴에는 이 수상한 거동이 신기한 놀이쯤으로 보였을지도 몰랐다.

"..."

 침묵으로 일관된 답에 질문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아이는 흥미를 잃었는지 말을 걸지 않았다. 귀찮게 걸리적거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순간, 발은 그늘을 밟았다. 골목길에 들어섰다. 길이라기엔 너무나 짧고 막다른 것이었지만, 아무렴 좋았다. 입구에 높게 쌓인 바구니는 이 뒤에 숨으라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저기 말이니?"

"네, 맞아요"

 젠장. 또 그 아이였다. 이젠 순진한 것인지, 아니면 악의에 찬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과 악을 가릴 상황은 아니었다. 얼마 안 가 들켜버릴 운명이었다. 빠져나가기엔 너무 늦었다. 그저 벽에 붙어 눈을 감고, 벌벌 떨며 보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어쩌면 이미 숨결조차 닿을 거리에서 욕망이 그득한 붉은 눈으로 날 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미 그 창백하고 기다란 손을 내밀었을 수도 있었다. 팔랑이는 소매의 끝자락으로 드리우는 빛 한 가닥마저도 가려버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환한 광장부터 검은 벽까지 살펴보았지만, 어디에도 수녀는 없었다. 어째선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해방감에 터질 듯이 벅차오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에올론 평원의 산들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끼고 싶었다. 오늘날 찬란함을 밝게 뽐내는 태양 빛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부서진 가슴이 한 발짝 옮기기도 버겁게 했지만, 곧 이룰 바람이었다. 오늘이 아니어도 내일이, 그것도 아니라면 그다음 날이 남아있었다

"흐으으..."

 너무 벅차오른 것일까, 누군가 세게 조르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어쩌면 그것은 저 멀리 하얀빛의 성벽 때문일 수도 있었다. 성벽은 먼 옛날, 아직 군주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에 지어져 천 번이 넘는 봄을 겪었지만, 형태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보다 더 당당히 제 자리에 서있었다

"넌 무너지지 않았구나..."

 조금의 탄식이 새어 나왔고, 마음은 편해졌다. 거슬리는 것이 없었다.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었다. 성큼거린다는 말에 어울리는 걸음은 어둠에서 벗어나기 한 발짝 직전까지 이끌었다. 빛과 어둠의 경계를 넘기에는 너무 두려웠다. 이것을 넘으면 어떤 미래가 기다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왜일까, 무모한 용기가 솟았다. 올려다본 저 태양처럼 찬란한 옛날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감히 빛을 밟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할 수 있었다. 그럴 것만 같았다. 그럴 줄 알았다

"쉬이잇... 조용히... 아시죠..?"


 뾰족하고 서늘한 것이 볼을 찔러왔다. 하나가 아니었다. 셋, 세 개의 무언가가 닿은 순간, 싸늘함이 목을 타고 가슴에서 몸의 끝마디까지 퍼져나갔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네요"


 볼에 닿은 것은 시릴 정도로 싸늘한 쇠였다. 쇠로 만든 손톱이 손가락 하나하나에 끼여 볼을 찌르고 있었다. 볼만이 아니었다. 하나는 턱밑을, 하나는 눈 밑에 박힌 것만 같았다. 입이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딜 그렇게 가시려고 했나요? 이 성안은 아니겠죠? 그런 차림으로 떠돌다간 잡히는 건 시간 문제니까요"

 다른 팔이 가슴을 금방이라도 부숴버릴 듯이 끌어안았다. 밀어내보려 했지만, 너무 억셌다. 숨이 막혔다

"아니면 성을 나가서 발 닿는 곳으로 가려고요? 좋은 생각이네요 - 한밤중 습격을 받아서 하날 리에 노예로 팔려 가지 않는다면요"

 눈앞이 흐릿해졌다

"설마 사람들 앞에서 "내가 빛의 신이다"라고 말하려 했나요? 사람들은 당신이 한 일을 전부 알아요. 이젠 더 이상 빛의 신, 카노푸스를 믿지 않아요"

 팔에 힘을 줄 수 없다

"하지만 전, 당신의 유일한 신도랍니다. 몰락한 신을 믿는 유일한 사람 말이에요. 당신이 그때 했던 말처럼, 하지만 그 반대로, 당신은 제 것이고, 전 당신을 가지는 거예요. 당신은 제게 속해요.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세상이 어둠에 뒤덮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