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안은 상상 이상으로 넓었고, 이런 넓은 배에서 사람이 없는 곳이라고는 자신의 개인 방을 제외하고는 아마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모든 학년이 배 안에서 있기 때문이었다.

그중 15명이 퇴학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뭐… 한 반에 약 40명의 인원이 있다고 가정하면

배의 승무원까지 포함하면 약 500명 이상의 사람이 하나의 배 안에 있다.

지금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원하지 않는 만남이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어, 아야노코지 선배"


내 눈앞에서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은 1학년 D반의 리더격 존재인 '호센 카즈오미'였다.

무인도 시험에서는 류엔과 한바탕 싸움을 벌였고, 싸움의 승패는 모르지만 결과는 두 사람 모두 리타이어를 당했다.

류엔과 마찬가지로 얼굴에 거즈를 붙이고 있었고, 무인도 시험이 시작되었을 때와는 다른 얼굴이 되어 있었다.

무시하고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이 상황에서 그것은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다.

나는 멈춰서서 호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꽤 호되게 당한 모양이군"


"핫, 지금 나에게 시비거는건가?"


단지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말했을 뿐인데도, 호센은 아직 무인도 시험에서 일어났던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류엔이 호센과 1:1로 싸웠는지 다수의 힘을 빌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호센의 상처를 보면 꽤 치열했을거라 생각한다.

호센은 지금이라도 덤빌 것 같은 자세를 취했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현재의 배에서 사람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은 찾기가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폭력행위가 일어난다면, 모두의 시선이 몰릴게 뻔하고, 호센은 2000만 프라이빗 포인트는 받지도 못한채 퇴학당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을 호센도 알고 있기 때문인지 위압감이 담긴 시선만 보낼 뿐, 자세를 잡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이번 작전, 너, 어디까지 꿰고있었던거야"


사카야나기에게 들은 정보로는 1학년을 통솔하고 있던 학생의 이름은 츠바키 사쿠라코였다고 한다.

1학년을 연합해 나를 둘러싸고, 퇴학으로 몰아넣을 계획을 세웠고, 그 과정에서 폭력행위도 마다하지 않는 결단력을 내렸다.

그것은 어느정도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사카야나기에게 도움을 청했고,

사카야나기는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뭐, 그 과정에서 '빚'이 하나 생겨버렸지만.

호센도 그 작전에 참가하고…있었다고는 생각하지만, 작전에 따랐다기 보다는 오로지 나 하나만 보고 달려들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와 접촉하고 싸움이 시작되려는 찰나에 류엔이 그것을 가로막았다.

어찌보면 호센의 움직임을 전부 꿰고있다는 것처럼도 보이겠지. 하지만 그것은 내가 생각한 것이 아니라 전부 사카야나기가 생각한 것이다.


"글쎄"


그래서 나는 일부러 그렇게 대답했다.

여기서 1학년에게 정보를 줄 필요도 없었고, 2학년의 사령탑이 누구인지 알려줄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호센도 그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지 혀를 차면서 내 옆을 지나갔다.

1학년들도 시험이 아닌 곳에서 나를 퇴학시키려고 움직이지는 않겠지.

호센의 덩치는 큰 위압감이 되었는지, 지나가는 학생들 모두 호센을 바라보고 알아서 길을 비켜주었다.

나는 그런 호센의 등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 다시 배 안을 걷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잡담소리로 소란스러워진 배 안에서 나는 최대한 조용한 곳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배 안의 구조를 파악할 겸, 조용한 곳을 찾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한 학생을 만났다.


"아야노코지 군"


인기척이 그다지 없는 곳에서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시이나 히요리였다.

무인도 시험동안에는 책을 읽을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무인도 시험이 끝나자마자 미리 챙겨왔던 책을 펼치고 있었다.

책을 읽는 히요리를 방해하는 것도 미안하기 때문에 나는 간단하게 인사만 하고 지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히요리는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시험, 결국은 혼자서 끝까지 보낸 모양이네요. 대단해요"


"그러는 히요리도 무사히 시험 통과한 모양이네"


"이시자키 씨들이 힘내줘서 겨우 통과할 수 있었어요"


히요리의 그 말에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멈춰서서 히요리의 옆에 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시선은 히요리가 읽고 있던 소설쪽으로 향했다.

요즘 바깥에서 유행하고 있는 유명한 작가가 쓴 연애소설이었다.

소설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많이 읽었지만 연애소설은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연애 소설을 읽을 때, 주인공이나 히로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투영해서 몰입감을 높인다고 한다.

그래서 그 작품을 한층 더 깊이 즐길 수 있고, 작품에 얼마나 독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느냐가 연애소설작가로서의 기량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내가 책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자 히요리도 내 시선에 눈치챘는지 책을 보여주면서 약간 쑥스럽다는듯이 웃었다.


"이상한가요? 제가 이런 책을 읽는다는게?"


"아니? 전혀 이상할 것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 나이대의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을 읽지 않을까"


"아야노코지 군도 읽어보셨나요?"


"일단은 읽어봤지만 나는 연애소설에 잘 몰입하지 못하는 타입인 것 같아"


"그건 아야노코지 군이 연애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런 것 아닐까요?"


확실히 지금 케이와 사귀는 것도 '연애'라는 것을 공부하기위한 면이 있다.

케이와 사귀고 있는 것을 히요리에게 말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의문…


"그렇지. 지금까지 누군가와 사귀어봤던 적이 없으니까, 그러는 히요리는 누군가와 사귀어봤어?"


그 말에 히요리는 나를 바라보더니,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아뇨, 애석하게도 저도 아직 누군가와 사귀어본 적은 없어요"


"그런데 연애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책에 몰입할 수 있다는거야? 모순되지않나?"


연애를 해본 적이 없으면서 내가 연애소설에 몰입하지 못하는 이유를 연애를 몰라서라고 단정짓는 히요리.

하지만 그러는 그녀도 지금까지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한다.

물론, 그것이 거짓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지금 여기서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

히요리는 내 말에 입술을 뾰루퉁하게 내밀며 반박했다.


"여자아이는 기본적으로 연애에 대해서는 몰입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구요"


……그런가?

그 점에 관해서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굳이 딴지를 걸지 않기로 했다.

히요리는 표정을 풀며 상냥하게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아야노코지 군은 연애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해보셨나요?"


히요리의 그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지금 케이와 연애중이다. 내가 먼저 케이에게 고백했고, 케이도 애초에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승산이 없는 고백은 아니었다. 나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연애하는 것은 꺼려했더라면, 케이와 지금 이런 사이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니, 호기심으로 해보고 싶긴 했어"


그리고 현재진행형으로 연애중이기도 하고, 라는 말은 삼킨다.


"그렇군요. 아야노코지 군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주변에서 가만히 놔두질 않을 것 같은데요"


……히요리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수학시험에서 만점을 받기 전의 나는, 그야말로 공기와 같은 존재였다.

특정 인원을 제외하고는 나를 전혀 신경쓰지 않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히요리는 어째서 나를 이렇게 과대평가하는 것일까.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여기서 계속 이 화제를 이어간다면 케이와의 관계를 의심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화제를 돌리기로 한다.


"그럼, 연애에 능통한 히요리에게 한 가지 상담할게 있어"


"네,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요"


"실은 나도 누군가에게 상담받은 이야기인데……"


나는 이치노세와 있었던 일을 어느정도 각색하고 히요리에게 말해주었다.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았고, 그 사람은 사실 비밀연애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백을 받아줄 수는 없었고,

가장 상처받지 않는 거절 방법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그런건 없다고 생각해요"


히요리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거절한다라는 결과가 변하지 않는 이상, 고백한 상대가 상처를 입는 것은 확실했다.

그 상처를 줄이는 방법도 없다. 어설프게 보류로 남겨둔다면 희망을 주기 때문에 나중에 그 희망이 깨졌을 때 더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이치노세의 고백을 거절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이 일로 이치노세가 다른 방향으로 성장을 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나도 사실은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상담을 받은 입장으로서 일단은 대답은 해줘야하니까"


"복잡한 문제네요.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감정인데… 그것으로 상처받을 수 밖에 없다니"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일본은 기본적으로 일부일처제. 1대1로 사귀는 것이 올바르다고 결론지어왔다.

물론, 개중에는 여러명의 이성과 사귀는 사람도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1대1의 연애를 한다.

나 역시도 그게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이치노세의 고백을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네, 그걸 누군가가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치노세의 마음은 내가 함부로 결단을 내릴 수 없다.

나를 좋아해주는 것은 굉장히 기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마음에 대답해줄 수 없다.


"만약 아야노코지 군이라면 어떻게 하실건가요?"


"나? 거절하겠지. 사실대로 말하고"


"하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고 한다면요?"


"……음?"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은 스위치처럼 껐다 켰다 할 수 있는게 아니에요. 고백을 거절당했다고, 그 스위치를 꺼버려서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한 순간에 사라져버리는게 아니니까요.

고백을 거절당해도, 여전히 좋아할 수도 있는거고, 사귀지 못하지만 좋아하는 마음까지 부정할 수는 없는거잖아요"


"그렇…지"


히요리의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내가 이치노세의 고백을 거절했다고해서, 이치노세가 나를 좋아한다는 마음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리지는 않는다.

이치노세라면 내가 누군가와 사귀고 있다고 말하면, 필사적으로 잊으려고 노력은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인간이 억제할 수 없는 본능의 영역.

그것을 내가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아야노코지 군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실건가요?"


"……아마도 그냥 놔둘지도 모르겠어. 자신의 마음을 다른 사람이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 이치노세와 사귈 수는 없지만, 이치노세가 나를 좋아하는 마음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부정하지도 않고, 내가 부정할수도 없는 것이다.

히요리의 말이 내 머리속에 천천히 퍼져나간다.

나는 지금까지 이치노세가 나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어떻게하면 지울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치노세의 성장에 방해가 된다면 그 마음을 없애줘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애초에 나에게 이치노세의 마음을 컨트롤 할 권리 따위는 없었다.


"히요리 덕분에 상담해준 상대에게 좋은 대답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 고마워"


"아뇨, 아야노코지 군도 고생이 많네요. 그런 상담까지 받다니"


히요리는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게 누군가의 상담을 받은 것이 아닌, 나 자신의 일이라는 것을.

하지만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 후, 히요리와 잡담을 나누고 점심시간이 되었다는 선내 방송을 듣고 히요리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그렇군요……아야노코지 군은, 이미 누군가와 사귀고 있었군요"


식당으로 향하던 도중, 히요리가 무슨 말을 중얼거린 것 같았지만, 주변에 있던 다른 학생들의 잡담의 소리 때문에

전혀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