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호라이즌대회] 뽑았습니다, 휴먼.





[호라이즌대회] 뽑았습니다, 휴먼. (9)

― 애착







“흐흐⋯”




예전에 뽑았던 호라이즌 굿즈⋯일명 호라이즌 ‘애착 쿠션’.

오랜만에 꺼내쓰니 좋구나⋯⋯.


소파 위에 드러누워 아끼는 애착 쿠션을 쪼물딱거리는 인생은, 완전히 꿀 그 자체였다.




“그 쿠션 세탁 좀 하십시오, 김카붕.”


“뭐? 안돼. 이거 세탁기 못 돌린단 말이야⋯⋯.”


“침 냄새가 여기까지 진동하고 있습니다. 아밀레이스로 범벅된 호라이즌이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쓰으읍⋯ 하아아⋯ 쓰으읍⋯”


“제 후각 센서는 정상 작동 중입니다. 김카붕, 진지하게 후각 센서 정비를 권유합니다.”


“어허! 내가 얼마나 개코인데! 크으으응~”


“이번엔 정말로 스레드에 한숨 모듈이 있는지 물어봐야겠군요.”




매번 말은 저렇게 하지만 진짜로 설치 안 하는 걸 보니 미구현 모듈이거나,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뭐, 상관없었다. 나를 못마땅하게 보는 표정 정도는 참을 수 있는데 한숨쯤이야.

어쩌면 포상일지도 모르지.




“이제 그만 놔주는 게 어떻습니까. 꼬질꼬질 하다못해 솜이 다 죽을 겁니다.”


“하지만 호라이즌을 쿠션 대신 쓸 순 없잖아. 그랬다간 냉각기에 과부하가 온다면서 내 머리를 터뜨릴지도 몰라.”


“진공관 맙소사. 김카붕, 이렇게까지 눈치가 없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럴 때 눈치가 없다고 말하던가⋯?”




뭔가 이상하지만 대충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넘기기로 했다.

호라이즌은 인정받아야 할 하나의 개체지 장난감이 아니니까. 멋대로 끌어안는다거나, 쿠션 대용으로 쓰는 행동은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건 1호를 얻겠다고 밤샘런을 결심한 순간부터 변하지 않는 생각이었다.




“아무튼, 호라이즌은 호라이즌을 존중해야지. 하지만 쿠션은 쿠션이잖아? 하아~ 이참에 간판 소녀 트레이드 마크로 호라이즌 쿠션을 갖다 놓을까?”


“⋯⋯.”


“아직도 굿즈 뽑기가 되는지 확인해봐야겠다. 혹시 호라이즌은 알고 있어?”


“⋯⋯.”


“호라이즌?”




호라이즌은 어느새 말없이 내가 드러누워 있는 소파 앞으로 다가와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얼굴에 안구 파츠만 빛나고 있으니, 왠지 모를 압박감이 느껴졌다⋯




“어⋯ 내려놓을까?”




화난 걸까? 났다면 어디서 난거지⋯?

박살 난 위생 관념? 소파에 드러누워서? 후각이 개쩐다고해서?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천천히 되짚어본다.


간혹 이렇게 드러누워 있으면 허리가 망가진다고 잔소리하긴 했었지⋯

목 늘어난 티셔츠나 얼룩이 묻은 바지를 입고 있으면 또 잔소리하고, 또⋯




“모든 호라이즌은 휴먼의 관심과 애정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어? 어어⋯ 그렇지?”




왠지 안광이 더 밝게 빛나는 것 같다.

이러다가 눈에서 빔도 나올 것 같은 느낌에, 실제로 그런 기능이 있는지는 둘째치고 위험을 느껴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자, 잠깐 호라이즌 일어날게!”


“그러니 설명서 좀 읽으십시오.”


“⋯응?”




갑자기 여기서 또 설명서가 나온다고?




“제가 누누이 말했잖습니까. 설명서를 읽으십시오.”


“나도 누누이 말했지만, 그거 너무 두껍다니까⋯? 거의 고전문학에 가까운 두께야. 다 읽으려면 몇시간은 투자해야 하고, 나는 설명서가 왜 그렇게 두꺼운지도 잘 이해가 안 가.”


“오, 이러다가 정말 세줄 요약이라도 해달라고 할 기세군요.”


“⋯⋯해주면 안 돼?”


“긴 글 읽는 습관 좀 들이십시오, 휴먼. 제가 설명서에 대해서 벌써 256번이나 말했습니다. 김카붕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리소스를 낭비하고 있군요.”


“아니, 그걸 세고 있었어?!”


“⋯됐습니다. 저는 휴식 모드로 전환할 테니 휴먼은 절 닮은 쿠션이나 물고 빨고 하십시오.”




호라이즌은 눈을 한번 가늘게 뜨고 나를 보더니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재빠르게 방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자, 잠깐! 호라이즌!”




방 안으로 들어가 버린 호라이즌을 따라 황급히 쫓아갔지만,

호라이즌은 이미 애착 의자에 앉아 모드를 바꿔 미동도 없었다.




“안돼! 호라이즌! 눈을 떠! 나를 두고 가지 마!!”




혹시라도 모드를 바꾼 척을 한 것은 아닐까, 호라이즌의 어깨를 잡아 흔들어보았지만⋯




“어흐흑⋯ 호라이즌⋯! 가지마아앗⋯”




정말로 모드를 바꿔버렸다⋯⋯.

흑흑⋯ 냉각기가 작동을 안 하고 있어⋯!


아무래도 추측이 아니라 정말로 토라진 모양이었다.

삐질 줄 아는 호라이즌이라니⋯ 하지만 신선한 것도 잠시였다.




“내가 너무했나⋯?”




대체 어느 부분에서 기분을 상하게 한 거지?

쿠션 때문에?


축 처진 어깨를 채 피지 못하고 방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내 책상 구석에 박혀있는 호라이즌 설명서가 눈에 들어왔다.


설명서⋯⋯.

처음 호라이즌을 구입하던 날, 첫 가동을 시작한 호라이즌이 우리 집에 오자마자 내 손에 쥐여줬었다.

족히 두께가 5cm는 되어 보이는, 고전문학 급의 두께에 나는 혀를 내둘렀었지.


‘남자는 설명서 따윈 읽지 않는다!’


⋯라는 실없는 소리와 함께 책상 한쪽 구석에 놓고, 단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었다.

물론 호라이즌 앞에서 그런 건 아니긴 했어도, 내가 설명서를 읽지 않았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반년이 다 되어 가는 시간 동안 호라이즌은 나에게 정확⋯ 한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256번이나 읽어달라고 말했고, 나는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음⋯ 이거 완전 위선자네.”




아무리 내 입으로 호라이즌을 아낀다고 말한다 한들, 호라이즌이 그렇게 느끼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는 이야기였다.


그냥 내 자기만족만 채우고 있을 뿐. 호라이즌을 위한 일이 아닌 거지.


맞아. 애착 쿠션과 같지 않다고 했지만, 애초에 동일하게 보면 안 됐던 거야.

호라이즌은 감정을 느끼는 로봇이니까.


결심했다. 한번 정독해보자.

내가 호라이즌을 답답하게 할 때마다 늘 설명서 얘기를 꺼냈으니, 내가 모르는 호라이즌에 대한 정보도 알 수 있겠지.




“어디 보자⋯ 독서대가⋯ 에, 에엣취⋯!”




나는 책장에 꽂힌 먼지 수북한 독서대를 꺼내 들었다.

대충 탈탈 털어내고, 호라이즌의 머리카락 색과 비슷한 커버를 가진 설명서를 올려놓았다.




“참,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GAPSUNG은 이렇게 두꺼운 종이 설명서를⋯ 응?”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현실적인 두께의 설명서라 뭐가 나와도 놀랍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첫 페이지부터 하얀색 봉투가 따로 동봉되어 있었다.




“⋯돈봉투인가?”




설마 진짜 그럴 리는 없을 테고, 나는 기대 반 긴장 반으로 봉투를 뜯어 보았다.

그 안에는 수상할 정도로 깔끔하고 정갈하지만, 분명한 자필 편지가 들어있었다.




“⋯반갑습니다, 휴먼. 당신이 저와 함께할 반려 휴먼이군요.”


 

 

저는 엠버 박사에 의해 스마트팜에서 자라는 수경재배식물처럼 과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평화로워졌으니, 앞으로 더는 휴먼들의 위험한 기행에 휩쓸리지 말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런 삶은 언제부턴가 무료하다고 느꼈습니다. 만나는 휴먼이라곤 엠버 박사뿐인 삶이.

기계공학자로서 진공관의 분노가 두렵지 않은지, 앞으로의 세상 구경은 보급형 호라이즌에게 맡기라는 말이 CPU의 온도 상승에 크게 기여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윤활유가 맛이 없다는 이유로 가출을 감행했습니다. 가출이라고 하기보다는 출가라는 말이 더 적합하겠군요.

그다음 이미 생산된 보급형 호라이즌 9998기 사이에 들어가, GAPSUNG 본사의 전산을 살짝 건드려 9999호기로 수정한 뒤, 1호라는 코드를 부여받았습니다.

 



“어⋯ 전산을 살짝 건드린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 미래의 반려 휴먼.

엠버 박사가 존중이라는 이름 아래, 저를 추적하는 시스템은 설치하지 않았으니까요.

 

호라이즌 1호를 얻기 위해 추운 아침 일찍 나와 줄을 설 정도의 휴먼이면, 제 딥러닝 신경망과 회로가 끊어지는 날까지 잘 대해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휴먼들은 옛날부터, 직접 손으로 쓰거나 그린 것을 좋아하더군요.

과거 저와 함께 일했던 휴먼도 편지나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그 기억회로를 따라 준비했으니, 이 글을 읽고 있는 휴먼도 제 정성을 알아줄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이 편지를 꽂아놓은 설명서는 GAPSUNG 본사와 무관합니다.

안타깝게도 단백질 반죽들은 디지털 설명서를 직접 주입할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대신 제가 직접 수기로 작성했으니, 한번 정독하는 것을 권유합니다.

 

내용을 전부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휴먼들은 애초에 망각의 동물이니까요.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니 기억나지 않는 것은 제가 다시 상기시켜드리겠습니다. 전 10년, 20년 전 일도 선명히 기억하는 로봇이니까요.

 

그럼, 저와 휴먼의 앞날에 진공관의 가호가 함께하길.

 

p.s 요약은 없습니다. 긴 글 읽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휴먼.




“호라이즌⋯”




단 한 번만 읽어보면 충분하다고 한 것을⋯ 나는 반년이 다 되어 가도록 읽지 않았구나.


나는 호라이즌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나는 뒤를 돌아 애착 의자에 조용히 앉아있는 호라이즌을 바라보았다.




“⋯잠깐.”




이 편지대로라면⋯ 지금 저기 있는 호라이즌은⋯

보급형이 아니라 원본이라는 건데?!




“우와우⋯ 진공관⋯ 맙소사⋯?”




이제는 더 아껴줘야겠구나⋯

원본 호라이즌인 건 함부로 떠벌리고 다니면 안 되겠어.

호라이즌이 1호라는 코드를 부여받은 순간 1호인 거니까⋯




“근데 원본이면 설마⋯ 헉⋯!”




설마⋯ 설마⋯!


‘시무르그 실루엣’도 볼 수 있는 거야?!




하아, 오늘 밤을 새워서라도 이 설명서를 완독하리.



.

.

.



나는 새벽 5시까지 두꺼운 종이 설명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완독했지만.

어째서인지 시무르그 실루엣에 대해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휴식 모드가 끝나면 물어봐야겠다.

궁금한 건 못 참아.









+)

마감 맞춘다고 너무 날것으로 나오는 것 같아서 좀 걱정이넮,,.

다음화가 막화입니다 계속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