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인간이 희귀종인 세상에서

새벽에 일어났던 적이 몇 번 없었는데도, 오랜만에 아침에 일어나는 것 같았다.


아침 햇살이 방 안의 커튼을 뚫고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의 상태를 느끼며 몸을 일으키니, 오늘따라 상쾌한 기분이 들었고,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아침에 일어난다는 게 이렇게 좋은 기분일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에전이었다면 찌뿌둥한 몸상태로 일어났을 텐데, 이것도 여자의 몸이 되면서 나름대로 좋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남자였을 때라면 피곤에 찌들어서 잘 때도 피곤하고 일어나도 피곤했을 텐데.


그래도, 역시 익숙한 몸은 남자의 몸이었다.


여자의 몸은 욕실에 들어가서 씻을 때마다 흠칫 거리면서 놀란다던가 하는 일들이 아직까지도 종종 있었기에.


언제쯤에야 돌아갈 방법이 생길려나.


끄응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켜니 신체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느껴진다.


이대로 더 눕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들어서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가벼운 몸상태에 맞춰서 발걸음도 가볍기 그지 없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화장실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살펴보니 눈가 밑의 짙게 내려왔던 다크서클도 어느정도 사라진 게 눈에 띄일 정도였다.


얼굴에도 전체적으로 핏기가 도는 게 상당히 보기가 좋았다.


…아직까지도 덜 익숙한 얼굴이라서 문제였지만.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에는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후줄근한 회색의 반팔 티셔츠를 입은, 나이에 안 맞는 앳된 얼굴이 인상적인 여자가 보였다.


이 하고 이빨을 드러내며 입을 벌리면 그에 따라서 움직이고, 길게 내려온 옆 머리카락을 손으로 비비 꼬으면 거울의 여성도 똑같은 동작을 한다.


볼 때마다 내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현재의 내 모습이었다.


이런 외모를 가졌기에 인터넷에서 봤던 사람의 몸에서 난다는 효과가 더 크게 발휘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나 한테는 참으로 안타까울 정도의 외모였다.


"어휴."


한숨을 한번 내쉬고,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찬물로 틀고 흐르는 물로 얼굴을 닦았다.


겨울에 다가서는 날씨라 그런 지 찬물이 평소보다도 더 차갑게 느껴졌지만, 얼굴에 찬 물이 닿는 느낌이 좋았다.


따뜻한 물보다는 찬 물이 정신을 차리는 데 더 도움이 되기도 했고.


네 번정도를 얼굴에 찬 물을 끼얹으며 닦아내고, 거울에 비쳐보니 턱을 타고 뚝 뚝 떨어지는 물이 보였다.


거울 속의 나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는 채, 우수에 찬 표정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본다면 어떤 근심이 있는 건가 느껴질 정도로, 걱정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정작, 내게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이 얼굴때문에 한달이라는 시간 동안 오해를 받았지만, 최근에는 오해를 받을 틈도 없었고, 그런 오해를 받을 만한 일도 없었다.


금향과 청하때문에 그런 거겠지만.


요 며칠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이 한달이라는 시간 동안 있었던 일들보다 더 크게 느껴진다.


어쩌다가 저런 일에 휘말렸나 싶었지만, 단순히 운이 없었다는 말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방음 마법에 문제가 생기게 된 것도 필리아의 실수로 인한 경우였고.


금향과 청하가 공원에서 개판 난리를 치게 된 것도… 아니, 그건 운이 없었던 경우가 아니라 내 실수였다.


거기서 사진을 찍게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었는데.


집사복을 입은 것도 끔찍한 일이었는데, 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진을 남겨도 된다고 했던 걸까.


머리를 부여잡고 자괴감에 빠지고 싶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인 데다가 개판의 원흉인 사진은 사라진 지 오래였기에 그만 뒀다.


부정적인 사고는 사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여전히 틀어져있는 찬물을 얼굴에 끼얹어 상념을 지운다.


한번으로는 모잘라서 세번이나 뿌리고 나서야 생각이 사라졌다.


수도꼭지를 돌려서 물이 나오지 않게 한 뒤, 욕실 한 켠에 걸려있는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았다.


밖으로 나와서 거실로 고개를 돌리니, 햇빛이 거실을 가득 채워서 환한 것을 보니 아침이라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아침에 일어난다는 게 이렇게나 좋은 기분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정작 아침에 할 일이라고는 딱히 없었다.


밥이라도 먹을까 생각은 들었지만 전기밥솥에 남은 밥이 하나도 없었고, 냉장고에도 김치말고는 별다른 반찬도 없어서 배달이라도 시켜야하나 싶었지만, 선택지가 하나 남기는 했다.


금향의 카페에 가면 아마 밥을 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시간에 가기에는 금향이 먼저 밥을 먹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시간까지 연락이 없었던 것을 보면 아마, 먼저 먹지 않았나.


…문득 든 생각에 방 안의 스마트폰쪽으로 뛰듯이 걸어가서 화면을 켜보니,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문자나 전화가 오지는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침을 어떻게 떼워야 괜찮으려나 생각을 할 무렵, 기가막힌 타이밍으로 스마트폰의 진동이 울렸다.


전화를 건 상대방을 확인해보니 금향이었다.


"안녕하세요, 주빈!"


"…안녕하십니까, 금향."


금향의 인사를 받아주니, 금향쪽에서 청하의 목소리가 살짝씩 들렸다.


"나도, 나도!"


"애도 아니고 뭐하는 거야. 이건 내 꺼잖아."


"인사는 할 수 있지 않나!"


"어휴,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매달려. 키도 작은 게 왜 그렇게 커서는."


"뭣! 아니, 지금은 넘어가겠느니라!"


아침부터 금향과 청하가 싸우는 것을 들으니 이 두 명이 내게 온갖 일들을 발생시킨 원흉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거리를 두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서로 데면데면한 관계로 지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이제와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만약에 불과했다.


서로 몇 초간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 싶더니, 청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헴! 안녕하느니라!"


"안녕하십니까, 청하."


"으흐… 흠, 흠. 방음 관련으로는 다 끝났느냐?"


"끝났습니다만,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어제는 나도 금향의 옆에 있었느니라! 나도 도움을 주고 싶었다만, 이런 쪽으로는 금향이 전문적이니…."


"마법에 대해서는 주빈보다 더 모르지 않아?"


"어허. 그래도 내가 더 아는 게 아직까지는 많다! 아마도."


"아마도가 뭐야, 아마도가! 그럴 거면 나 한테서 마법이라도 배우던가!"


"네 녀석에게 마법을 배울 일은 없느니라! 주술이면 충분하니!"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지는 둘의 싸움에, 한숨이 절로 흘러나온다.


내 한숨 소리를 들었는 지 스마트폰 너머가 갑자기 조용해졌지만, 이내 서로의 잘못이니 뭐니 하면서 따지는 둘의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소리를 작게 틀었는데도 여기까지 전해지는 목소리에 귀가 아파왔기에 스마트폰을 귀에서 잠깐 떨어뜨렸다.


…내 목소리가 안 들린다는 사실을 깨달은 둘이 급하게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


"어디갔느냐! 우리가 잘못했느니라!"


"우리가 아니라 네 잘못이겠지!"


"시끄러울 정도로 떠든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시끄러우니, 이제 용건을 말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알겠어요(느니라)….""


둘에게 단호하게 말하고 나서야 아침을 먹으러 카페에 올 생각이 없냐는 금향의 말에, 가겠다고 답했다.


아마, 눈 앞에서 봤다면 금향의 꼬리가 천장을 향해 꼿꼿이 서있는 모습이 보였을 정도로, 지금 금향의 상태가 어떤 지 알 것만 같았다.


옆인지 뒤에 있는 청하의 꼬리도 같이 서있었겠지만.


그 모습이 아주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을 보니, 며칠 사이에 꽤 친해지지 않았나 싶었다. 내가 원해서 친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여기서 밀어내면 둘이야 시무룩하면서 알겠다고는 하겠지만,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이렇게나 정에 약했던 사람이었나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약한 편이었다.


…아, 이런.


안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그 생각에 몰입하는 버릇이 있었다.


급하게 스마트폰으로 주의를 돌리니, 내가 듣든 말든 신나게 떠들고 있는 둘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법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마법을 가르치는 게 맞다니까!"


"나도 주빈에게 주술을 가르치고 싶단 말이다! 마녀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주술도 어느정도 재능이 있을 거란 보장이지 않는가!"


"먼저 배운 게 마법이니까 어느정도 익숙해지면 그때 주술을 배우게 해도 되잖아!"


"어느정도 익숙해진다는 게 네 녀석의 기준이라면 거절하겠다! 그리고, 그건 주빈에게 너무한 기준이니라!"


"에? 그런가?"


"…아닐 지도 모르겠구나. 인간이란 나도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종족이니."


"…무슨 소리를 하고 계시는 겁니까?"


마법이니 주술이니, 당장은 배울 생각이 드는 건 아니었는데.


지금은 아미야에게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 두명에게서 뭘 배우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미야보다 잘 가르칠 것이란 생각도 들지 않았고. 둘 다 감각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감각으로 배우는 건 나보다는 그녀가….


계속해서 그녀의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을 보면, 차라리 지금 금향의 카페로 가는 게 더 나아보인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신경쓰였지만, 카페에 가서 청하에게 어떻게든 해달라고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스마트폰으로 밖의 날씨를 보니 외투를 두껍게 입고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무슨 털인지는 모르겠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따뜻해보이는, 안의 재질이 털로 된 흰색의 겉옷을 입고, 바지는 겨울용으로 만들어진 청바지를 입었다.


저번처럼 추위를 느끼면서 갈 바에 더운 게 낫다는 느낌으로 옷을 입으니, 그제서야 밖에 나갈 준비가 다 되었다.


전화가 끊어지지 않은 스마트폰 너머로 계속해서 둘이 떠드는 소리를 들으니 이상하게도, 참으로 묘하게도 기분이 좋아진다.


여태까지 한 번도 이런 느낌을 받았던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서로 마법이 더 좋다 주술이 더 좋다 싸우는 것을 들으니 여전히 같은 주제로 난리인 모양이었다.


…싸우는 소리를 주위에 다 들리게 하면서 가는 건 싫었기에, 오랜만에 이어폰을 이용했다.


스마트폰으로 들리던 소리가 귀 안을 가득 채우니 소리를 더 줄여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다 줄여놓은 상태였다.


그냥 전화를 끊어버릴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둘이 시무룩하는 모습이 떠오른데다가 아마 카페에 가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았기에 이대로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목소리를 조금만 낮춰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래도, 못 버티는 건 못 버티는 거였지만.


둘에게 그런 부탁을 하니 목소리가 뚝 하고 끊겼다.


"…우리 목소리가 그렇게 큰가?"


"…인간이니 그런 것 아니겠나. 아니면, 전화기의 소리를 줄여보는 건 어떤가, 주빈?"


"이미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 목소리가 큰 걸로 하자."


"그런 것으로 하겠느니라."


이런 곳에서는 또 서로의 마음이 맞는 건지 음, 음. 하고 보지 않아도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게 눈에 보였다.


…정말로 이 둘과 밥을 먹는다는 게 맞는 선택이었나 의문이 들었지만,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도중이었다.


엘리베이터의 밖으로 나와서, 아파트 출입문에 다가가니 가을임에도 겨울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바람이 느껴졌다.


밖으로 보이는 나무나 꽃의 모습들을 보면 여전히 가을의 풍경이었는데도, 바람만큼은 겨울이었다.


가는 동안 감기에 걸리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그래도 두껍게 입은 데다가 카페도 가까운 거리였으니 괜찮지 않나.


감기에 걸리면… 둘에게 부탁하면 금방 낫겠지. 서로 간호해주겠다며 난리를 칠 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역시 감기에 안 걸리는 게 가장 나을 것 같다.


서로 싸우는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속에서부터 귀찮음이 우러나오기 시작했다.


정말로 카페에 가는 게 맞나 하는 의문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아파트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얼굴에 닿는 바람이 차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그렇게 차갑지는 않았다.


출입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은 그렇게나 차가웠지만, 햇빛이 비추고 있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날씨가 유지된다면 공원 벤치에 앉아서 햇살을 느끼며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꽤 괜찮은 날씨였다.


"에헴. 오늘은, 모처럼 내가 준비했느니라!"


"내 카페인데…."


"어허. 가위바위보를 진 패배자는 아무런 불평도 하지 말거라!"


"주빈이 내가 하는 걸 원할 수도 있잖아!"


"…정말이냐?"


그렇게 되물어오는 청하에게 뭐라고 답을 해줘야 하는 걸까.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어오는 청하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둘 다 맛있으니 번갈아가며 하시거나, 아니면 금향의 카페이니 금향의 말을 따르는 게 낫지 않습니까."


"…그, 그렇죠!?"


"그런…."


눈에 띄일 정도로 목소리가 높아지는 금향과, 시무룩해지는 청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금향의 목소리가 너무 높아서 귀가 아팠다.


이런 곳에서 드래곤과 용의 목청을 느끼게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