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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돌아온 비비아나X독타X니어 소설. 


2. 월루하면서 끼적거리다보니까완성되어있었음퀄리티는나도몰?루


3. 이 소설에 등장하는 독타는 찐따입니다. 인격적으로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는 다른 소설 독타들보다 훨씬 미성숙함. 찌질한 거나 답답하는 거 싫어하는 사람은 뒤로가기 눌러주셂....


4. 소재추천, 피드백, 댓글, 아카콘 모두모두 환영핢


5. 항상 읽어주셔서 감쟈합니다. 오늘 글도 즐겨주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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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시간 뒤. 


로도스 아일랜드 본함. 


바깥에서는 폭우가 쏟아지고, 함선은 느릿하게 항해하는 와중. 


마침내 기나긴 야근을 마친 박사는 기지개를 펴며 뻐근한 몸을 풀었다. 



“...으.” 



흘낏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두 시였다. 


이런 시간이라면 깨어 있는 사람은 켈시나 아미야, 그리고 기반시설 당직 오퍼레이터들밖에 없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씁쓸해지는 박사였다. 


피곤이 몸을 짓누르고, 턱이 빠질 듯한 하품이 연신 새어나왔다. 


비서 오퍼레이터인 라플란드라도 곁에 있었으면 좀 나았으련만, 야식으로 밀푀유를 만들어 오겠다고 탈주한 지 벌써 네 시간째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내서 다행이지. 


로도스 분기 결산이 바로 내일이니만큼, 게으름을 피우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무엇보다 성실하게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 견딜 수가 없다. 


생각이 거기에 미친 박사가 미소를 띄우며 몸을 일으켰을 때. 


똑똑, 


수줍은 노크 소리가 그의 고막을 두드렸다. 



“...누구지?” 



박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시간에 방문객이 찾아오는 경우는 드문데. 


라플란드가 돌아온 걸까. 


그렇게 생각한 그가 한숨과 함께 들어오려고 말하려던 찰나. 



“...박사, 안에 있나?” 



문틈 아래로 당당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새어들어왔다. 


귀가 그 목소리를 듣고, 야근에 굳어버린 머리가 그 목소리의 주인을 판별한 순간. 


박사의 말문이 그대로 막혔다. 


그에게 있어 켈시와 아미야 다음으로 익숙한 사람. 


그가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이자, 서로에게 목숨을 맡긴 끈끈한 동료. 


그리고….


힘들 때마다 곁에 있어 줬으면 하고 바랬던 사람. 



“마가렛이다. 들어가도 될까?” 



마가렛 니어였다. 



“...음, 자는 건가?” 



왜 그녀가 여기 있는 건지 궁금해할 틈도 없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 문고리를 잡고 열어젖혔다. 


문이 거칠게 벌컥 열리고. 


화들짝 놀란 황금빛 눈동자와 시선이 맞았다. 



“바, 박사? 깜짝이야….” 


“마가렛….”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나는 도망가지 않아.” 



박사는 뺨을 긁으며 겸연쩍게 웃는 마가렛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빗물의 냄새가 스며 있는 코트. 


가을 밀밭의 황금빛을 빼다 박은 예쁜 금발. 


무엇보다 풍성한 긍지와 활기가 엿보이는 미소. 



“...이거 꿈 아니죠?” 


“하하, 농담도 참. 그래, 꿈이 아니다. 나는 여기 있어, 박사.”  



마가렛은 설령 꿈에서라도 거짓말 같은 거 안 해. 


그렇다는 얘기는, 지금 눈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은….


마가렛이다. 


진짜 마가렛이야. 


생각이 거기에 미친 순간, 불현듯 정신이 들고. 


온 몸을 내리누르던 피로가 싹 가심과 함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오랜만이에요, 마가렛. 잘 왔어요.” 


“그래. 다시 박사의 곁에 있을 수 있게 되어 영광이야. 빛의 기사 마가렛 니어, 지금 복귀했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 당신이 그리웠어. 카시미어에도 물론 좋은 사람들이 많지만, 당신처럼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우는 흔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좀 아쉽네요. 올 거면 말이라도 해 주지 그랬어요. 시간 비워놨을 텐데.” 


“음? 분명히 연락은 넣었는데. 오늘부터 이틀간, 분기별 결산을 위해 잠시 귀대하겠다고.” 



마가렛의 말에, 박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랬었나. 

 

기억이 없는데. 


그간 너무 바빴어서 까먹은 걸까. 


설마,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렇지. 


마가렛에 관한 일을 잊어버릴 리가 없는데. 


잠시 머리가 복잡해졌지만….



“그런 것보다, 야밤에 실례지만 잠시 들어가도 되겠나?” 



그런 것 따위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생긋 미소짓는 마가렛을 보니 잡념이 싹 사라지는 박사였다. 



“네, 들어오세요. 코트도 받아 둘게요.” 


“감사한다.” 


“차 드실래요? 저번에 염국에서 과일 청을 선물로 받았는데.” 


“음. 부탁하지. 당신은 변함없이 사려가 깊군.” 


“별말씀을요. 앉아 계세요. 금방 타서 가져갈게요.” 

 


이게 힐링이고 리프레쉬지. 


아무리 커피를 들이키고 오리지늄을 씹어먹어도 유령처럼 따라다니던 피곤함이, 그녀와 말 몇 마디를 나누는 것만으로 사라지는 듯 했다. 


그때, 소파에 걸터앉은 니어가 박사의 책상에 가득 쌓여 있는 서류를 곁눈질했다. 



“...여전히 많이 바쁜 모양이네. 오늘도 일하는 중이었나?” 


“뭐, 늘상 그렇죠. 그래도 오늘치 일거리는 다 끝냈어요.”


“안타깝군. 가끔씩이라도 좋으니, 당신이 푹 쉴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남말할 처지가 아닐 텐데요, 마가렛. 저도 당신 소식 들을 때면 항상 그런 생각 해요. ” 


“하하, 그도 그런가.” 


“여기요. 식기 전에 드세요.”    


“고맙다.” 



잔을 받아 한 모금 마시자, 달달하고 상큼한 맛과 함께 따스한 온기가 온 몸에 퍼지고. 


비에 젖어 으슬으슬 떨리던 몸이 순식간에 차분해진다. 



“...이건, 무슨 차지?” 


“유자예요. 염국에서는 흔한 과일이라네요. 마음에 드세요?” 


“음. 개인적으로는 커피가 좀 더 입에 맞긴 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군. 겨울철에 타 먹기 좋겠어.” 


“가실 때 좀 챙겨가세요. 많이 있으니까요.” 



마가렛을 보며 상냥하게 웃는 박사. 


마지막으로 만난 지 일 년 남짓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는 변함없었다.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다정한, 그녀가 기억하는 박사였다. 


그 사실에 어쩐지 안도감을 느낌과 함께, 마음이 스르르 풀어지려 했지만….


아직 마음을 완전히 놓기에는 좀 이르지. 


먼저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 



“박사,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말씀하세요.” 


“혹시 사람 한 명만 채용해 줄 수 있을까? 가드 오퍼레이터로.” 



마가렛의 부탁에, 박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청탁은 안 돼요, 마가렛.” 


“청탁이 아니야. 로도스 아일랜드 카시미어 지부장으로서 정당하게 인재를 추천하는 거지.”  


“...그런 거라면 인사부에 말씀하시면 되지 않나요?” 


“안 그래도 내일 한 번 찾아가려고 했지. 하지만 그 전에 당신과 상담하고 싶었다.” 



이걸 봐 줘, 라며 서류가방에서 파일철 하나를 꺼내는 마가렛. 


박사는 미심쩍게 그 파일철을 받아 이리저리 흝어보았다. 


몇 초 뒤. 


파일철의 어느 한 부분에 시선을 고정한 박사가, 드물게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진심이에요, 마가렛?” 


“음?”


“양초의 기사, 비비아나 드로스테를 로도스에 입사시켜 달라고요?” 


“그래. 무언가 잘못됐나?” 



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는 마가렛. 


그런 그녀와는 반대로, 박사의 머릿속은 상당히 복잡해지는 중이었다. 


비비아나 드로스테. 


한때 카시미어에서 엄청난 인기몰이를 했던 스포츠 기사라는 사실은 제쳐 두고서라도…


그녀는 라이타니엔의 전 선제후 베르너 폰 호흐베르크의 유일한 혈육이며. 


현재는 카시미어 감정회 대기사장 이올레타 로시의 수양딸이다. 


즉, 그녀는 두 국가의 유력자와 어떤 식으로든 얽혀 있는 중요인물이었다. 


과장 조금 보태 해석하자면, 그녀가 로도스에 체재하는 것만으로도 로도스가 귀찮은 일에 휘말릴 가능성이 생긴다고 할 정도. 


물론 그녀가 감염자였다면, 로도스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녀를 받아들였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한참 고심한 끝에, 박사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일단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런 부탁을 하시는 이유가 뭐예요?”  


“친구니까.” 



하지만 그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마가렛의 대답은 너무나도 단촐했다. 



“...네?” 



어이가 다 털린 듯한 박사의 표정에, 마가렛이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박사. 그녀의 아츠나 검술 실력에 대해서는 당신도 잘 알고 있지 않나.” 



그녀의 말대로, 박사도 이전 기사 토너먼트에 참가한 니어를 응원하러 카시미어에 갔을 때 비비아나의 실력을 본 적 있었다. 


촛불처럼 흔들리는 빛과,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모두 다루는 아름다운 아츠였지. 


유려한 검술 실력과 그 아츠를 조합해, 그녀는 잠깐이나마 마가렛을 몰아붙이는 기염을 토했었다. 


하지만 실력이 있다고 다 로도스에 입사할 수 있는 건 아닌 바. 



“...그건 그런데요. 실력 말고 그녀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흠. 인격적인 면에서도 흠잡을 데가 없는 아이다. 선하고, 인내심이 강하며, 자애롭지.” 


“그런가요.” 



마가렛도 박사도 잘 알고 있었다. 


원래의 박사라면 이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며 즉시 인사부로 이첩시켰을 것이고. 


그럼에도 지금 그가 귀를 기울이려 애쓰고 있는 건, 화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마가렛 니어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사실에 약간의 기쁨을 느끼면서도, 마가렛은 진심을 다해 호소했다. 



“박사, 이건 로도스와 비비아나 양자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다.” 


“...글쎄요. 전 모르겠어요.” 


“로도스는 우수한 아츠 사용자 한 명을 얻어 인력난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고, 비비아나는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직장을 얻을 수 있지.” 



박사는 마가렛의 황금빛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꾸밈없는 열정과, 평소와 다름없는 강직한 신념. 


하지만. 


비비아나 이야기를 할 때, 환하게 타오르는 그녀의 눈동자가 더욱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비단 박사 혼자만의 착각일까. 



“...하….” 


“그녀를 둘러싼 정치적 환경이 문제라면, 내가 어떻게든 하마. 카시미어의 대기사장은 내 요청을 거절하지 않을 거다. 위치킹 잔당은 더 이상 비비아나를 위협하지 못할 테고.” 



그런 마가렛의 모습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는 박사였다. 


비비아나라는 인재 자체는 분명 매력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로도스의 엘리트 오퍼레이터들만큼 관심이 확 쏠릴 만큼 뛰어난 건 아니었고. 


왜 인사부가 아닌 외근 부서 총책임자인 자신에게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으며. 


무엇보다, 온 마음을 다해 그녀를 대변하는 듯한 마가렛의 모습에 살짝 질투가 났다. 


오랜만에 만난 자신과 회포를 푸는 것보다, 비비아나의 이야기가 먼저라는 걸까. 



“...저한테 와서 이러시는 이유가 도대체 뭔데요, 마가렛.” 

   

“그녀가 내-” 

“친구니까, 그런 대답 말고요.” 



박사도 잘 알고 있었다. 


마가렛은 그저 지나치게 성실하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따뜻하게 대할 뿐이라는 거. 


그리고 그건 힐난할 거리가 못 된다. 


오히려 미덕에 가깝지. 


하지만 그녀의 친구로서. 


아니, 그 이상의 마음을 그녀에게 품고 있는 한 명의 남성으로서. 


마음 한 구석이 조금씩 쓰라려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가렛의 말을 끊고 냉정한 어조로 말한 것은, 그런 유치한 마음의 발로였겠지. 



“...윽.” 


아무나나 할 법한 실수였다. 


하지만 상대가 ‘아무나’가 아닌 이상, 이런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박사가 숨을 삼켰지만, 그녀의 귀는 이미 축 늘어진 상태였다. 


씁쓸한 표정을 얼굴에 띄운 마가렛이 애써 웃었다. 



“...미안하다, 박사. 안 그래도 피곤할 텐데, 내가 너무 내 입장만 들이밀었군.” 


“아니에요. 제가 미안해요, 마가렛. 아무리 지쳐 있었어도 마가렛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하시던 말씀, 계속 해 주시겠어요?” 


“...응. 개인적으로, 당신에게 그녀를 부탁하고 싶었다.” 


“네?” 



전혀 뜻밖의 말에, 박사가 귀를 의심하고. 


어느새 평온한 얼굴로 돌아온 마가렛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부연설명을 덧붙인다. 



“그 아이에게는 재능이 있다. 아츠도 검술도, 학자로서의 역량도 상당히 뛰어나. 무엇보다 자신의 힘을 가치 있는 곳에 쓰고 싶어하지.” 


“......” 


“하지만 그 가치 있는 곳이 어디인지, 비비아나는 아직 잘 몰라. 그래서 고뇌하고 방황하는 중이고.” 


“...마가렛.”  


“당신이라면 그 아이를 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게 길을 가르쳐 주고, 그 길을 끝까지 걸어나갈 용기를 준 당신이라면.” 



박사는 침음성을 삼켰다. 


자신의 차가운 반응으로 상처를 입었을 게 틀림없는데도, 그녀의 목소리에는 박사를 향한 변함없는 신뢰가 묻어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믿음이 한없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부담된다면 거절해도 좋아. 나는 비비아나의 프로필을 인사부에 제출할 거고, 그들의 손에 평가를 맡겨야겠지.” 


“마가렛, 저는….” 


“하지만, 당신의 친구로서는…박사. 당신의 상냥함에 한 번 더 어리광을 부려 보고 싶은 기분이다. 괜찮을까?” 



겸연쩍다는 듯,약간 수줍은 기색을 담아 티 한 점 없이 미소짓는 마가렛. 


그런 그녀의 모습에, 박사는 목 안 쪽에서 수많은 말들이 구역질처럼 역류하는 것을 겨우 참아야 했다. 


미안해요.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잊어버렸나요, 당신의 길을 정한 건 당신 자신이고. 


그 길을 끝까지 걸어나가도록 스스로를 이끈 것 또한 마가렛 당신이에요. 


저는 그저 곁에서 지켜봤을 뿐이고요. 


사실 저, 그렇게 착하지도 않아요. 


가끔 이기적이고,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할 때도 있으며, 어린애처럼 감정적으로 변할 때도 있죠. 


‘전술지휘’가 아닌, 한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게 목적이라면…그건 저보다 당신이 하는 게 더 맞아요. 


이런 저보다는, 당신의 빛이 훨씬 밝고 아름다우니까요. 


미친 듯이 입천장을 두들기며 나가게 해 달라 아우성치는 자학의 문장들. 



“...네. 믿어 주셔서 고마워요, 마가렛.” 



하지만 박사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전혀 달랐다. 


마가렛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 봤자, 마가렛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도리어 그녀를 슬프게 할 뿐이겠지. 


그렇다면 쓸데없이 스스로를 깎아내려 봤자 의미는 없을 터. 


그리고, 무엇보다.



“비비아나 드로스테가 로도스의 채용 시험을 통과해 정식 오퍼레이터가 된다면…한 번 열심히 친해져 볼게요.” 



마가렛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자신 같은 게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심려를 끼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억지를 써 가며 겨우 지은 미소에, 마가렛이 환하게 웃었다. 



“고맙다, 박사. 당신에게 진 빚만 자꾸 늘어가는군. 이제는 언제 다 갚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아니에요. 오히려 이런 거라도 도와드릴 수 있어서 기뻐요.” 



짐짓 밝게 미소짓는 박사의 모습. 


그런 그를 보며, 마가렛 역시도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이 끓어오르는 것을 겨우 참아야 했다. 


박사. 


당신은 아마 모를 거다. 


나를 의지해 주는 사람은 정말 많지만, 정작 내가 이 테라 전체에서 솔직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당신 하나뿐이란 걸. 


옛날부터 나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당신에게 들고 와 징징거리길 반복했지만, 당신은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함께 짊어져주었지. 


내가 그런 당신에게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마음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강인한 당신을, 얼마나 마음 깊이 생각하는지. 


당신은 절대 모르고 있을 거야. 


당장이라도 당신에게 이 마음을 고백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야. 



“음, 그럼 이 이야기는 끝인가요?” 


“그래. 아, 박사. 상담하고 싶은 게 하나 더 있는데, 괜찮겠나?” 


“뭐든지요.” 



그래. 


적어도 카시미어에 다시 볕 들 날이 오기 전까지는 안 된다. 


그곳의 감염자들이 태양빛 아래 떳떳하게 거리를 활보할 수 있게 되고.


돈과 탐욕에 절여진 기사들이 다시 이전의 명예를 되찾기 전까지, 나는 당신의 곁에 설 수 없어. 


지금 애타는 심정을 이기지 못해 고백해 봤자, 피차 외로움만 더해질 뿐일 테니. 


하지만 만약 내가 내 사명을 완수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야말로. 



“카시미어의 감염자 인권 의식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로도스 아일랜드 카시미어 지부를 다른 이에게 넘겨주고 본함으로 복귀하고 싶다.” 


“...마가렛, 그 말은.” 


“그래, 박사.” 



당신의 그늘로 돌아오고 싶어.


그리고 당신의 얼굴을 떳떳하게 바라보며, 온 마음을 다해 이야기할 거야. 


빛의 기사, 마가렛 니어가 당신을 사모하노라고. 


그런 마가렛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사가 환하게 웃었다. 



“벌써부터 기대되는데요.” 

 

“응. 언제가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나를 기다려줄 수 있겠나?” 


“뭘 그런 걸 물어봐요. 기다릴게요.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그의 말을 가슴 속에 깊이 새기며, 마가렛은 구김살 한 점 없이 미소지었다. 


기약 없는 약속을 덜컥 내민 자신의 말에, 진심으로 기뻐해 주는 그런 그가 정말 좋았다. 


다시 그의 옆자리에 눌러앉고 싶은 마음이 몽글몽글 솟아올랐지만, 아쉽게도 그건 안 될 말. 



“응. 감사한다, 박사.” 


“저야말로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럼…먼 길 오느라 피곤할 텐데, 이만 쉬실래요? 예전에 쓰시던 방을 그대로 남겨 뒀어요.”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오늘은 당신과 좀 더 대화하고 싶어. 괜찮아?” 


“정말요? 저야 좋죠! 아, 배고프지 않으세요? 쿠키를 좀 가져올게요. 차도 더 드려야 하는데. 어떡하지.”  



지금은 모처럼 생긴 둘만의 시간을 최대한 알차게 보내는 것 정도로 참아야겠지. 


그런 마음을 담아, 마가렛은 느닷없이 허둥대기 시작한 박사의 손을 꼭 잡았다. 


박사의 떨림이 멈추고.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 온다. 


섬세하게 뻗은 그의 손가락을, 굳은 살이 박혀 딱딱한 손마디를. 


행여 부서지기라도 할 것처럼 조심스레 매만지며, 마가렛은 활짝 웃었다.  



“서두를 것 없어, 박사. 해가 떠오르기 전까지는 당신 곁을 지킬 테니. 오늘 밤만은…서로 밀린 일들을 느긋하게 이야기하자.” 



그 날로부터 일주일 뒤. 


인사부의 서류 심사를 통과한 촛불의 기사, 비비아나 드로스테가 로도스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