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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관순은 해방 이전에는 무명의 인물이었다. 1919년 9월 2일에 발행된 '신한민보'에 만세 운동이 보도되었으나, 유관순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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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이 대중에 알려지기 시작한 시점은 1945년 가을이다. 이화학당 출신인 박인덕이 당시 이화여고 교장인 신봉조에게 알려 주면서 유관순은 주목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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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9월 1일, '유관순 열사 기념 사업회'가 발족했는데, 오천석, 조병옥, 이시영, 오세창 등 67명이 고문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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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전영택이 '순국 처녀 유관순전'을 문교부 명의로 각처에 기증하면서 유관순은 본격적으로 유명해졌다. 친일 혐의가 있는 박인덕과 전영택이 '유관순전'이라는 전기를 이용해 영웅으로 만들었다. 이후 유관순은 애국 소녀이자 조선의 잔다르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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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덕은 황군의 어머니로서 사명에 대해 떠들고 다녔고, '승전의 길은 여기에 있다'는 주제로 강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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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덕은 유관순과 함께 형무소 생활을 했다고 말했으나, 유관순은 댕기머리고, 나이가 16살이고 일본인에게 맞아 죽었다고 하는 등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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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덕은 유관순이라는 이름을 발굴해 자신의 친일 이력을 감추고 독립 운동을 했음을 은근히 암시하는 선전효과를 노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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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당시 이승만 정권에 빌붙었던 친일 인사들은 빨갱이 사냥을 하거나 독립운동가를 내세워 자신도 독립 운동가의 이미지를 갖고, 자신들의 친일 이력을 감추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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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를 주도했던 오천석, 조병옥, 김활란 등은 모두 기독교인이었고 친일 논란에 휩싸인 인물들이다. 전영택도 목사 출신이고 친일 이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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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와 기독교, 순결과 죽음까지 결합해 가장 이상적인 영웅 신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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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여성의 결혼 연령은 보통 17세였다. 유관순 사망 당시 나이는 19세이다. 당시 처녀들은 대부분 댕기머리를 했다. 그러나 유관순의 머리는 쪽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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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여성의 평균 키가 150cm 정도였는데 서대문 형무소의 기록에 따르면, 유관순의 키는 약 170cm로 상당히 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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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유관순은 독실한 기독교인이 아닌 듯하다.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은 부친이 기독교인이 아니고 제사를 지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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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이 기독교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는 것은 분명하다. 숙부는 선교사였고 이화학당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나 독실한 신자는 아니였던 것 같다. 유관순과 기숙사에서 5년을 동거했다고 주장하는 보각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관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를 '명태 이름으로 빕니다'라 하였고, 친구들은 모두 배를 잡고 웃었다. 유관순은 명태 반찬이 하도 맛있어서 명태가 생각나서 그렇게 했다고 말하자 친구들은 다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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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의 형제는 5남매, 사촌은 7명 등 친척들이 많았다. 그러나 유관순의 초창기 전기에는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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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조중현, 김인승, 장우성이 그린 유관순의 초상화가 서로 다르다. 2001년부터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소위 '얼짱' 유관순 영정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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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유관순의 영정이 수심에 찬 중년의 모습으로 그려졌다는 지적에 따라 영정을 다시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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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성이 문제되거나 권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싶은 지배 권력은 대중의 이러한 속성을 이용해 영웅을 만들어내곤 했다. 프랑스 친독일 정권이 내세운 잔다르크, 나치 정권이 내세운 돌격대원 호르스트 베셀 등이 그러한 사례이다. 한국의 지배 세력도 이승복, 이순신, 세종대왕등을 권력자와 영웅의 동일시를 통해 독재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최근의 연예인이나 스포츠계의 스타만들기는 자본권력이 대중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지에 대한 답변으로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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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은 개신교 친일전력자가 자신의 전력을 덮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신교 선교 전략의 일환으로 의도된 영웅 신화 만들기에 지나지 않는 단순한 사건일 가능성이 많다.


/ 김상구 '믿음이 왜 돈이 되는가?'


유관순은 친일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띄어주기된 인물이란 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