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간위키의 '양반' 문서에 따르면,

법제적인 의미에서 양반의 기준은 조선 초중기에는 과거를 치를 수 있는 신분 자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 조차 평민, 천민도 치를 수 있도록 개정되었다. 법제적인 신분은 양인과 천인으로만 구별하며 양반은 사회적 신분의 범주에서만 인정될 뿐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과거 시험에 대한 사항을 무시한 결과이다.. 1910년의 전국 호구조사에서 확인되는데, 총 가구(家口) 수 289만 4,777호 가운데 양반이 5만 4,217호로 전체 인구의 겨우 1.9%에 불과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양반 통계이다.[4] 그나마 충청남도가 전체 가구 수의 10.3%로 가장 양반이 많았고 다음으로는 충청북도(4.5%), 경상북도(3.8%), 한성(2.1%), 강원도(1.1%) 순이었다. 그 뒤로는 전라북도(1%), 경기도(0.8%), 함경북도(0.8%), 전라남도(0.5%), 경상남도(0.4%), 함경남도(0.4%) 순이며 최하위는 황해도(0.3%), 평안북도(0.2%), 평안남도(0.1%)였다.[5]

군현을 단위로 양반이 많았던 고을은 경상북도 경주군(2,599호), 충청남도 목천군[6](2,388호), 경상북도 풍기군[7](2,294호), 충청남도 공주군(2,238호), 경상북도 봉화군(2,213호) 순이었다. 인구 대비로 봤을 때는 충남의 상당수 지역은 양반의 비중이 20 ~ 30% 대였으며[8] 충북 일부 지역, 안동 일대는 10% 후반 ~ 20대 중반 대였으며 경주가 11.5%로 여기까지의 지역이 10%를 넘었으며 이외 나머지 지역은 10%를 넘지 못했다.

양반이 많은 지역들의 특징들을 살펴보면 충청도경상북도, 한성(서울)에 양반들이 집중되어 있고 그나마도 전 인구의 5%를 넘지 못했다. 소위 서울 장의동(장동)에 세거하던 김상헌의 안동김씨인 이른바 '장동 김씨', 서울 정동에 세거하던 이상의의 여주 이씨인 이른바 '정동이씨' 등 한성의 경화세족은 급격한 변화로 무너지고,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안동, 그리고 충청도를 양반의 고장으로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경주의 경우 이언적의 후손인 여주 이씨의 토대 양동마을, 안동의 경우 류성룡의 후손인 풍산 류씨의 하회마을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반촌(班村)이라 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이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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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초반 인구조사에서 전국에서 양반 가구 비율이 높았던 지역이 충남, 충북, 경북, 한성이었다던데

하필 그런 지역들이 그렇게 나온 이유가 궁금해지기도 함.


사족,

우리 외가는 나름 떵떵거리던 충청도 양반 집안이었다는데

구한말 동학농민운동에 물심양면했다는 죄로

개좆망해서(어머니 曰 외고조부?가 관아에 하옥되었고 송아지도 빼앗기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함)

옥천군을 떠나 보은군으로 이주했다는

슬픈 가문사가 떠오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