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진은 대륙에 있어서의 원·명교체기를 이용한 고려 공민왕조의 북진 정책을 이어받은 태조 이성계()와 세종의 진취적 정책에 의해 설치된 것이다.


1356년(공민왕 5) 쌍성총관부()의 회복에 이어, 이 방면에 대한 경략은 고려 말기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이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

使)로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성계 또한 이 방면에서 무공을 세워 개국 초에 조선의 영역은 이미 대체로 두만강 하류에까지 이르렀다.


따라서, 두만강 유역의 가장 큰 여진 부족인 우디거족() 및 오도리족()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성계는 즉위 초부터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태종

때에는 경원·경성에 무역소를 두고 여진족에게 교역의 편의를 제공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1410년(태종 10)에 이르러 경원부를 중심으로 우디거족 등 오랑캐의 내습이 잦아지자 다음 해에 부()를 폐지했다가, 1417년에 부거( : 지금의 경성군)로 후퇴해 다시 설치하였다.


본래 경원부는 ‘흥왕()의 땅’이라고 하여 태조 때부터 공주( : 지금의 경원)를 설정하고 동북면 경영의 본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그 뒤 얼마 동안은 경성이 여진족 방어의 요충지가 되고 그 이북은 방치되었다. 그런데 세종 때에 이르러서도 여진족의 내습이 그치지 않자 1425년(세종 7)경부터 조정에서는 경원부를 다시 용성( : 지금의 수성)으로 후퇴시키자는 의논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조종()의 옛 땅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없다.”고 하는 세종의 적극적인 북진책으로, 드디어 1432년에는 석막( : 지금의 회령)에 영북진()을 설치해 동북경의 개척을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되었다.


1433년 우디거족이 알목하( : 지금의 하령) 지방의 오도리족을 습격해 그 추장인 건주좌위도독() 동맹가티무르() 부자를 죽이고 달아난 사건이 일어났다.


세종은 이러한 여진족 내분의 기회를 포착해 김종서()를 함길도도절제사에 임명하는 한편, 이징옥()의 무위에 힘입어 북방 개척을 과감하게 추진해갔다. 그리하여 그 이듬 해인 1434년(세종 16)부터 육진이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먼저 이 해에 석막의 영북진을 백안수소( : 지금의 )로 옮겨 이듬 해에 종성군으로 하고, 여진족 내침의 우려가 가장 많은 알목하에는 회령진을 신설해 그 해에 ‘부’로 승격시켰다.


또 부거에 있는 경원부를 회질가( : 지금의 경원)로 옮기는 한편, 공주의 옛터에 공성현()을 두었는데 이는 1427년에 경흥군, 1433년에는 또 ‘부’로 승격되었다.


그 뒤 경원과 종성의 위치가 두만강에서 너무 멀다 하여 1440년에 종성군을 백안수소로부터 수주( : 지금의 경성)로 옮겼다. 또 다온평( : 지금의 온성)에 군을 설치해 온성군으로 하고 이듬 해 이들을 각각 종성부·온성부로 승격시켰다.


1442년에 훈융( : 지금의 경원 북방)에서 독산연대(禿 : 지금의 회령 서방)까지 강을 따라 장성을 쌓고, 1449년(세종 31)에는 석막의 옛터에 부령부를 설치해 이른바 육진의 완성을 보았다.


신설된 육진에는 각 도호부사(使) 밑에 토관()을 두고 남방 각 도의 인민을 이주시켜 개척시켰다. 그 결과 장성 밖의 약간의 지역을 제외하고는 두만강 이남이 모두 조선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이 후 육진 설치에 압력을 느낀 여진족, 특히 오도리족은 대부분이 서방으로 이주해 파저강( : 지금의 ) 부근의 오랑캐족인 건주위()와 합류하였다.


1434년 이래 10여 년간에 걸친 육진의 개척은 서북방면의 사군 설치와 아울러 세종의 훌륭한 업적의 하나로 평가되었다. 즉, 이를 계기로 우리 나라의 북계()가 완전히 두만강·압록강 연안에까지 뻗치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육진 [六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자국 영토화 하는거 쉽게 생각하는데 선긋고 여기 내땅 이러면 되는게 아님 

두만강이라는 천혜의 방어선이 있는데도 피똥싸며 겨우 먹었는데 만주 먹기에는 국력소모가 너무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