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가장 극동에 있는 도시를 꼽으라고 하면 블라디보스토크를 뽑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더 들어가면 가장 극동에 있는 도시를 아나디리로 꼽기도 하구요 

하지만 그 사이에도 한때 인구10만명을 넘기던 도시가 있는데 바로 오늘 다뤄볼 주인공인 '마가단' 입니다




(마가단 시의 전경. 사진 출처 

https://www.muni.org/Departments/Mayor/Boards/SisterCities/Pages/Magadan.aspx )

마가단은 인구 9만명의 소도시로 마가단 주의 주도입니다.

1989년 인구가 15만명에 달하기도 했지만 많은 소련의 극지 도시들이 그렇 듯 소련 붕괴 후 인구가 급감, 현재도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습니다.


마가단의 역사는 1929년 시작됩니다. 

마가단이라는 이름의 기원은 정확하지 않지만, 지역 토착민인 에벤족 말로 '해변의 퇴적물', '마른 나무', ' 바람이 부는 곳' 이라는 의미의 단어에서 나오지 않았을 까 추정됩니다.


20세기 초 제정 러시아는 추코트카와 오호츠크 해를 중심으로 금 탐사를 시작하는데

산업적 의미를 가지는 금광은 발견하지 못하던 때에, 마가단을 흘려 북극해로 나가는 콜리마 강의 지류인 스레드네칸 강 유역에서 혼자 금을 탐사하던 샤피굴린이 처음으로 금을 발견합니다.

이후 1926년 소비에트 정부가 파견한 탐사대는 금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질구조를 발견, 1928년 유리 빌리빈을 대장으로 한 제1차 콜리마 탐사대가 파견되었습니다.

일본의 배를 빌려서 올라 강 어귀에 상륙한 탐사대는 곧 콜리마 강 유역을 탐사하기 시작하는데, 길이 험하고 커다란 강을 여럿 지나야 해서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이에 올라 군 소비에트 정부는 1928년 나가예프 만에 원주민인 에벤인 거주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1929년 6월 22일 주택, 학교, 병원, 동물 진료소 등의 기반 시설 건설을 시작했고 바로 이 마을이 마가단 시의 시발점인 마가단 마을입니다.


1931년부터 지하자원 개발을 위해 광부, 지질학자 등의 인력이 모여 들기 시작하고 마가단의 인구는 500명에서 2천명으로 급성장합니다.

1939년 인구 2만 7천명을 달성하여 시로 승격된 이후, 1954년 부터는 마가단 주의 주도 역할을 담당합니다.

이렇게만 보면 흔한 시베리아/극동의 광산도시의 역사 같지만, 이 도시는 수많은 사람의 희생으로 쌓아 올려진 도시입니다.



(1931년, 운하 건설 노동자들. 출처 : https://www.thetimes.co.uk/article/review-kolyma-stories-by-varlam-shalamov-trans-donald-rayfield-celebrating-the-laureate-of-the-gulag-mvfvwzv5c )


1931년 소련은 극북(추코트카 등의 시베리아 너머 극지방) 개발을 위해 NKVD 산하에 기업협동소(트러스트)인 달스트로이(Dalstroy)를 설치하고 마가단에 본부를 두었습니다.

하지만 마가단에는 달스트로이에서 일할 상주 인구가 부족했고, 소련 정부는 과거에 그러했듯 죄수들을 이주시켜 노동력을 확충하기로 결정합니다.

사실 러시아에서 개척에 죄수를 이용하는건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흔한 일이었습니다. 러시아 시베리아의 옴스크를 위시한 많은 도시들이 죄수들과 죄수를 따라온 가족들로 인해서 성장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기회가 있으면 다루겠습니다.


1932년 2월 4일 100여명의 죄수들과 호송 임무를 맡은 군인들, 달스트로이에 고용된 노동자들이 나가예프만에 도착합니다.

이를 시작으로 동년 4월 북동교정노동수용소(굴라크)가 설치되었고 1932년 7월 약 1만명의 죄수가 마가단으로 이송됩니다.

하지만 마가단의 매서운 추워는 절망적이었고, 1932년 도착한 죄수들과 감시를 맡고 있던 감시병, 심지어 군견까지 모두 동사하고 맙니다.

다음 해인 1933년, 소련은 2만7천명의 죄수를 마가단에 보내지만 역시 겨울을 넘긴 수는 1/50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934년 3차로 이송된 3만 2천명의 죄수들은 대부분 겨울을 넘길 수 있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마가단과 콜리마 지방의 건설 사업이 시작됩니다.


(콜리마 광산의 죄수들. 출처 : 위키피디아 콜리마 항목)


죄수들은 콜리마 대로와 각종 도로를 건설하고, 포구, 활주로, 마을 건설에도 동원되었스니다.

1932년부터 매년 최대 17만명에서 최소 2만명의 죄수를 마가단의 수용소로 이송하였으며

마가단 교정국에 따르면 콜리마 수용소에는 1932년부터 1953년까지 총 70만명이 수용되었고 매년 수만명의 죄수가 마가단으로 이송되었지만 열악한 환경으로 인한 손실으로 죄수의 총 수용 수는 80만명을 넘은 적이 없습니다.

1953년에는 달스트로이가 해체되어 마가단 주로 이관되었고, 마가단은 달스트로이 활동의 중심지로 약 200여개의 수용소를 관리하는 중심지로 이용되었습니다.



(도로를 건설하는 노동자들)

(R504 콜리마 고속도로. 출처 : 위키피디아 해당 항목)

죄수 인력을 이용하여 건설된 대표적 기반시설이 바로 R504 콜리마 고속도로입니다.
마가단에서 야쿠츠크로 이어지는 2200km의 도로는 바이커들에게 인기가 높지만, '뼈 위의 도로'라는 섬뜩한 이명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마가단에서 이송되어 온 죄수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건설한 이 도로는 수많은 사망자의 뼈 위에 지어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애도의 마스크. 출처 : http://m.news.zum.com/articles/47244029 )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상징물이 바로 '애도의 마스크'입니다.
1996년 공개된 이 작품은 수용소에 실려온 죄수를 분류하던 크루타야 언덕 위에 서있으며
스탈린 시절 희생된 수 많은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내부에는 당시 감방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습니다.


(2013년 건설된 성 삼위일체 성당을 중심으로 한 마가단 중심부의 야경)

(마가단의 바닷가, 2013년 설치된 철제 메머드상이 보인다. 출처 : https://russiatrek.org/blog/cities/magadan-the-view-from-above/ )

소련이 붕괴하고 난 이후 마가단은 평범한 러시아의 소도시가 디었다.
하지만 마가단은 아직도 러시아 콜리마 지역의 관문으로, 콜리마 지역으로 들어가는 화물의 99%가 해로를 통해 들어가고 있습니다.
마가단 항은 해류가 약하고 흘러가는 강이 없어 토사의 퇴적은 없지만, 1년에 200일(약 12월~5월)은 결빙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 항구를 이용할 때는 쇄빙선이 얼음을 뚫은 뒤 그 뒤를 배들이 운항하는 방식으로 항구를 연중 이용하고 있습니다.

현재 마가단은 러시아 1위의 금 채광량을 자랑하며, 풍부한 광물을 위시로 한 수산업등의 산업이 발달한 도시가 되었으며
빛나는 금 뒤의 어두운 과거를 간직한 도시로 영원이 기억되지 않을 까 싶다.

출처 

- 강덕수 외 12명. 2019. 러시아 도시로 읽다. 마가단, 콜리마의 관문 편(김민수 지음)
- 위키피디아. 마가단 항목 외 여러 사진 출처들

+ 콜리마 지역의 수용소에 관해서는 바를람 샬라모프가 지은 '콜리마 이야기'라는 책이 있는 듯 합니다. 샬라모프가 17년간 수용소에서 직접 몸으로 뛰며 틈틈히 쓴 단편소설을 모은 것으로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콜리마 수용소에 대해서 궁금하신 분들은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 마가단 주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면 한국외국어대학교 HK사업단에서 쓴 '러시아 연방주체 개관 시리즈 : 마가단 주'라는 글 ( PDF 링크(다운로드 주의) )이 있습니다.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