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새벽에 붉은 동이 튼다

*p. 23

 자유무역을 하는 영국에서도 집적이 역시 독점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주목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헤르만 레비 교수는 [독점체, 카르텔, 트러스트] 라는 제목의 특별 연구서에서 영국 경제 발전 자료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영국에서는 바로 기업 규모와 기업의 높은 기술 수준이 독점 경향을 품고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 기업당 자본 투자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규 기업들로 하여금 새로운 자본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키고 이로 인해 신규 기업의 창업을 보다 어렵게 만든다. 무엇보다 집적에 의해 형성된 거대 기업들과 보조를 맞추고 싶어하는 모든 신규 기업은 이제 매우 엄청난 양의 잉여 제품을 생산할 것이다. 신규 기업이 그것들을 처분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막대한 수요 증가가 일어나서 수익성을 낼 때 뿐이다. 이 잉여는 신규 기업이나 독점적 기업 합동 모두에게 이익이 나지 않는 수준으로 가격 하락을 강요할 것이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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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부 1학년 수준 미시경제학에서도 고전적 가정으로서 공급자의 한계생산량은 한계이윤이 0이 되는 지점에서 멈춘다고 설명한다.

 신규 창업은 더욱 어려워지고 하청 기업이 되기로 한 신규 기업들은 거대 기업의 보조를 맞추고자 최대한 과잉생산을 달성하려한다. 추후에 이를 지불하지 못하게 되거나 (일시적 현금부족으로) 하청계약이 일방적으로 끊길 경우, 그런 하청기업의 체급으로 감당할 수 없는 재고부채가 쌓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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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4

 반세기 전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저술할 무렵, 자유경쟁은 압도적 다수의 경제학자들에게 "자연법칙"으로 여겨졌다. 공식 학계는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적 역사적 분석을 통해 자유경쟁이 생산의 집적을 일으키고 이것이 다시 일정한 발전 단계에서 독점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증명했던 마르크스의 저작들을 침묵을 통해 없애려고 했다. 오늘날, 독점은 사실이 됬다. 경제학자는 독점의 다양한 발현을 묘사하는 책들을 산더미같이 써 대고 있으면서도 계속 이구동성으로 "마르크스주의는 논박됬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은 보호무역이냐 자유무역이냐의 문제와 같은 자본주의국가들 사이의 차이는 단지 독점체의 형태나 그것의 출현 시점에서의 사소한 변동을 일으킬 뿐이다. 그리고 생산이 집적한 결과로 독점체가 등장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현재 발전 단계에서 일반적, 근본적 법칙이다.

 유럽에서 새로운 자본주의가 과거의 자본주의를 대체한 명확한 시점은 상당히 정확하게 확정할 수 있다. 그 시점은 20세기 벽두였다. "독점체의 형성" 역사에 관한 최근 편찬물들에서 우리는 다음의 내용을 읽게 된다.

 "1860년 이전 시기에는 자본주의 독점에 관한 개별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것들로는 오늘날 매우 공통된 형태들의 맹아만이 식별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카르텔의 원시적 역사를 대표한다. 첫 번째 중요한 독점의 발전기는 70년대 ~ 90년대 초까지 지속된 국제적 산업 불황과 함께 시작했다." "만약 우리가 유럽 차원에서 이 문제를 고찰한다면, 우리는 자유경쟁의 발전이 60~70년대에 정점에 도달했음을 발견한 것이다. 영국에서는 구형 자본주의 조직을 완성했고 독일에서 이 조직은 수공업 및 가내공업과 격렬히 싸우며 자기 영역을 스스로 창출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혁명이 1873년의 공황, 아니 그 이후 계속된 불황과 함께 시작됬다. 80년대 초반 거의 알아차리기 힘든 정체기가 있었고 1889년 무렵 전에 없이 맹렬했지만 짧은 경기상승을 지났지만, 이 불황은 22년 동안 유럽 경제를 좌지우지했다. ...... 89년~90년의 짧은 경기상승기 동안 우호적인 사업 조건을 활용하기 위해 카르텔 체제가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잘못 추진된 정책으로 인해, 카르텔이 존재하기 전 보다 훨씬 더 빠른 물가 상승이 일어났다. 그리고 거의 모든 카르텔들은 큰 실패를 겪고 불명예스럽게 청산됬다. 불경기와 저물가 시기가 5년 간 뒤따랐다. ... 불황은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것은 또 다른 상승 직전의 쉬어가는 때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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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텔 운동은 두 번째 시기로 접어들었다. 카르텔은 과도적 현상이 아니라 경제생활의 기초 중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산업 영역 하나하나에서 승리하고 있었고, 특히 원자재 산업에서 승리하고 있었다. 19세기 말 대규모 경기상승과 1900~03년 공황은 - 적어도 석탄 산업과 철 산업에서 - 전적으로 카르텔 보호하에서 발생한 최초의 것이었다. 당시 이것은 참신한 것처럼 여겨졌으나, 이제 대중은 경제생활의 큰 영역들이 대체로 자유경쟁을 벗어난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따라서 독점체의 역사에서 주요 단계들은 아래와 같다.

 (1) 1860년대. 자유경쟁의 최고 단계이자 발전의 정점. 독점은 식별할 수 없는 씨앗 단계에 있다. 

(2) 1873년 공황 이후. 카르텔의 성장기.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예외이다. 영속적이지 않기 때문에. 

(3) 19세기 말의 경기상승과 1900~1903년의 공황. 

 카르텔은 경제생활 전체의 기초 중 하나가 됬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로 돌아섰다.

 카르텔은 판매 조건, 지불 시기 등에 대한 협정을 맺기에 이른다. 카르텔은 자기들끼리 시장을 분할한다. 카르텔은 생산할 재화의 양을 정하고, 가격을 정한다. 카카르텔은다양한 기업들 사이에서 이윤을 분배한다, 등등.

 독일에서 카르텔 수는 1896년 약 250개, 1905년 385개로, 대략 1만2천 개의 기업이 참여하는 것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이 수치들은 일반적으로 저평가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 미국에서 트러스트 수는 1900년 185개, 1907년 250개로 평가된다. 법인(트러스트)은 1909년 전체 산업 기업의 25.9%를 포함한다. 법인(트러스트)는 1909년 75.9%를 고용했다. 이 시기 산출량의 가치는 163억 달러로, 총 산출량의 79.0%였다.

 때때로 카르텔과 트러스트는 해당 산업부문 총 산출량의 7할 내지 8할을 자신들 손아귀에 집적한다. <라인-베스트팔렌 석탄 신디케이트>는 '93년 설립당시 해당 지역 석탄 총 산출량의 86.7%를 집적했고 1910년에는 이미 95.4%를 장악했다. 이렇게 생겨난 독점은 막대한 이윤을 보장하며, 경이적인 규모의 기술적 생산 단위를 형성하는 데로 이어졌다. 

 p.28

 '미국 정부 트러스트 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경쟁자들에 대한 트러스트의 우위는 해당 기업의 규모와 뛰어난 기술 장비에서 비롯된다. 사업 초부터 <담배 트러스트>는 수작업을 기계 작업으로 전부 대체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트러스트는 담배 제조와 관련된 모든 특허를 사들였고 이 목적을 위해 막대한 돈을 들였다. 이렇게 사들인 특허 중 상당수는 처음에는 아무 쓸모도 없는 것으로 밝혀졌고 트러스트가 고용한 기술자들에 의해 개조되어야 했다. 1906년 말, 자회사 두 곳이 오직 특허 취득 목적을 위해 설립됐다. 같은 목적을 염두에 두고 트러스트는 자체 주물공장, 기계공장, 수리공장을 건설했다. 브루클린의 한 연구시설은 평균 300명을 고용하여 궐련, 시가, 코담배, 포장용 은박지, 담뱃갑 제조와 관련된 발명을 위한 실험이 진행된다." "다른 트러스트도 역시 개발 기술인력을 고용한다. 이들의 업무는 새로운 생산방법의 고안 또는 기술 개선을 시험하는 것이다. <US 스틸>(*철강왕 카네기의 회사)는 기술 효율성을 향상시키거나 생산비용을 절감한 발명이 나오면 해당 프로젝트 직원에게 큰 상여금을 수여하고 있다."

 독일의 대규모 산업, 이를테면 지난 수십 년간 발전한 중화학 공업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기술 개선이 촉진됐다. 1908년까짖 생산의 집적 과정을 통해 이미 주요 "집단들"이 2개 등장했다. 이들 역시 그 나름의 방식으로 독점체의 본성에 충실했다. 처음에 이 집단들은 대공장 2개로 이루어진 "2사 연합"을 2개 형성했다. 각각은 약 2천만 마르크에 상당하는 자본을 보유했다. "2사 연합"의 한 쪽은 회흐스트 구 마이스터 공장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 소재한 카젤라 공장이었다. 다른 한 쪽은 루트비히스하펜 소재 아닐린,소다 공장과 엘버펠트 소재의 구 바이에르 공장이었다. 그 후 1905년, 1908년 각각의 연합이 각각 또 다른 대공장과 협정에 도달했다. 그 결과 2개의 "3사 연합"이 형성됬다. 각각 4천만 ~ 5천만 마르크의 자본을 보유했고 그렇게 몸집을 불려나갔다.

 경쟁은 독점으로 전환된다. 그 결과 생산의 사회화가 엄청나게 진전한다. 특히 기술의 발명,개선 과정이 사회화된다.

 이것은, 서로 흩어져서 접촉하지 않으며 미지의 시장을 위해 생산을 하는 과거(중세~식민시대 초기 길드) 제조업자들 사이의 자유경쟁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집적은 한 나라의, 심지어 앞으로 살펴볼 것처럼 몇몇 나라나 세계 전체의 모든 원자재 공급원에 대한 대략적 평가치(가령 세계 철광석 매장량)를 산정하는 게 가능해지는 수준에 도달했다. 그러한 평가치는 단순히 산정될 뿐만 아니라 이를 데이터로 활용하는 거대한 독점체 연합의 수중에 들어간다. 시장 수용력에 대한 대력적 평가치 역시 마련되고, 카르텔은 이런 '시장 파이'를 서로에게 "분배"한다. 숙련노동이 독점되고 최고 기술자들이 고용된다. 운송수단 또한 독점을 피할 수 없다. 제국주의 단계의 자본주의는 가장 포괄적인 생산의 사회화로 근접해간다. 그것은 이를테면 자본가들을 그들의 의지와 의식에 반하여, 완전한 자유경쟁에서 완전한 사회화로 가는 과도기에 놓인 일종의 새로운 사회질서로 끌고 간다.

 p.31

 생산은 사회에 뿌리내리지만 전유는 여전히 사적인 상태로 남는다. 사회적 생산수단은 소수의 사유재산으로 남는다. 형식적인 자유시장경제의 틀은 남지만, 언제든지 소수 독점자들로 인해 나머지 주민들에게 지우는 멍에가 참을 수 없이 무거워질 수도 있는 위험이 남는다.

 독일 경제학자 케스트너는 전적으로 "카르텔과 외부자(:카르텔 바깥의 자본가들) 사이의 투쟁"을 다룬 책을 한 권 썼다. 그는 책 제목을 [강제적 조직]으로 정했다. 그러나 현재 자본주의에 참된 빛을 비추고자 했다면, 그는 당연 독점적 단체들로의 강제적 에속에 관해 써야 했다. 적어도 독점적 단체들이 오늘날 의존하는 "조직"을 위한 최근의 문명화 된 강압적 수단 목록을 일렬로 나열해 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1) 원자재 공급계약 중단,

(2) "노사협정"을 통한 노동 공급 중단 (여러 자본가와 노조 사이의 협정으로 자기 노조원들은 오직 카르텔 기업에서만 일하도록 강제하는 것.),

(3) 출하 중단(:중간재를 넘겨받아야 되는 하청들에게 치명적),

(4) 거래점 폐쇄,

(5) 구매자와의 협정을 통해 구매자가 반드시 카르텔과 거래하도록 보증하는 방법(:대형 백화점이나 쇼핑몰 등 거대 B2C 채널들과 협정을 맺어 판로를 막는 행위),

(6) 체계적 가격 인하("외부"회사들, 다시 말해 독점 카르텔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회사들을 말라 죽이는 방법. 치킨게임)

(7) 신용거래 중단,

(8) 불매 행위.

p.32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더 이상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자유경쟁, 기술적 우위의 기업과 후발주자의 자유경쟁이 아니다. 우리는 카르텔에 복종하지 않는 기업들을 교살하는 독점자들을 본다. 다음 글을 통해 이 과정이 어떻게 한 부르주아 경제학자의 머릿속에 나타나는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