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소월! 정소월!"
 총장실로 향하는 길에 수백여명의 인파가 나를 반겼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승리했다는 것에 흥분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석방되었다는 것은 결국 정부가 고개를 숙였다는 것이였다.
 그들이 생각하기엔 말이다.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불과 몇시간 전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몇시간 전, 나는 지하의 어두운 방에서 의자에 앉혀져 두 팔을 뒤로 묶인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의 행동은 나를 고문하는 자의 두 눈을 바라볼까 두려운 공포심과, 그에게 굴복한다는 두가지 의미를 내포했다.
 그는 내 턱을 잡고 고개를 들어 두 눈을 마주치게 하더니, 히죽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일 하나 합시다. 이번엔 반공 연설이 아니고, 좀 더 중요한거."
 그러더니 그는 탁자 위에 새 옷과 권총 한 정을 올려두더니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이거 입고, 대구대학교로 가요. 그리고.. 대충 지도부랑 독대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든 다음에.."
 그는 손으로 총모양을 만든 뒤 총을 쏘는 흉내를 내고 말했다.
 "탕,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그러면서 그는 시큰둥하게 말을 덧붙였다.
 "이번에 성공하시면, 누가 압니까? 옆방의 장석현이 맞는 약물 주사의 농도가 줄어들 수도 있고, 당신이 당하고 있는 고문의 강도가 줄어들 수도 있고. 오히려 이득 아닙니까?"

 앳된 얼굴의 전공투 회장은 애써 예의를 갖추려는 듯 했으나, 그의 표정에는 흥분이 남아 있었다.
 회장도 자신의 이 혁명이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회장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정소월 대표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헌법 109조가 폐지되면 다시 대한공산당도 창당할 수 있고,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모진 고문도 보상 받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나에 의해.
 나는 그에게 형식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그는 나를 믿는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대표님, 이제 모든 일은 혁명 전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대한공산당의 이름 하에 황가를 무찔러내고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기쁘지 않으십니까?"
 그러다 그는, 자신이 흥분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대표님, 지금 대표님을 보니 외로움이 가득해보이시는데, 그렇지 않으십니까?"
 그의 말에 나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무의식적으로, 나의 어떤 모습에서 이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냈는지 찾아내고 숨기려 애를 썼다.
 그는 나의 마음을 아는지, 순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대표님은 혼자가 아닙니다. 대표님은 자신을 역사상 최악의 인간으로 평가할지 모르지만, 저는 대표님이 스스로를 그렇게 평가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는 진지한 표정을 짓고, 나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
 "저는 적어도, 사람은 자기 자신의 편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설령 누군가 이기적이라고 비판할지라도, 세상 사람 모두가 나에게 등을 돌릴 때, 언제나 내 편에 서 줄 내 자신이 있다는건 좋은 일이 아닐까요?"
 그러고나서 그는 자신의 말로 인해 무거워진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또.. 대표님 편에는 저희 전공투가 있습니다. 언제든지 의지하셔도 됩니다."
 젊은 청년으로서의 패기로운 말에, 나는 웃음을 짓기는 커녕, 오히려 오랜만에 받아본 위로에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맺혀 시야가 흐려졌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내 얼굴을 본 회장은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나에게 다가와 눈물을 닦으려했다.
 나는, 아랫 입술을 깨물고 품에서 권총을 꺼내 그의 배에 가져다댔다.
 그가 무슨 일인지 파악하지도 못하고 있을 때, 나는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무릎에 떨어졌음을 느끼며 속삭였다.
 "미안해요.. 개인적인 악감정은 없어요, 그냥.. 제가 이기적인거에요.. 미안해요."
 그 직후,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총성이 울렸고, 바깥에선 총소리에 대해 당황한 목소리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가 고함소리와 비명소리로 바뀌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경찰 현장 상황실에 앉아 있는 직원의 목소리는 경쾌했다.
 "물론입니다 처장님! 전공투 회원 전원 체포했습니다. 이제 걱정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네.. 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나를 보고 말했다.
 "이제 갈까요? 친구들도 많아졌고, 또 우린 우리가 해야할 일을 해야죠?"
 나는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다시 비굴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이번에는 다르지 않을까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