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소월은 해산식을 열고 해산된 사회민중당 당사에서 막 나오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녀 옆에서, 장석현 또한 쓸쓸히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할까. 벌써부터 한숨이 나오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화당의 후신인 평화민주당으로 흡수되었다.

비교적 좌측이었던 사람들은 따로 민중의 당을 차려 나갔다.

정소월은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양진만 정부의 사주를 받아 한 거짓 증언은, 당선인이었던 박강현 전 대통령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었고,

평화당에서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민중의 당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민중의 당에 있어 정소월은 자유당의 개였다.

앞서 말한 거짓 증언으로 잠시나마 자유당의 독재 체제를 실현시키는 데 이바지했고,

국정원 요원으로서 공산주의 활동을 탄압한 것은 역시 좋게 볼 수 없던 행위였다.

보수 세력에서는 그녀의 공산주의 테러 전적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녀는 한 마디로, '낙동강 오리알'이었다. 

정소월은 계속 걸어갔다. 

정소월의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석현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누나,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다니...?"

"다른 당으로 들어가서 정치를 계속 할지, 아니면 무소속으로 남아 일을 할 수도 있을 테고."

앞서 말했듯이 정소월을 자의로 받아줄 당은 없어 보였고, 무소속으로 일하기에는 정치적인 기반이 없다시피 했다.

정소월은 한참 동안 생각한 뒤에, 입을 열었다.

"...솔직히 그만두고 싶어."

물론 정소월이 이런 상황을 원치는 않았겠지만, 막상 타의로나마 나가게 되니 후련해졌다.

다시는 정치에 관련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시골로 내려가서 조용한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혹시나 모를 이런 희망 덕에, 정소월은 정계 은퇴를 고심하게 된 것이다.

"...이젠, 지쳤어."

"지쳤다고?"

"더 이상 이런 일을 하고 싶진 않아."

"혹시 모르잖아. 어쩌면.... 정말 어쩌면... 세상이 조금이나마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장석현은 세상이 점차 나아질 거라는 데에 미련을 놓지 못했다.

"...세상은 바뀌지 않아. 아니, 설령... 세상이 바뀐다고 해도... 우리는 그대로겠지."

장석현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어째서인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하지만....."

"가자, 고향으로."

정소월 일행은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이동했다.

몇 분 뒤, 그들은 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두 장의 버스표가 쥐어져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약간의 군것질거리도 몇 개 사 갔다.

"예전엔 이것도 씹는 소리까지 최대한 숨겨서 먹어야 했는데."

장석현이 값싼 육포를 힘겹게 뜯으며 말하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쫓기는 입장도 아니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가? 시간 참 빠르네."

"맞다. 아, 누나. 1시간이나 남았으니 그동안 카세트 좀 보러 갈게."

그렇게 말하며, 장석현은 가판대로 향했다.

"어.....어...."

장석현이 가고 나서, 정소월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정소월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장석현과 이야기하는 동안, 익숙한 얼굴을 본 것이다.

분명 어디에서 본 것 같은데. 그런 느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얼굴들은 험악한 형상을 한 채, 점점 정소월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정소월은 최대한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으나, 어느덧 50이 넘은 몸은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어떻게든 일어나 겨우 그들 시야를 벗어났다고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어떤 청년이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저, 실례합니다만.... 혹시 근처에 식료품점이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정소월이 청년을 쳐다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평범해 보이는 코트 차림이었지만,

그의 코트 틈 사이로, 그녀가 아주 잘 알면서도, 기억하기 싫어 한동안 잊어두었던 심볼이 보였던 것이다.

국정원 심볼이었다.

"정소월의 신병을 확보했다. 7번 출구로 집합."

그 전보와 동시에, 갑자기 여러 곳에 잠복해 있던 요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순식간에 정소월은 포위되었다.

"정소월씨, 당신을 데려가겠습니다."

"...당신들이 절 잡아갈 건수라도 있나요? 그 건이라면... 이미 사면이 된 지 오래 아니었나요...." 

"실은 조금 전에 사면을 취소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이건 노태우 대통령 각하의 명령입니다."

"아....."

정소월에게는 저항할 힘이 없었다. 

정소월은 순순히 국정원의 인도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손이 묶인 채로 호송차에 실려 국정원 안으로 들어가자, 장석현 역시 그곳에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JSW-1968, JSH-1967. 여기에 불려오신 이유를 짐작하시겠습니까?"

예전에 그를 고문했던 안영환 고문기술자였다.

"아....아직까지도... 멀쩡히 살....악!"

안영환은 장석현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봉으로 그를 내리쳤다.

"조용히 하십시오. 이 이상 떠드는 것은 제가 용납하지 못할 겁니다."

정소월은 벌벌 떨고 있었다. 그녀 옆에는 처량하게 쓰러진 장석현이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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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

정소월의 사면 취소와 민자당 입당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지 상상해서 2차 창작을 써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