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힐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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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유감이군."



내 말을 들은 오랜 친구, 크림힐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말투는 언제나의 그녀처럼 무덤덤했다. 퍽 놀랍지는 않았다. 그녀의 말투는 어릴 적부터 고압적인 면이 섞인 무덤덤함이 핵심이었기에.


하지만, 지금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흥분이 섞여 있었다.


역시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나의 어머니의 묘를 앞에 두고 착잡함을 감출 수 없던 걸까.



"지크프리트 네가 용을 죽이고 손에 넣은 막대한 재보를 노리고 왔다가 대신 죽이고 도망친 건가. 그 막대한 재보를 어디서 모아왔는지는 몰라도, 파프너의 황금은 모두 네가 가질 자격이 있건만."


"욕망에 미친 난쟁이가 변한 거라는 건 헛소문이었지만 말이다. 애초에 암컷이었더군. 거기에, 훔쳐간 것도 없었다."


"호오. 주변 사람들은 전부 여태껏 수컷인 줄로만 알고 있었건만… 암컷이었다는 걸 알려주면 다들 놀라겠군. 그래도 다행이구나. 훔쳐간 것이 없다는 건, 네 어미가 파프너의 황금을 끝까지 숨겨 주었다는 것이니."



파프너. 내 인생 최고의 난적이자, 이 나라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던 최강의 용.


어릴 적부터 친부모를 잃고 현재의 어머니가 키워 주신 나는, 이 파프너를 쓰러뜨릴 검이 되기 위해 길러졌다.


물론, 나도 처음에는 그 운명을 거부했다. 파프너는 그 어떤 용보다도 강한 용이었고, 그때의 나는 누구보다도 나약했다.


하지만, 파프너를 벨 수 있는 유일한 검이라는 예언이 전해지는 검인 노퉁을 뽑을 때 봤던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나서, 그들이 기뻐하는 표정을 보고 나서 깨달았다.


내가 걸어갈 길은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고. 저 사람들의 미소를 지킬 수 있다면, 이 몸을 검 삼아 휘두르는 데에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그렇기에, 나는 영웅으로서의 삶을 받아들였다. 파프너를 죽일 검으로서의 삶을 받아들였다. 그것으로, 사람들이 웃을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미래를 주기 위해.



"그런데, 그렇게 파프너를 죽이자마자 들어오는 것이 누군가가 행한 네 어머니의 죽음이라니. 인간이라는 것도 참 매몰차군. 어릴 적부터 네 근처에 엮이던 여자들은 전부 저주라던가 그런 걸로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했는데, 네 어미도 그 길을 따라가는구나. 뭐, 네 어미와는 달리 그들 중 몇은 살아있다만…"


"오히려 나는 이상하다고 본다만. 그들 입장에서 나는 아무리 낮게 잡더라도 파프너보다 두려울 자일 터인데, 어째서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인가."


"인간이라는 것은 본디 그런 법이다. 너도 그 두렵다던 파프너에게 맞서 승리하지 않았나. 뭐, 너 혼자서 파프너를 쓰러뜨린 것 때문에, 네가 파프너를 쓰러뜨리고 하루 후에 완성된 내 대검도 쓸모없게 되기는 했다만."



"또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냐? 너 그렇게 말하다가 인간으로 위장한 악마 취급받아 죽을 거라고?"



마치 자신이 인간이라는 존재에게서 독립되었다는 것처럼, 인간이라면 본디 그런 법이라고 말하는 크림힐트. 그에 반응하듯, 그녀가 옆에 눕히고 있던 대검이 조금 흔들린 것처럼 보였다.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나는 이게 어릴 적부터 있던 크림힐트의 말버릇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예전부터 고치라며 주의를 주기는 했지만, 효과는 없던 모양이다. 당장 지금도 크림힐트는 자신과 인간이란 존재를 구분하고 있었으니까.



"걱정해 주는 거냐? 걱정하지 마라. 인간에게 죽을 내가 아니다."


"너도 인간이잖아… 아무튼 간에, 조심해라. 그러다가 죽어. 진짜로."


"…알겠다. 주의하도록 하지."



단순히 농담으로 할 말은 아니다. 용이나 악마 같은 고위 마물들은 인간으로 변신하는 능력 정도는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으니까. 크림힐트가 그런 부류라고 오해받지 말라는 법은 없다. 특히, 파프너에게 오랫동안 고통받고 있던 이 나라는 더더욱.


그렇다 보니, 파프너를 쓰러뜨리기 전부터 계속 이런 탈인간적 화법을 고치라고 했는데, 그게 쉽지만은 않았나 보다.


잠시 후, 크림힐트는 술병과 술잔을 꺼내고 술잔에 술을 따라 내게 내주었다.



"들거라. 전별을 고하는 술잔이다."


"그걸 왜 니가 주냐…"


"네가 이런 걸 챙기고 다닐 리가 없잖느냐. 나라도 챙겨야 하지 않겠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크림힐트가 내준 술잔의 술 절반을 어머니의 묘에 붓고, 나머지 절반을 마셨다.



"…그래.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넌 이제 어쩔 거냐."


"나 말이냐?"


"그래. 너 말이다. 이제는 네가 할 일도 없잖나? 너는 파프너를 쓰러뜨리기 위해 길러진 자이고, 너는 그 사명을 이루었다. 나로서는 이제 재보든 뭐든 챙겨서, 어디 안전한 곳으로 피난이나 했으면 한다만. 네 어미도 누군지는 몰라도 대가리가 박살난 상태로 살해당하지 않았나."


"그래, 어머니가 그렇게 잔혹하게… 잠시만, 크림힐트. 방금 뭐라고 했지?"



크림힐트의 말을 들은 순간, 내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그 끔찍한 생각이 진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나는 크림힐트를 향해 되물었다.



"어차피 일도 끝났겠다 어디로 도피라도 하지 않겠냐고 했다."


"아니, 그 다음. 그 다음에."


"네 어미 대가리가 박살났다는 거 말이냐? 너무 가볍게 꺼냈느냐?"


"…아니.


난 네게 어머니의 사인을 밝힌 적이 없어, 크림힐트.


그런데 너는 어째서 그걸 알고 있는 거지?"



…설마.


아니, 그럴 리가 없다. 크림힐트가 그랬을 리 없어.


크림힐트는 그럴 이유부터가 존재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서 크림힐트가―





어머니를 죽인다는 말인가.


하지만, 크림힐트는 그 말을 부정하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큭, 크흑, 크하하하하하하!!"


"크림힐트…?"


"아아, 이건 어쩔 수 없구나. 내 실언이다.


이미 알고 있는 건 숨겼어야 했건만, 어쩔 수 없군.


네 생각이 맞다, 지크프리트.


네놈의 어미를 죽인 것은, 이 크림힐트다."


"…뭐라고?!"



어째서.


어째서 크림힐트가?


어째서 크림힐트가 어머니를 죽였다는 거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무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크림힐트는 어째서, 무엇을 원해서, 어떤 일이 있었기에, 어머니를…



"어처구니없어보이는 표정이군. 그래. 내가 보기에도 어처구니가 없다. 내가 널 위해서 네 어미를 벤 것부터, 이 내가 재보 이외에 마음이 통하는 게 생긴 것까지 말이다!"


"뭐라고? 크림힐트 넌, 그렇게까지 재보를… 재보를…"



크림힐트는 재보를 원하지 않는다. 그 말이 머리를 스쳐나간 순간, 더욱 끔찍하기 그지없는 생각이 나를 덮쳤다.



"…파프너는, 아직 살아 있었나."


"목이 달아나도 살 방법이 있다면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용이라는 종족이다. 설령 그것이, 자신을 완전히 바꾼다는 선택이라 한들 말이다. 뭐, 이 몸도 오랫동안 써온 몸이고, 그렇다 보니 익숙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만."



크림힐트가 파프너였고, 파프너는 크림힐트였다.


그래서 너는 계속해서 그렇게 말했던 건가.


자신이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하며,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은…


모두 네가,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나.


용이라는 종족은 목이 잘리더라도 모종의 방식으로 되살아날 수 있다는 소문은 들었건만,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


크림힐트는 씨익 웃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그래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고? 네가 노퉁을 뽑기 전부터, 계속 말이다."



…처음부터 난, 녀석의 유흥거리였을 뿐이었다는 건가?


하, 참 어처구니없는 진실이군. 파프너를 쓰러뜨리기 위해 길러진 영웅인 내가, 파프너의 유흥거리에 불과했다니…



"…헌데, 이상하더군. 분명 처음에는 유흥거리로 시작했건만, 어째 가면 갈수록 유흥거리로 끝날 거 같지는 않더군. 어느새인가, 너라는 존재가 내 긴 용생에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해 버려서 말이지. 인간의 모습으로 있지 않을 때는 재보가 아니면 너 생각 정도밖에 안 나더군. 이게 인간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건가. 아, 그래. 너에게 접근하려던 하찮은 것들을 저주로 처리하던 것도 자극이었지.


"하찮은 것…? 설마 네놈…"


"뭘, 그 녀석들이 잘못한 거다. 이 나라에서 내 재보나 그에 맞먹는 것을 건드리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이는 없다. 오히려 살려준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최대의 자비를 베풀었건만?"



그 헛소리를 더 들어줄 수 없던 나는 칼집에 꽂아두었던 노퉁을 뽑으려 했지만, 그 순간 크림힐트… 아니, 파프너 역시도 바닥에 내려놓았던 대검을 들어올렸다.



"싸울 셈이냐? 나는 아무래도 좋다만."


"고작 그딴 걸로, 아무 죄 없는 아이들의 몸을 망가뜨리고, 어머니까지…!"


"네 어미는 죽을 만 해서 죽였다만."


"무슨 헛소리를…!"


"아아, 이제 곧 효과가 나타나겠군."



그 순간 온 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지며, 내 의식이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몽혼약이라고 들어는 봤나? 마신 상대를 영원의 잠에 들게 하는 약이라고 하지. 그런 효과를 일으키는 저주가 깃든 약이다만… 네 어미가 만들고 있길래, 괘씸해서 죽였다. 아마 내 재보를 노린 것 같다만, 아무리 그래도 자식에게 그게 할 짓인지. 뭐, 그 정도 저주는 나 정도면 풀 수 있으니 상관없다. 자, 가자꾸나. 나의 집으로. 그 누구도 방해할 자 없는 곳으로―"



말이 끝난 것인지, 끝나지 않았는지도 모른 채로, 내 의식은 그렇게 끊어졌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마지막까지도 크림힐트는 웃고 있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