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마지막 발키리
개념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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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정말이지 끔찍한 계절이다.

세상 어느 지역이 그렇지 않겠냐만은 북구에서의 겨울은 특히 더하다.



바다는 툭하면 얼어붙어 고기잡는 조각배 하나 띄우기 어려워지고, 목초지는 죄 된서리를 맞아 눈물을 머금고 기르던 가축의 수를 줄여야만 한다.

숨만 쉬어도 코가 에이는 추위 탓에 매일 같이 장작을 구해야 하지만 정작 이런 추운 날씨에는 잘 마른 장작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렇다고 독한 술에 의지해 밤을 보내자니 이 또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랄맞은 북구의 날씨로는 술에 들어갈 곡식이나 과일을 구하는 것부터가 난관이고, 만들어진 술을 사들이기에는 애초에 값이 너무 비싼 탓이다.



겨울에는 전쟁 좋아하는 남쪽 나라들도 별다른 일거리를 주지 못하니 더더욱 주머니 사정 궁핍한 북구인들로서는 괴로운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허나, 돈이 없다고 해서 세상 다 끝난 것처럼 비관하는 것은 나약한 현대인들이나 할 법한 발상이다.

마찬가지로 세상 모든 것을 자력갱생으로 해결하겠다는 발상 역시 권력 말고는 쥐뿔도 관심 없는 독재자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고.




추운 날씨 탓에 먹고 살기가 어렵다면 대신 농사 짓고 베 짤 사람을 구하면 아니겠는가?

양은 풀을 뜯고 늑대는 고기를 씹듯 사람 역시 각자 타고난 바에 따라 잘 하는 일을 해야 하는 법이다.


후손들 중 기라성 같은 경제학자들이 많은 것에서 알 수 있다시피, 종족 전체가 거시 경제학에 해박한 바이킹들은 이 이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대충 뇌피셜로 이론 세우고 국가 정책 짜다 말아먹은 불민한 후손들과 달리, 바이킹들은 이론을 실증해보는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론이 현실을 뒤따라야지 현실을 이론에 맞추려다가는 지옥이 펼쳐지기 마련 아니겠는가?


그들의 주신인 오딘의 일화에서 드러나듯, 원래 북구인들이 또 학문에 있어서는 진심인 편이었다.

괜히 노벨상이 북유럽에서 시작된 게 아니다.




아무튼, 그런 연유에 따라 과학적인 바이킹들은 손수 전 세계를 테스트 베드 삼아 ‘바이킹식 무역 이론’ 타당성을 검증해보기로 했다.

표본의 편향을 막기 위해 최대한 방대한 영역에서 데이터를 수집했고, 반복적인 실험으로 오차 범위를 점차 줄여 나갔다.


그러기를 장장 수십 년.




마침내 온 세상을 끝장내 버릴 것만 같은 끔찍한 겨울이 찾아왔을 때, 바이킹들은 비로소 저들의 ‘무역 이론'이 틀리지 않음을 과학적으로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지랄맞은 추위 탓에 쓸 수 있는 목초지와 경작지의 면적은 계속 줄어들었지만, 되려 그들의 삶은 나날이 개선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전직 바이킹인 시구르드가 제 헤픈 씀씀이로 곤궁해진 주머니를 채울 방도로 바이킹식 전통 무역을 제안한 것은 일종의 필연이라 볼 수 있었다.

사람이란 으레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기준으로 세상을 재단하려는 경향이 있었으니 말이다.


바로 그 방법을 통해 가족을 굶주리지 않게 부양해온 시구르드는 그 이상의 방법을 떠올릴 수 없었다.





허나, 그녀의 길동무는 달랐다.

그녀에겐 가족도 없었고, 평생 이 동녘 땅을 떠나볼 일도 없었으며, 시구르드와 공유하는 기억은 최근 반년의 것이 전부였다.



17년 평생을 이곳 동방 청구국에서 살아온 만신 금사희(捨姬)는 이역만리 서역 북녘땅에서 찾아온 제 길동무와 같은 풍경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래서 소녀는 제 고운 이마를 찌푸리며 평소와는 달리 시구르드의 제안에 난색을 표했다.




“그… 아저씨? 제가 아저씨의 무심한 듯 하면서도 막 나가는 반전 매력을 좋아하는 건 맞는데 이건 좀 너무한 거 같지 않아요?”


“?!”



소녀의 완곡한 거절에, 시구르드는 몹시 당황했다.

이미 과거에도 몇 번이나 비슷한 일을 해온 적이 있던 만큼, 이제와서 용돈 벌이를 위한 도적질을 하자는 이야기가 거절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탓이었다.


게다가 반 년 전 처음 산적 토벌을 하며 인연을 트게 된 이후로 줄곧, 두 사람의 바이킹식 무역 상대는 오직 녹림(綠林)과 같은 범죄자들에게만 한정되어 있었다. 

이제 와 사람 죽이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는 말은 영 합리적인 변명이 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연인의 불륜 장면을 포착한 사람처럼 그녀의 길동무에게 해명을 촉구하는 거센 시선을 보냈다.



“흠흠, 아저씨? 아무리 제가 제안을 거절했다고는 해도 배신자를 보는 듯한 그 시선은 너무하지 않나요? 이런 건 침실에서 해주시면 조, 아얏, 아 알았어요. 제대로 사정 설명할 테니까 그만 놔주세요.”



쓸 데 없이 한 마디를 더해서 매를 번 소녀는 그렇게 얼얼한 옆구리를 문지르며 제안을 거절해야만 했던 내막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ㅡ아저씨도 아시겠지만 원래 이곳 동방이 좀 여러모로 빡빡해요. 뭘 하든 관의 허가를 얻지 못하면 별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피를 보거든요. 


아무도 안 지켜서 대체 왜 있나 싶은 법들이 바로 이럴 때 쓰이거든요.”



그 점은 시구르드 역시 잘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당장 저 자신부터가 이곳 동방에서의 첫 3년을 그 동양식 불문율을 지키지 않은 탓에 쫓겨다니던 것으로 허비했었으니까.


심지어 그 이후로도 외국인이랍시고 이리저리 치이기까지 했으니 아직도 관의 허가라고 하면 이부터 갈리는 그녀였다.



허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구르드는 소녀의 설명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반 년 전 그 팔자 한 번 고쳐주겠다며 제멋대로 들러붙은 사람이 바로 눈앞의 소녀였으니까 말이다.


실제로도 소녀와 함께한 이후로 여러 잡다한 검문도 사라지고 되려 산적 토벌 같은 돈벌이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관 때문에 일을 하지 못하게 되디라는 비관은 영 이상하게 들렸다.


 


사희는 그런 시구르드의 의문을 긍정하며 보다 내밀한 사정을 들려주었다.


“맞아요. 확실히 저희는 그간 관의 호의를 사고 있었기 때문에 제멋대로 산적을 토벌하고 요괴 사냥을 벌여도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었어요.


거기에는 저희 실력도 분명 적잖은 영향을 주었겠지만, 그 이상으로 제가 그 지역에서 유명한 만신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지요. 

아무래도 관으로서는 상대가 먼저 굽힌 이상 지역에서 명망과 실력을 두루 갖춘 이와 대립해봐야 손해 밖에 볼 일이 없으니까요.”


은근슬쩍 제 자랑을 끼어 넣은 사희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좀 더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요. 저희가 어제 지나온 마을을 끝으로 관할 지역이 바뀌어 버렸거든요. 물론 저희의 이름값이야 여전하겠다만, 아무래도 영향력에 있어서는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겠지요?


이곳에는 연이 닿은 유력가도, 쌓아둔 재물이나 인망도 없으니까요. 


괜히 눈에 띌 짓을 해봐야 3년 전 아저씨 꼴이나 날 게 뻔하다는 거죠.”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아픈 기억을 자극 당한 시구르드는 작게 신음을 삼켰다.

게다가 소소한 용돈벌이 마저 이제는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하니 더더욱 입맛이 씁쓸했다.



물론 그조차도 외국인이랍시고 덤터기 쓰던 시절에 비하면야 선녀나 다름이 없었지만, 원래 사람은 얻은 것보다 잃은 것에 집착하기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시구르드가 한껏 심각해진 표정으로 입술을 매만지던 바로 그때.



주위를 환기하듯 한 차례 어울리지 않는 헛기침을 한 사희는 마치 연극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소매에서 곱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짜잔! 세상에 절대라는 것은 없는 법이지요. 


이 지역에 연고가 없어서 관의 눈치를 봐야만 한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으로 눈치를 볼 이유를 만들어 주면 되지요.

제가 누굽니까? 바로 전국 각지에 지부를 둔 만신계(契) 내부에서도 손꼽히는 백옥패를 쥔 일등 만신, 금사희 아닌가요. 


그러니 대놓고 산적을 족치거나 하는 일은 어렵더라도… 만신의 본업과 관련 있는 요괴 퇴치라고 하면 좀 다르지 않겠어요?


마침 또 이렇게 본부에서 내려온 업무 지시도 있으니 변명으로 삼기에는 딱 좋네요.”



종이를 펼쳐 든 소녀는 마치 못된 장난을 꾸미고 있는 악동처럼 씨익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그제야 제가 너무 순진했음을 깨달은 시구르드는 고운 두 뺨을 살짝 붉혔다.


명색이 지혜의 신의 대전사가 되어서, 그것도 제 조카뻘이나 될 법한 소녀에게도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이 영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시구르드는 약간의 고민 끝에 소녀의 뒷말을 성공적으로 이어 받을 수 있었다.



“흠흠, 그렇지. 그리고 요괴란 본래 음기가 가득 서린 곳에서 나오기 마련이니 산골짜기나 동굴, 혹은 버려진 진채 같은 곳을 필히 들려야 할 지도 모르겠어. 

계에서 믿고 맡겨준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물론 그러다가 간혹 ‘귀신 들린 사람’과도 만날지 모르겠으나… 그것까지는 관에서 뭐라 하지 못하지 않겠나?”


“그렇죠? 그건 어쩔 수 없는 ‘부수적 피해’니까 말이에요.”



거기까지 말한 두 사람은 그대로 마주 웃었다.

그저 눈빛만 마주봐도 서로의 생각을 알아볼 수 있으니 서로 친밀한 사이를 두고 ‘자신을 안다(知己)’라고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시구르드는 사희의 지시 없이도 다음 여정의 목적지를 알 수 있었다.



“가장 가까운 녹림 산채부터 들리지. 더 늦었다가는… 요괴에게 모조리 살해 당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그렇죠. 너무 늦었다가는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게 될테니 서둘러야겠어요. ‘사람’은 일단 살리고 봐야 하는 일이잖아요?”



물론 그렇게 서둘러 도착한 곳에 사람은 없고 죄 사람 거죽을 뒤집어 쓴 짐승만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렇다면 그녀는 늘 그래왔듯 인간의 적을 구축하면 될 뿐이다. 


동방의 큰 현인 맹자께서도 사람 가죽 뒤집어 쓴 잔적과 필부는 때려 죽여도 마땅하다고 했지 않은가?



괴력만신을 다루는 일개 무당조차도 이토록 현인의 가르침 새기기를 망설이지 않으니, 동방의 문명함이 이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