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마지막 발키리
개념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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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신화나 전설이라 함은 곧, 그 문화를 영위하는 사람들의 무의식의 총체라.


사방 탁 트여 분란 잦던 메소포타미아와는 달리, 사막과 나일강이라는 두 하늘이 내린 선물을 지닌 이집트가 사후 세계에 대해 더 심도 있게 고찰을 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와 다윈에 이어, 다시금 인류의 격을 한 단계 끌어내린 것으로 알려진 독일 사람 프로이트가 인간의 무의식을 분석하며 저들 신화 속 신의 이름을 무의식적으로 붙인 것 역시 이를 방증하는 분명한 근거 중 하나가 될 터였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비단 지중해를 둘러싼 서구 세계의 것만은 아니었다.

서양인들에 비하면 지나칠 정도로 세속적인 동양인들은, 바로 그 세속적인 성향으로 말미암아 저들의 영적 세계를 현실의 색으로 물들이는데 조금의 거리낌이 없었다.


가령 무당들이 쓰는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이라는 주문이 그러했는데, 이를 풀어 설명하면 ‘법(율령)에 따라 조속히 처리를 요청합니다’라는 뜻이 된다는 점에서 관료제적 전통을 당연시 여기는 동양인들의 풍조가 신화적 영역에까지 그대로 녹아들었음을 알 수 있던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만신(萬神)’이라는 여성 무당을 가리키는 말이 무당들 사이의 계급을 가리키는 말로 변질되는 것 역시 일종의 필연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상하의 분별과 이름을 분명히 하는 것(名分)’이 동양식 관료제의 핵심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엄정한 분별 속에서 ‘만신(萬神)’이라는 가장 높은 등급의 칭호를 받은 금사희(捨姬)가 자신의 실력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일종의 필연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아무렴 세상 가장 미천한 천애고아로 태어나 실력 하나로 모두가 우러러 보는 만신의 지위에 올랐으니 어찌 그러지 않을까?

더욱이 한 번 버림받은 적이 있는 그녀로서는 다시는 버림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 줄 실력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인생을 모두 바쳐도 아깝지 않을 소중한 존재를 찾게 된 지금에야 더 말할 것도 없었고.





허나, 그렇게 부단히 자신을 갈고 닦아온 사희라 할지라도 지금의 상황은 영 따라가기 어려웠다.




챙채재챙챙.


눈으로 쫓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강철의 연무가 허공을 수놓는다.

숙련된 댄서의 발 구름처럼 소리는 쉼 없이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하며 공기를 때렸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작고 거친 소녀의 숨소리는 이내 더욱 격렬한 금속의 충격음에 파묻혀 지워졌다.


그렇게 강철의 비명을 반주 삼아 이어지는 15분 간의 격렬한 춤사위.



그 거친 원무가 한바탕 소강 상태에 접어들면, 소녀와 여인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애병을 얽어매며 다음 무대를 위한 막간을 시작했다.




“호오, 범상치 않다고 생각은 했는데 역시 너도 발키리였나? 이거 이 머나먼 동방에서 동향 사람을 만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야.”


“동감이다. 그러니 동포의 정을 살려 이번 일은 불문에 부치고 제 갈길 가는 게 어떻겠나?”



도끼를 쥔 순백의 소녀와 사인검을 쥔 칠흑의 여인은 서로를 향해 싱긋 웃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극적인 협상의 타결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완벽한 협상의 결렬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칠흑의 여인은 대답과 함께 거친 발길질을 내질렀다.



“그건, 어렵겠는 걸? 우리 염라 사장님께서 하루 빨리 범인을 잡아 오라고 보통 성화가 아니시거든.”


“몇 번이고 하는 이야기 같지만 그건 우리가 아니다.”


“그거야 직접 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지. 그러니 잔말 말고 마저 붙자.”




어찌하여 요괴 토벌을 명분 삼아 산적들에게 바이킹식 무역을 선보이려던 그들이, 저승사자와 사생결단을 벌이게 되었는 지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는 시침을 조금 앞으로 당겨볼 필요가 있다.





***




“쓰읍, 이번에도 허탕이네요.”


“그러게 말이다. 설마 하니 살아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줄이야. 이래서야 종일 시체 구경만 하겠구나.”



어느 이름 모를 고개 위에 지어진 텅 빈 산채 안.

무언가 격렬한 난리라도 벌어졌던 듯 온통 피와 진흙, 오물과 뭔지 모를 잔해들로 더럽혀진 길을 따라 걸으며 두 사람은 여상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체를 옆에 두고 태연자약히 이야기를 나누는 그 꼴이 흡사 맹자식 분류법을 실천한 뒤 괜한 자기 변명을 늘어놓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이번만큼은 정말로 그들과 무관한 일이었다.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한 모양인지 누군가 그들보다 먼저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던 것이다.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不忍之心)에 따라 악을 미워하며(羞惡之心) 남을 대신해 악명 쓰기를 두려워 않으니(辭讓之心) 과연 동방의 문명함이 이와 같았다.



물론 정상적인 양심을 지닌 이였다면 그래도 사람이 죽은 이상 은근히 꺼려할 법도 하기는 했다만 애초에 그런 상대였으면 좋다고 바이킹식 약탈 경제를 하러 나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렇기에 양심이란 저울 위 깃털보다도 가벼운 두 사람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지금의 상황에 대한 추리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일단, 시체의 상태로 보건데 요괴나 짐승 따위가 한 일은 아닌 것 같구나. 짐승 무리가 덮쳤다기에는 시체가 지나치게 멀쩡하고, 간혹 보이는 절삭면으로 보아 이빨이나 손톱보다는 도끼나 검에 베인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가갑사들의 짓일까요? 저희도 한창때 도적토벌로 용돈벌이를 쏠쏠하게 했었으니 가능성은 있어 보이는데요.”



일리가 있는 말이긴 했다. 상당히 높은 지능을 지닌 고위 요괴가 아니고서야 이 정도로 인간의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며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한 번에 처리하기에는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정도로 강한 요괴라면 만신 중에서도 손꼽히는 만신인 사희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다.

요괴란 족속들은 강할수록 더더욱 제 요기 감추기를 꺼려하는 경향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소거법으로 가갑사들이 용의선상에 오르는 것도 썩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ㅡ




“허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한 번에 너무 많은 산채가 당했다. 쏠쏠한 공적이 될 법한 녹림 산채를 이토록 많이,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초토화 시키는 일은 관의 입장에서 명백한 손해야. 능력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에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돈이나 연줄이 목적인 가갑사라면 산채에 쌓여진 재물을 탐내지 않을 리가 없는데 창고가 너무 멀쩡하구나. 여러 사람이 드나들며 물자나 전리품을 노획했다기에는 너무 부자연스러워.”



과연, 약탈의 전문가인 전직 바이킹 다운 이야기였다. 

평소에는 영 맹해 보이고 하는 짓도 제법 얼빵한 구석이 없지는 않다만, 또 이런 식으로 본업과 관련된 일이 될 때면 생각 이상으로 날카로워지는 면이 있는 시구르드였다.


그리고 그런 시구르드의 눈에는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보였다.



“게다가, 사람이 죽은 곳 치고는 너무 조용히 하지 않은가? 이곳도 그렇지만 여즉 지나온 3개의 산채 모두 너무나도 조용했어. 시체의 상태로 보아 이들이 죽은 지는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았는데 구천을 떠도는 원혼(怨魂)이 단 하나도 없었단 말일세. 


한낱 짐승조차도 억울하게 죽으면 귀신이 되거나 하여 사람을 괴롭히는데 그 독한 인간이 원귀 하나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 괴이쩍지 않은가?”



본인도 종종 까먹기는 하지만, 시구르드는 엄연히 발키리의 일원이다.

그리고 발키리는 일종의 저승사자이고. 



빡빡한 관료제 테이블에 묶여 있어 박봉으로 부려 먹히는 동양의 저승사자들과는 달리 재량권도 풍부하고 의식주 걱정도 필요없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다만, 둘 모두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는 거다.



그렇기에 시구르드는 사희가 단순한 기분 문제였거니 하고 치부하고 넘어갔던 위화감의 정체를 분명하게 직시할 수 있었다.



“이곳 동방까지 나글파르를 채우고자 하는 헬의 손길이 닿았을리는 없을 테니... 아무래도 자네와 같은 주술사가 개입한 것이 아니겠나? 분명 자네도 호리병 같은 것에 원혼들을 잡아 넣은 적이 있는 것으로 아네만.”



그런 시구르드의 의문에 사희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머릿속에 있는 인명부를 몇 번이고 뒤적여 보아도 이 정도의 대규모 주술을 부릴 수 있는 이 중 용의자가 될 법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네 개 산채를 합쳐 도합 이백 명은 될 법한 대규모의 영혼을, 그것도 살해당해 한껏 흉포해져있을 원귀를 그 어떤 흔적도 없이 잡아 들인다?


이 정도 역량을 지닌 이라면 사희 자신과 같이 일등 만신 중에서도 백옥패를 지닌 이들 뿐일 터인데, 애초에 그럴 만한 이들이 이 근처에 있었으면 그녀가 이 임무를 받았을 리가 없었다.

본거지도 비우고 장기 휴가를 신청한 자신에게 까지 임무가 내려올 정도라면 정말로 사람이 없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머릿속에서 하나하나 선택지를 지워 나가고 있던 사희는 불현듯 등골을 타고 내달리는 오싹함을 느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고위 요괴도, 백옥패를 받은 일급 만신이 아니여도 비슷한 일을 벌일 수 있던 존재가 하나 더 있던 것이다.


모든 산자들의 적이자 망자들의 천적인 저승사자.



아까부터 은근히 거슬리는 기운이 하나 느껴지곤 했었는데, 다시 의식하고 보니 더더욱 분명해졌다.
그간 같이 다니며 익숙해진 데다가 좋아하는 사람의 것이라 억지로 익숙해지려 했던 서늘한 죽음의 기운.

그 기운이 점점 더 진득하게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급히 눈을 뜬 사희는 자신이 깨달은 바를 시구르드에게 전하려 했다.

그러나, 사희의 입술보다도 시구르드의 입술이 더욱 빠랐다.



“실례하지.”


별안간 긴장으로 잔뜩 얼굴을 굳힌 시구르드가 그녀를 향해 안겨 들었다.

아이 특유의 보드라운 감촉과 달콤한 내음이 폭력적으로 사희를 덮쳤다.

그 놀라운 경험 앞에서 사희는 방금까지 하려던 말도 잊고 멍청히 입을 벌렸다.



그러나 사희가 그 이상의 주접을 부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꿈에서 그리던 상황을 만끽해야 한다는 본능에 취하기 직전, 방금 전까지 그녀가 서 있던 자리를 향해 묵직한 칼날이 날아 들며 순간 목숨이 위태로웠음을 인지했던 것이다.


사희는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어라? 이걸 피했네? 아가씨, 보기와는 달리 제법이구나.”


한편, 그런 그녀와는 대조적으로 방금 전 묵직한 검이 날아왔던 방향으로부터 경쾌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박수 소리의 주인은 반쯤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지나 모습을 드러낸 칠흑의 여인이었다.


금발의 머리카락을 제외한 복장의 모든 부분을 검정, 그 한 가지로 통일한 여인은 물러선 두 소녀들을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이런 젠장.”



그 미소를 본 사희는 저도 모르는 새 욕짓거리를 내뱉고 말았다.

이승에서 저승사자가 미소를 짓는다는 뜻은 앞으로 좆같은 일이 일어나리는 예언과도 같다는 스승의 옛 조언이 떠올랐던 탓이다.


그리고 그런 스승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여인은 곧장 허리춤에서 사인검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뽑아든 검을 따라 아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농도의 스산한 죽음의 기운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아하, 어쩐지 요 근래 이 주변에서 괴상한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했더니 아무래도 범인이 너희들이었던 모양이구나. 무당에 음… 뭔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기분 나쁠 정도로 나랑 비슷한 기운을 가진 녀석이 하나라. 이번에도 내기는 염라의 승리였던 모양이네.”



영문 모를 이야기를 중얼거리는 여인을 향해 사희는 우선 대화를 시도해보려 하였다.

원래 사람이란, 무언가 자신이 불리해진 듯 싶을 때 우선 이성과 합리에 기반한 대화를 요청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희와는 달리 전혀 기죽지 않은 시구르드는 한 손으로 그런 사희를 만류했다.



“아무래도, 머리색을 보아하니 저 놈은 나와 같은 부류인 듯 싶구나. 그렇다면 한 번 머리의 김을 빼주기 전까지는 무슨 말을 해도 들어먹지 않을 게다. 그러니 잠시 물러나 있거라.”



사희는 저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소녀를 보며, 역설적이게도 저보다도 훨씬 거대한 이로부터 보호받는 듯한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평소에는 영 엉뚱하고 덜렁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터라 여러모로 장난치고 싶어지는 귀여운 여동생 같이 느껴지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언제나 듬직하게 행동하는 의지가 되는 언니.


그 양가적인 매력에 반하여 벌써 반 년 째 여정을 함께하고 있음을 재차 떠올리며, 소녀는 얌전히 시구르드의 말을 따랐다.



그리고 그렇게 소녀가 멀찌감치 떨어지자 시구르드는 저의 애병을 단단히 움켜쥔 뒤 상대를 향해 감사를 표했다.



“기다려줘서 고맙군. 이제부터는 나, 올라프의 자손 시구르드가 그대를 상대하도록 하지. 무릇 전사라면 때로는 말이 아닌 힘으로 각자의 정의를 설복시켜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그거 참, 듣던 중에 그리운 이야기네. 어쩐지 우리 꽤 잘 맞을 거 같지 않아?”



소녀와 여인은 빙그레 마주 웃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희는 어쩐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



그리고 시점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