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탄핵전후사의 인식>



 

12. 언론 통제, 시민군의 분열.


자발적으로 조직된 시민군이 수도권과 영호남을 들쑤시는 계엄군을 주요도시에서 몰아내고 있었지만, 그 외 모든 상황은 비관적이었다. 서울에서는 '촛불시민연대'가 이끄는 시민군이 절망적인 저항을 이어가는 가운데 광주에서는 야당 중심의 '임시 의회'가, 경남에서는 '노동자-병사 평의회'가 궐기했지만 이들을 아우를 지도부가 없었다.

 

 

<사진 준비중1>

 

<무장한 노동전선 소속의 시민군들이 경남 각지에서 계엄쿠데타에 맞선 혁명을 촉구하는 삐라를 뿌리고 다녔다. 다양한 좌익 사상으로 이루어진 평의회 지도부의 단결은 어려운 과제였다.>

 

 

노동자-병사 평의회는 임시의회 지지를 천명했지만 노동자들은 시시때때로 노동조합과 각을 세웠던 민주당 중심의 임시의회를 신뢰하지 않았다. 민주당의 지도부 또한 노동자 평의회가 노동전선 등의 극좌적인 사회주의자들로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했다. 3월 13일, 노동자-병사 평의회가 임시의회에 대표단을 보냈지만, 임시의회는 이들의 대표단을 실제 정치세력이 아닌 단지 노동조합의 연대체로만 취급했다. 그렇다고 임시의회가 경남 지역을 행정적으로 컨트롤할 힘이 있는것도 아니었다. 13일 내내 이루어진 토론과 회의 끝에 임시의회는 노동정의당의 목포 지역구 의원, 김소하를 노동자-병사 평의회의 의회 내 대표로 인정했다. 그러나 평의회가 임시의회에서 가진 발언력은 제한적일수밖에 없었다. 141명의 임시의회 의원 중 겨우 6명만이 노동정의당 의원이었고, 이들에 동조한 통일민중당의 의원도 2명 뿐이었다. 이렇게 두 세력은 끝내 단일한 협력체를 만들 수 없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12일 밤, 남한 내 대부분의 대중매체, SNS가 끊겼다. 방송사는 이미 11일 8시부터 들이닥친 계엄군에 인해 장악되어 계엄 협조방송만을 송출하고 있었다. LG, SK등의 통신사는 계엄이 시작되자마자 협조적인 자세를 취했지만, KT에서는 노조가 바리케이트를 치고 저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포털 사이트 중 NAVER(2000년도~2030년까지 포털사이트 이용의 대부분을 차지했다)와 라인이 가장 먼저 셧다운 되었고, 유튜브, 구글의 영상은 지역 비공개로 전환되었다. 페이스북 한국지사의 반대는 상당히 심각했지만(각주 1)계엄협조관과 보안차장의 오랜 설득 끝에 13일 새벽 1시 경부터 순차적으로 차단되었다. 카카오톡은 가장 나중에 장악된 SNS였다. 카카오톡의 메인서버가 부산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진경님과의 인터뷰)

옛날 부산중앙대로가 있었던 혁명광장, 이제 70년이 되어가는 유서깊은 스타벅스는 불타는 3월의 항쟁, 수많은 희생과 민주주의의 복귀를 고고하게 지켜보아왔다. 이진경 선생님과 나는 일부러 상징적인 장소에서 만났지만, 이진경 선생님은 사실 반독재운동에 열심히 참여한 적이 없었다고 솔찍히 고백했다.

 

그는 1981년생, 혁명 당시 37세로 다음카카오 서버설비팀 과장이었다.

 

필자 : 안녕하십니까 이진경님.

진경 : 안녕하십니까 작가님. 저같은 소시민을 찾아오실 줄 몰랐는데요(작은 웃음)

 

필자 :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3.17 항쟁 당시 카카오톡에 관련하여 짧게 여쭐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당시 상황이 어땠습니까?

 

진경 : 일년 중 메시지 전송량이 가장 많은 연말연시의 트래픽 규모가 평소의 2배 정도인데, 2017년 3월. 그날은 그 수준을 웃도는 규모로 데이터 트래픽이 폭증했습니다. 서버에 오류가 발생했고 복구하는 데에도 시간이 한세월이었습니다.

 

필자 : 그랬군요.

 

진경 : 카카오의 경우 부산을 중심으로 해서 전국 각지에 위치한 IDC업체로부터 클라우드 데이터센터 설비를 임대해 카카오톡을 서비스하고 있는데요, 여러 곳에 데이터를 분산 저장해 일부 지역의 데이터센터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서비스를 지속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곳은 부산 IDC였지요.

 

필자 : 당시 선생님께서 전산을 복구하시는 동안 대부분의 타 SNS들은 계엄협조관들에게 점거되었는데 알고계셨었습니까?

 

진경 : 아마 그날 주말잔업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퇴근전까지는 몰랐을겁니다. 전날에 박 대통령이 퇴진했고 다들 집회가 자주열리는데 익숙했으니까요. 거기에 더해 당시 한국인구의 90%는 카톡(각주 2)을 썼습니다. 200만 이상의 집회가 각지에서 열리는게 세달째였고, 각 통신사는 이동중계기까지 이용해서 트래픽을 분산하려고 노력하는중이었습니다. 우리도 바빠서 소식도 못들었죠.

 

필자 : 그럼 언제부터 알게되셨습니까?

 

진경 : 12일 새벽까지도 우린 퇴근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수위아저씨가 이상한사람들이 IDC로 들어오려고 한다고 부산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양복을 입은 사람 다섯이 군인들과 들어오더라고요. 마치 갑자기 정신속의 스위치가 켜지는것같았습니다. 버티칼(당시에는 유리창에 디지털 언락이 없었기에 수동으로 채광을 바꿔야 했다.)을 치니 바깥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남포동 방면으로 수만명이.. 수만명이 싸우고있었는데.... 총이며 곤봉이며... 그 새벽인데

 

 

필자 : 그 후에 어떻게 되었죠?

 

진경 : 저는 정치고 뭐고 아는사람은 아니었지만 '저사람들에게 서버를 넘기면 안된다.'라고 퍼뜩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민운동에 동조해서라기보단 회사가 큰일이 날거 같았습니다. 그때 같이 야근하던 십여명도 마찬가지였던거 같습니다. 바로 서버실 문을 잠가버리고 자전거 체인으로 묶었어요. 과장인 제가 뛰어나갔죠 "이거는 회사 사업기밀입니다. 못가지고나가요!"

 

필자 : 총을 들고있는 사람들 앞에서요?

 

진경 : 총을 들고있는지 몰랐습니다.(웃음) 객기였던거죠. 직원들이랑 걔내가 실랑이를 한 2~30분정도 벌였는데 그때서야 장교같아보이는 사람 하나가 총을 빼들고 천장을 쏘았습니다. 돌가루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때서야 우리는 깜짝 놀라며 주저앉았습니다. 총을 들이밀며 열쇠를 가지고 오라더군요.

 

우리는 열쇠가 없다고 잡아뗐습니다. 무슨 오기라기보다는 열쇠를 주면 우릴 죽일것 같았거든요. 울며불며 없다고 잡아뗐습니다.

 

필자 : 그 이후 어떻게 됐나요? 직장동료분들은 괜찮으셨습니까?

 

진경 : 한 군인이 개머리판으로 친구를 내리쳤어요. 처음에는 붉은색으로, 이따가는 보라색으로 물들었는데..

 

필자 : 잠시만요. 그게 아니라.

 

진경 : 그 친구를 끌고, 움직이지도 않는 그 친구를 끌고 가는데..

 

필자 : 저.. 힘드시겠지만, 어떻게 살아돌아오셨는지 여쭐 수 있을까요?

 

진경 : ....한 사람이 살풍경한 현관을 열어재끼고 들어왔습니다. 머리엔 푸른 띠를 매고, 검은 조끼를 입고, 한 손에는 소총을 쥐고있었습니다. 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무슨 상황인지 파악한 듯 싶었습니다. 그는 뛰어 도망쳤고, 병사는 반사적으로 그에게 총을 쏘았습니다. 하지만 맞지 않았죠. 그분이 죽지 않고 도망간것이 끝이었습니다. 몇분도 채 되지 않아서 그분이 사람들을 더 데려왔는데.... 다들 총으로 무장하고있었습니다. 진한 경상도사투리가 들려왔습니다. "다 총 내리라!! 다 뒤지기싫으면 빨랑 내리라!!"

 

통설과 다르게 모든 SNS가 통제된것은 아니었고, 전국민의 연락이 감시당했던것은 아니었다. 계엄사와 쿠데타 세력은 '문화계, 정치계 블랙리스트'라고 불리우는 수만명의 연락처를 사찰할 수 있었지만, 혼란스러운 당시의 상황속에서 계엄사령부가 바로 5000만이 넘던 당시의 인구 전체를 사찰할수는 없었다. 또한 진보정당, 노동조합 등 대부분의 좌익 세력들은 사찰이 불가능한 Telegram을 주로 사용했기때문에 예상 외로 타격은 적었다.

 

 

<사진 준비중2>

 

<영남대학병원이 시민군 부상자를 수용하자 군경은 대학병원에 들이닥쳤다. 끌려간 부상자들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불안과 공포는 시민들의 봉기를 어수선하게 만들고 약화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열린 광장과 정당한 시민들의 의견 표현은 '불법'으로 낙인찍힌것만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12일, 서울의 거리에는 또다시 수십만의 시민들이 쏟아져나왔지만 전날 모였던 130만 이상의 절반에 못미쳤다. 총과 피는 여실히 제 목소리를 낸 것이다. 각지에서 계엄을 실시하라고 외치던 극우세력들은 곧 '애국기동단'을 중심으로 백색 테러를 시작했다. 수도권의 야당 사무실과 노조 지부, 시민단체들에 불타는 LPG통이 굴러들어왔고, 광장에 나섰던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그들에게 끌려가 조리돌려졌다.

 

그럼에도 시민군은 단단히 제 자리를 지켰다. 시청, 홍대, 광화문에는 컨테이너박스와 화물트럭들이 바리케이드를 쌓았고, 고립된 시민들에게는 빵과 즉석식품, 식수가 속속들이 들어왔다. 강서구에서는 주민들이 아파트에 조기를 걸었다. 민주주의의 죽음을 뜻하는 조기는 금방 양천, 강남, 송파까지 퍼져나갔고, 계엄군이 주택지구를 돌며 깃발을 꺾어가기 전까지 의연히 걸려있었다.

 

 

 

13. 서울로. 서울로. 공화국을 사수하라!

 

경남지역 대부분의 운송시설과 군수공장이 시민, 노동자들의 손에 들어왔다. 충남의 한국화약, 대우공창에서 사선을 뚫고 노동자들이 탄약을 빼돌려왔다. 공장평의회는 울산과 창원의 상황은 금방 진정되었고 부산의 혼란도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평의회는 계엄에 협조하지 않은 공무원들을 일정부분 복귀시켰고, 행정은 노동자들과 병사들에게 귀속되어갔다. 각 구청에 사망신고가 쏟아졌다. 부산에서만 230여명의 시민들과 80여명의 군인들이 죽었다

 

보수의 성지 대구는 12일경 대부분 계엄군의 통제하로 들어왔다. 당시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경남의 평의회는 대구의 시민들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대구의 철도노동자들과 탄핵에 찬성하는 시민 수백명은 12일 새벽 도시가 장악되는 마지막 순간 목숨을 바쳐 동대구역의 철로를 끊어놓았다. 이들은 곧 팔공산 인근으로 끌려가 처형당했다. (7공청문회 보고서 481p. 발췌) 그러나 이들의 고귀한 희생은 수기사의 진격을 수 시간 지체시켰고, 울산의 노동자들이 부산을 탈환하고 무장을 갖출 소중한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평의회 내부의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UN과 미국, 국제사법재판부에 진정서를 보내려고 애를 쓰고 있던 임시의회와 다르게 경남의 좌익세력들은 적극적 항전파와 방위파로 나뉘었다. 이른바 '노동전선'이라고 불리는 극좌 마르크스주의 PD계열의 현장 노동자들은 서울에 포위된 민중을 해방시켜야한다고 열띤 주장을 벌였다. 상대적으로 우익에 위치했던 진해의 해군들도 서울로 진격해 정부를 재건하자고 주장했다. 반대로 경남의 시민단체들과 NL계열은 먼저 경남을 안정화하기를 촉구하며 대립했다.

 

평의회 내부에 지도자격이던 금속노조의 김호균 위원장과 노동정의당 노이찬 의원은 신중했다. 이들또한 PD계파에 속했지만, 얼마나 많은 군부대와 지방자치단체가 쿠데타군에 가담했는지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투를 벌이는 도박을 감당할 수 없었다. 평의회 지도부는 먼저 싸울 수 있는 시민들과 병사들을 파악하자는 제안을 했다. 항전파와 방위파 모두 이 제안에 긍정했다. 평의회는 부산, 울산, 마산, 창원, 진해 다섯곳에 싸울수 있는 노동조합원들을 결집했는데 13~14일간 더 많은 노동자들과 탈영병들이 평의회에 가담했다. 정성연 중사를 포함한 수병들과 계엄군에 참가하기를 거부한 향토사단의 육군병사들이 무기를 분배했다.

 

 

 

평의회가 남긴 기록에는 다섯 도시에 8만 2천 497명의 노동자들과 병사들이 의용군에 참가했다고 적혀있었다.(울산 찬가95p.) 하지만 실제로 자원입대한 인원 외에도 각지에서 모인 시민들의 숫자는 더욱 많았다. 계엄군의 진압 이후 경남지역에서 의용군에 참가한것으로 파악돠 인원은 약 14~16만명으로 추산되었다.(후에 이들 대부분은 살해당하거나 사회적 경제적으로 많은 고초를 겪었다.) 각지의 의용군은 특색도, 구성도 모두 달랐다. 울산에서는 극좌적 노동자들이 의용군의 실권을 잡았으며, 이들은 그중 가장 큰 건설노조의 정파 이름을 따 '노동전선'이라고 불렸다. 부산에서는 분노한 일반 시민들과 인권단체들을 중심으로 '민주주의를 지키는 시민의용군', 줄여서 '시민의용군'이 창립되었다. 평의회의 지도부가 모였던 창원에는 가장 큰규모의 인원이 모였다, 잠시동안의 논쟁을 거쳐 창원의 지도부는 6공화국의 민주주의를 사수하고 시민, 노동자들을 지킬 '민주여단'의 창립을 공표했다. 마산과 진해에 진입한 수병들은 단순하게 '자유 해군'이라고 스스로를 명명했다.

 

각지에서 모인 엄청난 시민군의 규모는 경남의 시민들뿐 아니라 평의회 지도부에게도 용기를 주었다. 또한 서울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소식은 지금 당장 싸우러가야한다는 당위를 만들어주었다.

 

시민군의 지도부는 결단을 내렸다. 창원 시청에 모인 시민들과 의용군 앞에서 노이찬 의원이 출전 연설을 벌였다.

 

'두렵습니다. 너무도 많은 것들이 우리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하지만. 한때의 삶이나 승패를 넘어선 대의가, 민주주의라는 그 숭고한 이상이 저 너머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용기를 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힘을 내어 사선으로 전진합니다. 지금 우리가 흘릴 피 한방울이 아름답게 꽃 피울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노이찬 평전, 32p.)

 

환호도, 박수갈채도 없었다. 오직 굳은 결의와 정적만이 그 연설의 울림을 온 노동자, 시민들의 마음에 퍼트렸다.

 

 

 

<사진 준비중3>

 

<사진 준비중4>

 

<트랙터, 트럭 공장을 장악한 경남의 노동자와 시민군들은 공화제를 사수하기 위한 죽음의 행진을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결연하게 깃발을 걸었다. 트랙터와 트럭에는 탄약과 기관총들이, '민주공화국을 사수하라' '박대통령 퇴진하라'라는 플랑카드가 걸렸다.

 

각각의 시민군은 자신들이 원래 속해있거나 지지하던 노동조합과 정당, 단체의 색에 맞춘 머리띠와 팔끈을 찼다, 공장에서 찍혀나오던 트럭과 차량, 군수품들은 모두 노동자들의 통제하에 들어가 필요한 곳에 분배되었고, 식당 주인들과 주유소 사장들은 시민군이 지나가는 길에서 기다리다가 석유, 술병을 모아다 나누어주었다. '가서 그 깡패놈들 다 때리부시고와라!'라는 환호가 이어졌다.

 

각지의 농민회는 시민군들에게 군경이 장악한 고속도로를 피해 움직일수 있는 샛길을 짚어주었다. 가장 북쪽에서 봉기한 노동전선의 붉은 깃발이 선두에 섰다.

 

 

14 '국지전'

 

지금은 장년층이 된 2010년대생들은 '국지전'이라는 영화를 대부분 보았을것이다. 2017년 초중순에 걸쳐 있었던 북한의 공격 이후 겨울정권은 다양한 방식으로 반공 영화를 홍보했다. 하지만 그중에 가장 수작으로 평가된 작품은 단연 '국지전'이었다. 일반적으로 당시의 GOP 병사들을 영웅화하던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국지전'은 겨우 20대 대학생, 고졸이던 사병들이 '영웅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이후 그들의 삶을 좀먹은 전쟁에서 어떻게 사람을 죽여야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국지전'으로 인한 반전 열풍이 불던 2022년 당시 정부는 곧 각지 상영관을 폐쇄했지만, 필름과 불법다운로드는 아름아름 남아 각 대학가를 떠돌았다. '국지전'의 네 분대원들은 결국 전차를 지키다 모두 죽었지만, 실제로 2중대의 박격포병들 대부분은 살아남았다. 서슬 퍼런 겨울 공화국의 시대, 김우현 감독은 체제가 허락한 틀 안에서 최대한의 반전과 인간애의 상실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김우현 감독을 만나 당시 인터뷰했던 52전차여단 2중대의 인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김우현 : 우리는 촬영을 하기 위해 철저히 '반공영화'로 위장해야했습니다. 플롯도 공개본과 감독판으로 나누어서 조심스럽게 촬영했죠. 가장 어려웠던건 참전 용사들과의 인터뷰였습니다.

 

필자 : 용사분들은 지금 잘 살고계신가요?

 

김우현 : 당시 전차소대에서 18명중 4명이 전사했다고 합니다. 나머지 14명 중 두명도 이후 계속되는 내전에서 시민군에게 죽었고요. 사실 시민군들과의 싸움을 다룬 영화를 찍고싶었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어쩔 수 없었죠.

 

필자 : 그분들의 군사정부에 대한 의견은 어땠습니까?

 

김우현 : 그분들은 무당이 대통령을 조정했다는 사실도 안믿었습니다. 정확히는 국지전 이후 자신들의 희생이 군사독재를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싶어하지 않으셨습니다.

 

북한의 중앙군사위원회는 12일경부터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기 시작했다. 남한에서 일련의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으며, 이를 위해서 휴전선 내의 공진지대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북한 장성들에게 기회로 비추어졌다. 소격렬비도에는 대대급의 인민군 병력이 상륙을 시도했으며, 일부 저격여단은 휴전선을 돌파하여 양구로 향했다. 12일부터 13일은 계엄세력이 가장 취약했던 이틀이었다. 12일에는 경남 전역이 좌익세력에게 장악당했고 13일에는 70년만에 최초로 북한 정규군이 남한 영토에 발을 붙였다.

 

 

<개성-문산 전선의 격전지였던 덕수저수지 인근의 지도>

 

김우현 : 계엄세력은 이 위기를 침착하게 기회로 돌렸습니다. 미국은 대규모 참전을 막기 위해서라도 국군에 협조해야했고, 외부의 위기는 내부의 시민세력을 종북좌파로 몰아세우기 알맞았습니다. 해군의 혼란은 소격렬비도를 잃게 만들었지만, 인천, 아산의 함대는 서해안을 수비할만큼의 병력은 온존했지요. 한미연합군은 문산읍 내포리와 고잔고지에서 천마전차로 이루어진 적 기갑 부대를 격퇴했습니다.

 

 

 하지만 격퇴와 반격은 달랐습니다. 김포를 위협하는 저격사단을 포위섬멸하기 위해 전진한 52전차여단은 곧 개성 남단의 덕수저수지에서 극렬한 저항을 만났습니다. '잘린 팔이 날아다녔다.' 그분들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그 짧은 몇 십분간 수백명의 피가 덕수 저수지를 붉게 물들였습니다. 남한으로 전진한 북한군은 대가를 치렀습니다. 2만여명으로 추산되는 미 해병대가 모루가 되어 문산-개성축선을 포위했고, 적 병력은 포위섬멸됐습니다.

 

계엄세력에게 있어 개성 덕수저수지 점령은 남쪽의 반란 진압소식보다 훨씬 호재였다. 미군은 대규모 남침에 의해 남한 전역의 혼란에 정치적 개입을 실시할 기회를 잃었고, 군부는 내부의 좌익폭동과 북한의 침공을 막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했다고 대대적인 프레임 씌우기를 마무리지었다. 소격렬비도는 16일에 탈환되었다. 2월 중순부터 준비한 기무사의 비밀작전은 승리였다.

 

'52여단. 전진 한다. 임진강을 넘어

빨갱이 공산당 맞서도. 52여단 막지못해

무한궤도 전차를 타고. 52여단 전진한다

김정은 빨갱이 맞서도 52여단 막지못해

하~하 하하하하

자유 대한 위해서 전우들을 위해서

52여단 전진한다.'

-52여단 북진가-

 

계엄을 지지했던 극우 세력들은 환호했다. 자유대한이 위급할 때, 내부의 중상을 벌였던 이적행위자들은 태극기 부대에 잡혀 거리로 끌려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개성 전역의 국지전이 성공으로 끝나고 전시상황이 지속됨은 곧 계엄세력이 탄력을 받았다는것을 의미했다.

 

김우현 : 군이 항상 경고했던것만큼 북한은 위험한 적이 아니었습니다. 내부에서 썩어문드러지고있던 북한은 이번 패배로 새로운 숙청의 희생양을 찾아야했죠.

 

하지만 무너진것은 북한군뿐만이 아니었다. 강력한 군대, 통제되지 않는 군부세력은 약 한주간의 처절한 국지전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다졌다. 징집병들의 흘리지 않아도 되었을 피를 통해 얻어낸 개성은 앞으로 다가올 내전 승리의 트로피에 불과했다. 이제 군부는 자신들이 지켜야할 시민들에게 본격적으로 그 총부리를 겨누었다.

 

(각주 1) : 페이스북 한국지사의 압수수색은 2017년 초반기의 대규모 IT업계 주가폭락사건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각주 2) : 당시 다음카카오를 흔히 '카톡'이라고 줄여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