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탄핵전후사의 인식>

[창작] <탄핵전후사의 인식> 1장, 강진원 저

 

‘3월의 어느날. 광화문 한가운데 총성이 울렸다. 겨울의 시작이었다.’

 


 

 

<탄핵전후사의 인식>

 

강진원 저.

 

 

2057년 5월, 필자는 삼성병원 장례식장을 찾았다. 고인은 3.17 민주화운동의 생존자이자, 30년대의 기념비적인 총파업을 이끌었던 노동운동의 거물이었다. 필자는 56년 말부터 그를 인터뷰하고 있었으며, 57년 5월 22일, 그가 사망하기 전날까지 그를 만났었다. 그날은 아이러니하게도 남한 헌정사상 최초로 진보정당이 여당이 된 순간이기도 했다.

 

말년의 그는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뇌졸중이었다. 줄기세포 수술을 받아 완치를 기다리고 있긴 했지만, 뇌졸중 환자들이 그렇듯 수술 이후에도 그의 정신은 오락가락했다. 번거롭지만 나는 그의 주변인물들을 하나씩 만나가며 당시 기록을 교차검증해야했다.

 

한국 근현대의 가장 거대한 사건 중 하나였던 '박 대통령 탄핵'과 '기무사령부 친위쿠데타'. 그리고 찾아온 11년간의 군사정권은 21세기의 비극이자 민주주의의 어두운 시기였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상처는 한국 시민들의 마음에 오롯이 남아있다. 어쩌면 이런 르포를 남기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의 망각이 역사의 증인들을 빛바래게 만들기 전에, 그들의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이 내가 키패드를 두드리게 하였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또한 한국 민중, 노동운동사의 슬픈 단면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데에 모쪼록 함께 해주길 바란다.

 

1. 김지훈님과의 인터뷰

2057년 4월 2일.

김지훈 (약력 : 1996년생, 한양대학교 재적, '노동정의당 재건운동사건'으로 2년 복역, 노동정의당 제 26, 27대 국회의원)

 

온전치 않은 정신에도, 그는 입술을 움직이려 애를 썼다. 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알아듣기 어려웠다. 결국 그의 딸이 해석을 위해 동석했다.

 

필자 : 접니다. 다시왔습니다.

지훈 : .....

그는 주름진 얼굴로 미소 지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려 대답을 대신하였다.

필자 : 다시 한번 탄핵 전후를 여쭈려고 왔습니다.

지훈 : 힘든 시절이었지.

필자 : 당시의 민주화 운동의 상황은 어떠하였습니까?

지훈 : 탄핵 2, 3년새로 많은게 어그러졌어. 비상계엄의 확대.... 고용 유연화. 산재사고. 김용균 이야기를 빼 놓을수 없지. 김용균은...

 

필자 : 아... 그 이야기는 교과서에도 많이 실려있습니다. 혹시 다른 이야기를 부탁드릴수 있을까요?

 

지훈 : 장갑차가, 전차가 통인동 골목으로 들어왔어. 나는 난사하는 기관총 소리를 들었지.

 

필자 : 그게 몇년도 였죠?

 

지훈 : 기관총 소리를 들었어. 상헌이형... 상헌이형이...

 

지훈의 딸 : 오늘은 이정도만 해요. 아빠 상태가 안좋으셔서.

 

지훈 : 통인동에서 광화문 광장으로 뛰어가는 총소리들을.. 옥상 위에 총부리들을...

 

 

 

2. 이도준 님과의 인터뷰

2057년 5월 30일

이도준 (약력 : 1998년생, 국민대학교 졸업, '노동정의당 내란음모사건'으로 10개월 복역 제 16기 민선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노동정의당 구의원 역임)

 

마석의 모란공원에서 필자는 이도준씨를 만났다. 현재 그는 '3.17 기념재단'의 이사로 일하고 있다. 모란공원에서 그는 추모객들에게 열사들의 삶을 설명하는 일종의 큐레이터를 하고 있었다.

 

필자 :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이도준 : 아 그래. 어서오세요. 이번에는 무슨 질문을 하려고?

필자 : 선생님께서 겪은, 혹은 보고 들으신 촛불 혁명에 대해서 듣고싶습니다.

 

이 선생은 담배를 하나 물고는 깊게 들이마셨다. 재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그는 담배를 한 묘역의 향대에 꽂아넣었다.

 

이도준 : 새내기로 입학한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었어, 이미 수능은 끝났으니 광란의 밤낮을 보내고 있었었지, 롤 하느라 밤을 새기도 했고만취한 채로 길가에 자빠져 잔 적도 있었지.

 

필자 : 수능 이후에 촛불 혁명에는 어떻게 알게 되시고 어떻게 참여하신겁니까?

 

이 선생은 담뱃갑에서 또 한개비를 꺼냈다.

 

이도준 : 어떻게 알았냐고? 이미 10월부터 온 티비와 뉴스, SNS에 탄핵 관련 소식이 쫙 돌고있었지요, 아무리 세상에 귀 닫고 사는 고3이라도 당연히 알 수밖에 없었지. 좀 성숙한 애들은 수능이 끝나자 마자 11월 말부터 광화문으로 뛰어나가기도 했어.

 

필자 : 혁명에 참가하는게 두려운 분위기는 아니었나봅니다?

 

이도준 : 초기에는. 초기에는 그랬지.

 

그가 담배를 한대 더 꺼냈다. 그는 먼저 꺼낸 한 개비에 불을 붙이고 그 잔불을 다음 개비에 옮겨붙였다. 그의 담배는 김지훈의 묘역 앞에 차곡차곡 쌓였다.

 

이도준 : 100만, 200만. 사람들이 몰려들었어. 그땐 그걸 '혁명'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어. '문화제'라고 했었지. 시민들은 기타와 소주, 악기를 가지고 와서 거리를 밤새도록 물들였어.

 

이도준 : 내 대학 선배들은(그는 미대생이었다.) 벌써 내가 입학하기 몇개월 전부터 촛불 문화제에 참석하고 있었어. 대부분이 '비상 출구'라고 하는 노동자들에게 봉사활동을 하는 동아리 소속이었는데, 나와 17학번 새내기들도 자연스럽게 집회에 같이나가게 됐지. 이미 OT부터 새내기 엠티까지 몇번씩 만나면서 들었으니까 말이야.

 

필자 : 당시 대학생들은 대부분이 진보적이었던건가요?

 

이도준 : 아니오. 아니야. 당시에 탄핵 촛불집회는 딱히 진보적이라고 가는곳이 아니었어. 그냥 정치에 관심없는 사람들도 모였지. 우리가 무당한테 잡혀살고 있었다니까 분했던 거야. 하튼 초기에는. 초기에는 딱히 정치적이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참가했지.

 

필자 : '초기'라는게 정확히 언제쯤까지인지 알 수 있을까요?

 

이도준 : 탱크가 광화문으로 몰려오기 전까지였지.

 

 

 

3. 이XX씨와의 인터뷰

2056년 12월 5일.

이XX(약력 : 1996년생, 동국대학교 졸업, 3.17항쟁 당시 30기계화사단 91여단 소속)

 

이XX씨는 2027년의 '7공청문회'에서 내부고발자로 나선 몇 안되는 군인중 한명이었다. 그가 속했던 30 기계화사단은 '서울 포위'의 선봉에 선 부대중 하나였다. 그는 이 고발로 인해 여러 번 신변의 위협을 받았다.

 

XX : 3월 6일부터 전투대기에 들어갔습니다. TV도 싸지방도 사용 못하는 상황이라 동기들도 화를 삭히는 상황이었던것 같습니다. 장교와 부사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며칠 뒤 영내대기가 떨어지고 장교들 스마트폰도 압수당했습니다.

 

필자 : 이상하단 점을 못느끼셨나요?

 

XX : 당연히 이상했습니다. 메이저한 훈련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훈련 대기'라고만 계속 말했습니다. 소대장님도 무슨일인지 모른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장갑차에 치장물자를 적재했다가 다시 전창에 집어넣다가를 반복했었습니다. 게다가 훈련이라면 휴가인원을 복귀시킬텐데 '훈련 기간'중 복귀하는 말년들한테 그냥 휴가를 연장시키기도 했습니다.

 

필자 : 바깥의 상황은 어땠는지 아십니까?

 

XX : 2월까지는 '외출외박시 데모 따라나가지 마라.' '싸지방에서 정치활동 관련한 내용 적지 마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대충 정치를 모르는 청년들도 시민들이 데모하러 다녀서 난리라는 정도랑 최순실 정도는 알았습니다. 모를 수가 없었지요.

 

필자 : 30사단은 언제 배치되었습니까?

 

XX : 저희 사단은 청와대 정문과 광화문까지 전진하는게 목표였습니다. 우리 중대 장갑차 조종수들은 핸들을 잡고 자유로까지 운전해 갈때까지도 목표가 광화문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자유로와 북한산길쪽은 일반적 훈련때에도 자주 장갑차가 기동하는 곳이라 그랬던거 같습니다.

 

필자 : 그럼 XX님은 언제쯤부터 이게 '훈련'이 아님을 알게되었나요.

 

XX : 트럭에 실탄을 적재했을 때였습니다.

 

 

4. 3월 10일. 운명의 그날.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 앞은 축제의 장이었다. 수십만의 시민들이 전국 각지에 모인 스크린 앞에서 이미정 대법관의 탄핵 선언문을 들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모두가 탄핵에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극우 세력들과 퇴역군인단체들은 탄핵 선언을 반대하며 서울 사내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3월 10일 금요일 오후에만 2명이 폭동에 휘말려 사망했으며 수백명의 시민과 경찰들이 부상당했다. 탈취된 경찰버스가 광장에 선 앰프를 들이박으며 떨어져 사람들을 덮치기도 하였다. (<한국사학회집> 7공화국사. 48p 발췌) 탄핵반대투쟁본부라고 불리는 탄핵 반대세력들은 그날 바로 철야집회를 선언하고 다음날인 토요일에 대규모 궐기대회를 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같은날인 토요일, 진보정당, 시민단체, 노동조합들의 연합인 '박 대통령 퇴진 국민행동'의 20차 촛불집회가 예고되어있었다. 이미 여러번의 맞불집회가 열린 경력이 있었고, 스무번의 집회 중에서 큰 충돌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국민행동'측은 탄핵 가결에 대한 일종의 축하대회로써 11일의 집회를 준비하였다.

 

 

한국 민주주의의 축제가 되었어야 했던 2017년 3월 11일. 그날은 11년간 지속될 '겨울 공화국'의 시발점으로 기록되고 말았다.

 

 

 

 

- 출판사 : 이론과 실천 -




원작자 : 이론과실천

갤로그 : https://gallog.dcinside.com/formica0923


<탄핵전후사의 인식>은 대한민국 촛불시위 당시를 배경으로 하는 현대 대체역사 소설입니다.

제목에서부터 유추할 수 있듯,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모방한 제목으로 작가의 사상적인 면이 잘 드러나 있는 소설입니다.


본래는 하인리히 뵐 갤러리에 원본이 존재했으나 작가가 연중함에 따라 삭제되었고, 인터넷엔 초반 5편만 자료가 존재했었습니다.

나머지 전개의 부분부분은 뵐갤의 패러디 소설로 남아있었고, 5화 이후에 내용에 대해선 알 수 없었죠.


하지만, 이젠 아닐겁니다. 본 소설은 14장(16화)까지 진행됩니다. 저는 이것이 "전체" 분량에 해당되는것으로 추정합니다.

어느 사용자께서 제공해주신것으로 본 소설의 뒷부분을 드디어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본 글은 아카이빙 목적으로 생성되었으며, 원작자의 요청에 따라 언제든지 내려갈 수 있습니다.

모든 대체역사 장르의 무궁한 번영과 모든 창작의 자유를 바랍니다. 


+ 이 글을 어느 깊은 우물에서 받아 다시 적어옮긴 심리학자의 말


이전 <탄핵전후사의 인식>과 다소 차이가 있어 다시 재업하는 방식을 채택하였습니다.

제 정보에 따르면 원작자는 뵐갤에 올린 '탄전사'를 과거에 한 차례 수정한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본 1장은 현재 구 연재본이라고 적어둔 과거 탄전사 1장과 달리 아마도 뵐갤발 수정 이후의 1장으로 생각됩니다.

특정 장 이후의 몇몇 사진은 깨져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 흠결입니다. 사진은 가능한 제가 보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