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탈색이라도 한 듯, 첫눈처럼 새하얀 소녀가 비틀거리며 내 앞에 섰다.


자신의 팔꿈치를 붙잡은 채로 초조하게 떨고있던 소녀에게는 조금의 여유도 없어보였다.


곧 소녀의 공허한 두 눈이 내게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의 신랄한 모습이 조금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소녀의 그늘진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다.


그렇지만 초췌한 두 눈에는 곧바로 나를 향한 증오의 불길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그 분노는,


자신의 혈육을 빼앗아 영원히 죽음의 품에 안겨놓은, 


소중한 혈육을 타인의 피를 훔쳐마시며 살아가야하는 괴물로 만든,


유일한 혈육을, 세상에서 제일 존엄하길 바랄 생명을, 일개 노예로, 소유물로 전락시킨 나를 향한 것이었다.


소녀는 표정을 잔뜩 구긴 채,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신음하듯이, 혼잣말에 가까운 원망의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쫒아왔다고…….


왜? 왜 나를 쫒아온거야?


그렇게나 내가 괴로웠으면 좋겠어? 그렇게나 나를 외롭게 만들고 싶어? 꼭 내게서 언니를 뺏아가야만……――힉!?"


"애야, 어르신의 앞이다. 부디 실례가 되지 않도록 잘 행동하렴."



집주인이 소녀의 어깨를 감싸쥐면서, 어린애를 달래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소녀는 그 손길이 어깨에 닿는 것 만으로 흠칫 놀라더니, 시선을 내리깔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수긍했다.


집주인은 소녀의 안타까운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는지, 너털웃음을 터트리면서 소녀의 감싸쥔 어깨를 먹이를 잡은 매처럼 거칠게 붙들었다.


소녀는 주인의 거친 손길에 두 눈을 질끈 감으면서 자신의 몸을 있는 힘껏 그러안으면서 벌벌 떨었다.



"핫핫핫핫하, 이것 참. 아직 깨어난지 얼마 안된 권속인지라, 아직도 낯을 많이 가리나보군요. 부디 너그럽게 봐주시길."



"후후후, 저렇게 어린 나이에 되어버렸다면 어쩔 수 없겠네. 그치?"



소녀의 차가운 반응으로 굳어버린 분위기를 풀어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언니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넉살좋게 주인의 말을 받아주면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순간, 소녀는 잔뜩 움츠러든채 떨고있는 와중에도 눈을 치켜뜨더니, 위협이라도 하려는듯이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쓰다듬으려 뻗은 언니의 손을 노려보았다.


언니는 그 정도로 미움을 받을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조금 놀란듯한 표정으로 소녀의 머리로 뻗으려던 손길을 멈췄다.


집주인의 얼굴에 당혹감과 함께 약간의 분노가 떠올랐지만, 언니와 소녀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당장은 어쩌지도 못한 채로 이빨만 갈다가, 소녀에게 경고라도 하듯이 소녀의 어깨를 그러쥔 손에 손톱을 세워 살이 패이도록 움켜쥐었다.



"힉……!"



기분이 상한 것은 언니의 권속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미소에 가까운 표정이지만 조금도 웃고있는게 아닌듯한 얼굴로 소녀에게 다가가서는 소녀의 턱을 당겨서 자신과 얼굴을 마주하게 만들었다.



"어머어머어머어어어? 차아암으로 귀여운 권속이네요오오.


앙칼지게 구는게 이거어, 교육하는 맛이 있겠는데요오오?"



가끔 얼빠진 짓을 하기도 하고, 내게는 손아랫사람이기에 표면적으로는 공손하게 대하고 있기 때문에 잊고있던 사실이지만, 


언니의 권속은 늘상 짓고있는 가면같은 미소 아래에, 누가 봐도 위험하고, 불길하게 보이며,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화약고 같은 감정을 품고있는 괴물이다.


이런 종류의 적의에 익숙할 리 없을 소녀는, 자신을 둘러 싼 괴물들의 섬뜩한 위협에 겁을 집어먹고 간신히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치지 않도록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소녀에겐 다행이게도 언니의 당황은 잠시 뿐이었고, 금방 평정을 되찾은 언니는 미소와 함께 금방이라도 무슨 끔찍한 짓을 저지를 듯한 기세로 소녀를 위협하고 있는 자신의 권속의 허리를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아직 애잖니? 겁먹어서 입을 다물어버리면 곤란하니까 너무 겁주지는 말아주렴?"


"……네에에에♡ 그러고보니 이거어, 둘째 주인님의 일이었지요오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아아아."



언니의 권속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직 불만이 남아있는 듯 했지만, 언니의 몸에 안기듯이 된 이 상황이 만족스러웠는지 그 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언니는 애라도 다루듯이 자신의 권속을 쓰다듬으면서, 이번엔 집주인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너도 고작 이 정도 일로 평정심을 잃지 말아주렴? 숭고한 마음으로 이 애를 우리로부터 지켜주려던 것 아니었니? 


아까 우리 앞에서도 당당했던 모습은 도대체 어디로 간거니?"


"이, 이것 참,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할 따름이군요."



집주인은 손수건을 꺼내 연신 식은땀을 닦으면서, 우리와 소녀를 연신 번갈아 보면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소녀는 그렇게나 벌벌떨고 있을 정도로 이 자리의 모두를 두려워하고 있었음에도, 그럼에도 나에 대한 한결같은 증오의 눈빛을 조금도 거둘 마음이 없어보였다.


집주인은 저도 모르게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입꼬리를 있는 힘껏 잡아당겨 간신히 어정쩡한 미소를 지으면서 천천히 소녀의 어깨를 잡은 손을 풀었다.



"아, 아무래도 제가 이렇게 곁에 있으면 이 아이가 여제님과 마음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데 방해가 되려나 보군요.


저는 이쯤에서 물러날테니, 부, 부디 이 아이를 어여삐 여기셔서 모쪼록 원만하게 대화를 나눠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무슨 일이 생기면 사람을 시켜서 저를 불러주시길."



집주인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우리 일행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건넸고, 천천히 뒷걸음질 치다가 이 자리에는 조금도 더 있고싶지 않다는듯이 부리나케 응접실을 떠났다.


곧, 응접실에는 우리 일행과 소녀, 그리고 시중인 권속만이 남게 되었다.


언니와 그녀의 권속은 도망치듯 물러난 집주인의 뒤로 대놓고 들리게 혀를 차기는 했지만, 그 이상 이 일의 당사자인 나를 제쳐두고까지 할 말은 없었는지 한 발짝 물러나 있었고, 


나는 막상 껄끄러운 상대를 마주하게 되자 무슨 말을 나눠야 할지 몰라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소녀 본인도 나를 죽일듯이 노려보기만 할 뿐 당장 무슨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이 자리에는 한동안 불편한 침묵이 시간과 함께 흘러갔다.


한참만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소녀 쪽이었다.



"……대답해."



난데없는 재촉이었지만 나는 소녀가 무슨 대답을 요구하고 있는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굳이 입 밖으로 물어보았다.



"무엇을 말이냐?"



내가 되물어보자 소녀는 떨구고 있던 고개를 치켜들더니 억눌러왔던 감정을 터트리면서 히스테릭하게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왜! 왜 날 쫒아온거냐고! 왜! 왜! 왜!


지난 몇년동안 내 언니를 뺏아갔었잖아! 그걸론 모자랐던거야?


너희 괴물들한텐 도대체가 마음이란게 있긴 한거야?


세상에 남은 유일한 가족을 비겁한 방법으로 갈라놓고, 


나와 언니의 모든것을 뺏아가놓고,


이제는 내 마지막 남은 행복까지 전부 가져가야지, 그래야지 속이 시원하겠어?"


"난……. 난, 적어도 뺏은 건 아니야."


"……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그 정도 뿐이었다.


동생과의 조사에서 나는 내 권속이, 그 가엾은 자매에게 살아생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되었다.


아무리 내 권속이 소중하다 하더라도, 내게는 그런 끔찍한 일들을 겪은 어린 아이에게 질책한다던가, 되려 역정을 낸다던가, 내 권속에게도 소중할 이 아이에게 그런 막돼먹은 태도를 취할만큼 무뢰배처럼 굴 배짱은 없었다.


이제껏 수 많은 생명들을, 고작 이 부정한 생명을 연명하겠다고 죽이고, 뜻을 거스른다고 죽이고, 일에 방해가 된다고 죽이고, 덤벼왔다고 죽이고, 말대답했다고 죽이고, 


지난 천년간 수 많은 핑계와 이유로 끝도 없이 죽여대서, 살육으로 얼룩진 괴물 주제에 인정을 논한다고 나를 비웃어도 좋다.


그럼에도, 나는 분명 죄악의 층을 겹겹히 쌓아올린 끔찍한 괴물임에도, 부조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가엾게 여길 수 있는 정도의 동정심이 천년 전과 다를 바 없이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었다.


살아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타인을 해치는것과, 부정한 이득을 취하기 위해 행하는 악의적인 괴롭힘은 분명 다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자매들이 겪은 고통은 분명 후자에 해당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나의 권속 자매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세상에 남겨진 유일한 혈육끼리 서로를 의지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시설에 가면 사람들이 자신들을 갈라놓을거라 생각했던건지, 내 권속은 어떻게든 스스로 생계를 유지해보려 애썼던 모양이었다.


당시의 지역 신문에 적힌 기록에 따르면 어떻게든 푼돈이라도 벌려고, 하루하루 용돈조차 되지 못할 돈을 벌기위해 아이들이라도 써주는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아이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결국 수도와 전기가 끊기고, 집세마저 밀리자, 수상하게 여긴 이웃중 하나가 그 아이를 관찰하기 시작했고, 이런저런 눈에 띄는 움직임 탓에 금방 꼬리가 밟혀 관련 기관에 신고가 들어갔다는 것 같다.


분명 그 이웃은 선의로 한 행동이었겠지만, 그 일말의 자비조차 없는 무신경한 선의 탓에 정말 그 아이가 두려워하던대로 자매는, 다른 한 쪽은 아직 옹알이도 제대로 때지 못한 채로 각자 다른 시설로 갈라져야만 했다.


세상 어디에나 있을 흔하디 흔한 사회보편적인 비극이었지만, 그렇다고 그 비극의 보편성이 각 개인이 겪어야 했을 고통과 슬픔까지 흐리게 만들어주지는 않았다.


이별을 슬퍼할 틈도 없이 언니쪽은 어떻게든 동생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앞으로의 일에 대비했고, 의무교육이 끝나자마자 그 동안 딴 자격을 통해 어떻게 한 작은 회사의 경리 일을 따내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일자리를 얻자마자 동생의 시설을 찾아가, 세상에 남은 자신의 유일한 혈육을 집으로 데려갔고, 그 뒤로는 작은 방을 하나 얻어서 자신의 동생을 키워내는데만 전념했다는 것 같다.


분명 그 나이에 견뎌내기엔 너무나도 힘들 가혹한 삶이었을건데도, 그 아이는 꿋꿋하게 자매끼리의 아기자기한 삶을 어떻게든 꾸려나갔다.


그렇게 모든 일이 끝났으면 참으로 다행이었겠지만(어쩌면 내게는 아닐지 몰라도), 진정한 비극은 이 시점에서는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상술한 내 권속에 대한 지나치게 상세한 유년기의 기록은 어떤 흡혈귀 계열의 대부업체에서 나온 내부 자료다.


자료가 수집된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n년 전, 그러니까 추정컨대 그 아이가 사회에 갓 진출했을 때로 보인다.


흡혈귀 계열의 사업체 중, 특히 대부업의 경우에는 돈을 벌어들이는 것보다 흡혈귀에게 피 헌납하기 위한 인신매매가 운영의 주요한 목적이다.


그래서 타 대부업과는 다르게 연대보증을 기피하며, 가급적 일이 커지지 않도록 연락을 나눌 일가친척과 지인이 적은 목표물을 선호한다.


아마 내 권속은 그런 관점에서 최적의 목표물이었을 것이다.


즉, 이 자료가 수집된 시점에서 이미 내 권속은 흡혈귀 계열사의 목표물이 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제껏 내가 그 아이의 과거를 두려워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혹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성역을 유지하고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 인간 사회에 심어둔 장치들이, 그 아이에게 의도하지 않았던 피해를 입혔던 것이 아니었을까,


혹시 그랬다면 언젠가 그 아이가 그 사실을 눈치채고 나를 경멸하지는 않을까, 


그 아이 앞에서 짓는 평온한 미소 뒤에서, 언제나 나는 마음 한 구석에 그런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설령 내가 직접적으로 그 아이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았더라도, 우리 밤의 귀족들의 삶의 방식이 그러니만큼, 내게는 이 문제에 있어서 언제나 비난받을 여지가 있었다.


그 업체는 때가 되자 권속 자매를 집어삼키기 위해 직장을 뺏은 뒤에, 재취업하지 못하도록 주변에 압력을 넣는 식으로 그 아이의 생활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미 역경속에서 살아왔던 그 억센 아이는 제법 오래 버틴 모양이었다만, 결국 끝없이 늘어나는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여동생을 내놓고 말았다.


자세한 기록 자체는 엇갈리고 있는데, 언니는 끝까지 말렸지만 여동생쪽에서 언니를 지켜주겠다며 스스로 팔려가겠다고 주장 했다는 언급이 있는가 하면, 


언니 쪽에서 여동생을 바칠테니 더 이상은 괴롭히지 말아달라며 추하게 애걸복걸했다는 언급도 있었다.


어느 쪽이 진실이던간에 아무튼 결론적으로 동생 쪽만이 빚의 일부를 대신해서 흡혈귀에게 팔려갔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해보인다.


물론 빚 전부를 탕감해준것도 아니고, 놈들 수법상 그렇게 될 여지를 남겨둘 리도 없으니, 언젠가 그 아이 또한 동생과 같이 놈들에게 끌려가게 될거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것이다.


이제와서는 그 아이가 그 날, 어떤 생각으로 비 오는 날의 빛 한점 비치지 않는 교외의 도로를 걷고 있었는지, 


그 아이의 사인이 자살이었는지 타살이였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 시점에서 살아갈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채로 방황하고 있었던 것 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저 순간의 변덕일 뿐인 온정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가문의 상의도 없이 그 아이에게 베풀어준 생명은 조금의 사심도 섞이지 않은 진짜 온정이었다.


그리고 난 그것이 얼마나 비겁한 생각이라 할지라도, 내가 상처입게 만들었을지도 모를 그 아이로부터, 내가 베푼 온정에 대해 마땅한 보답을 받고 싶었다.



"난 단지 길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던 그 아이를, 그저 한 순간의 변덕으로 살려내서 곁에 둔 것 뿐이다.


그래, 그런 것 뿐.


길에 떨어져 있는 것을, 버려져 있던 것을 주워온 거나 마찬가지인――"



물론 내 뻔뻔하고, 방약무도하고, 논리마저 빈약한 변명은 온갖 부조리한 고통을 겪고 분노에 찬 소녀에게 분노만 일으킬 뿐이었다.


머리 끝까지 화난 소녀는 자신의 처지마저 잊고 내게 달려들더니, 거친 손길로 멱살을 잡고 내 얼굴을 가까이서 노려보았다.


언니의 권속으로부터 움직이려는 기척이 있었으나, 내가 그 전에 팔을 들어 제지했기에 그 이상 뭔가를 하지는 않았다.



"그래……. 너희는 늘 그렇지. 늘 그래!


내게는 소중한,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언니지만, 너희들에겐 그저 소유물이고 노리개일 뿐인거지? 그렇지? 


그러니까 그 따위로 생각할 수 있는거겠지?


아아, 이제 진짜 지긋지긋해! 너희 괴물들만 보면 신물이 나!


내 언니를 그렇게 하루종일 너희 따위만 생각하는 인형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끔찍한 짓들을 벌여왔던거야?


언니도, 나도, 너희 때문에 그 만큼이나 굴욕적이고 고통스럽고 끔찍한 생활을 했으면 이젠 행복해져도 되는거잖아!"



증오와 분노에 찬 어린 권속 특유의 새빨간 눈동자가 내 바로 코앞에서, 태양처럼 불태울듯이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언젠가 내가 가게 될 지옥의 심판대 위에 선 죄인처럼, 소녀의 시선을 피하면서 간신히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나는 그 아이를……괴롭히지 않았어.


강제로 나를 섬기게 만들지도 않았고, 권위를 세우기 위해 존엄을 짓밟지도 않았어.


그 아이를 나와 동일한 인격체로 진심을 다해서 사랑했다고 생각해.


……아마도."



별안간 소녀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호통이 튀어나왔다.


분노로 자신의 붉은 눈동자 만큼이나 시뻘개진 소녀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서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거짓말! 그럴 리 없잖아! 너 따위 괴물이 어떻게 언니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건데? 


언니가 네 밑에서 살아남기 위해 알랑방구 좀 뀐 거 가지고, 설마 그걸 진심으로 믿은건 아니지?


애초에 '아마도'란게 뭐야?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거야? 진심으로?"


"……."



나는 결단코 그 아이에게 모멸감을 느끼게 하지 않았노라고,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일부러 그런 적은 없노라고 맹세할 수 있었지만, 소녀의 분노는 분명 일리가 있었다.


애초에 그 아이의 경우가, 요즘 가문에 들여온 권속들의 경우가 특별한 것이다.


원래라면 이 집의 시중인들처럼, 그리고 내가 가끔씩 치졸하게 굴었을때처럼


권속이라는 위치는 완전한 흡혈귀가 될 때까지 그 집안의 소유물로서, 소모품으로서 자신의 한 몸을 바쳐 자신의 주인을 섬겨야 하는 존재다.


괴롭힘의 대상이 되기 일쑤고, 존엄이 짓밟히더라도 불만을 입에 담을 수 조차 없는 비참한 존재다.


거기다 그저 피를 마시기 위한 가축에 불과한 노예였다면, 그 비참함은 굳이 세세하게 언급할 가치도 없을 것이다.



"언니의 진정한 행복은, 세상 유일한 혈육, 진짜 혈육, 진짜 여동생인 나와 함께 있는것 외에는 없어.


내 유일한 행복도 그래. 난 언니만 곁에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어.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없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이제야 간신히 행복해질 수 있었는데……. 어째서……."



한바탕 분노의 말을 쏟아내고 난 소녀는 조금 지쳤다는듯이 우악스럽게 내 멱살을 붙잡은 손에서 스르륵 힘을 뺐다.


여전히 소녀는 내게 적대적인 눈빛을 보내고 있었지만, 어느샌가 그 눈빛은 비굴하게 변해있었다.


굴복이란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듯한 비굴한 눈빛. 


이 세상엔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일이 있으며, 살아남기 위해서,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가장 소중한 것 만큼은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이를 위해서 몇번이고 굴복해왔고, 또 몇번이고 굴복할 수 있는 그런 간절한 비굴함.


그것은 채 십년 정도도 살지 못했던 소녀가 배울만한 굴욕이 아니었다.



"내가, 아니 제가 뭘 그리도 잘못했나요?


언니를 그렇게 쉽게 포기한 것이 그리도 나쁜 죄였나요? 제가 그 벌을 받고있는건가요?"


"아니, 그런 건 네 잘못 같은게――"


"됐어요. 당신한테 위로 따위를 듣고싶은 게 아니니깐.


그냥……. 제발 그냥 떠나주세요. 지금 당장 여기를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말아주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저를, 언니를 내버려두세요.


저희 자매의 마지막 행복을 뺏지 말아주세요.


마지막은 행복하게 자매끼리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죽을 수 있도록 내버려두세요."



소녀는 내게 무너지다시피 매달리더니, 급기야는 바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깊게 고개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소녀는 고개를 조아린 굴욕적인 모습으로 힐끔 나를 올려다보더니, 절박하다는 듯이 내 치맛자락에 매달려서 울부짖듯이 말했다.



"제가 당신을 위해 뭘 하면 될까요? 어떻게 하면 제 언니를 포기해주실건가요?


제 피를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을 때까지 전부 바치고 나면 용서해주실래요?


아니면 당신의 그 예쁜 구두를 제 못나고 지저분한 혀로 광이 날때까지 닦아드리면 될까요?"



소녀가 공허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면서 내 신발에 혓바닥을 가져다 댔다.


나는 기겁하면서 발을 빼, 한 발짝 물러났다.


소녀는 내 신발이 있던 빈 장소를 허망하게 그러안은채로, 대답을 재촉하듯이 내 안색을 살폈다.


나는 내 권속을 포기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 아이의 고통을 알면서도 모질게 대할 수도 없었다.


이 소녀와의 관계는, 존중받아야 하며 존엄해야만 할 사랑하는 존재의 영역과, 그저 삶의 일부분일 뿐이고 키워서 언젠가 도축할 뿐인 고통을 신경써줄 필요 따윈 없는 가축의 영역이 뒤섞여서 완전히 엉망진창이되었다.


그건 우리 밤의 귀족, 아니 흡혈귀라고 불리는, 똑같이 존엄한 존재들을 가축처럼 먹이로 삼는 괴물들이 영원히 지고 가야만 할 업보였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미안해. 다음에 마저……."



이대로 더 있다간 소녀의 비참한 모습에 정말로 마음이 꺾여버릴것 같았기에, 그래도 나는 나의 권속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몸을 돌려 자리를 뜨기로 했다.


소녀의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나 또한 그 아이를 필요로 한다.


시간을 들여서라도 천천히, 계속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쩌면 이 작고 상처받은 아이와도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는 결말을 내놓을 수 있을거라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 발걸음을 올렸다.


언니가 당황스러운 듯이 내 뒤로 따라붙으면서 물었다.



"어, 어어? 지금 가게? 아니, 그보다 다시 오게? 언제 또 이런 자리가 온다고?"


"언제라도 기다려야죠. 필요하다면요."



내 대답이 그리도 황당했던건지, 언니는 따라오던 발걸음을 멈추더니 황망하게 내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집 주인에게 말도 없이 자리를 뜬 결례는 언니나 그녀의 권속이 어떻게든 잘 마무리 지어줄것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이 이상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결말로 이 일을 매듭지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어쩌면 앞으로 나아가는게 아니라, 뒤로 물러나서 퇴보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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