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부부예정
개념글 모음


운 좋게도 엘리베이터가 나와 같은 층에 있어서 빠르게 탈 수 있었다.


일 층으로 향하는 버튼을 누른 뒤에는 서둘러서 닫음 버튼을 누른다.


자상한 아버지는 지금이라도 문을 열고 나와서 약국을 같이가자고 말할지도 모른다.


문이 닫힐때까지 붉은 빛을 내는 버튼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제발. 닫혀라.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


오늘따라 유달리 엘리베이터의 문이 느리게 움직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려갑니다.



작게 울리는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덜덜 떨리는 손이 버튼에서 겨우 떨어져 나왔다.


손처럼 떨리는 다리탓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몸이 엘리베이터 내부 구석에 닿자 그대로 힘이 풀려서 천천히 흘러내리듯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지난 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렇게 행동하면 된다.


아침에 깨어나신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뼈저리게 실감했다.


눈이 마주치자 지난 밤의 일이 마치 지금 당장 일어난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으니까.


가슴을 주무른 손과 술냄새가 나는 아버지.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입을 틀어막고 행위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소리죽여 울었다.


나는 아버지가 기억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그저 기도할 뿐이었다.


지난 밤은 지나갔고, 아무리 잊으려고 애써보아도.


얼얼한 허리가 열심히 지난밤을 내게 되새겨준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아이구 울지마. 우리 딸.'



처음 생리를 했던 날. 어쩔줄 몰라 울고 있던 나를 안아준 그 품속이 그리워.


날 다정하게 위로해주던 그 목소리가 듣고 싶어.


여자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며 이것저것 알려주시던 걱정어린 표정이 보고 싶어.



"엄마아..."



제발 이번에도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 알려줘요. 엄마.


나보고 혼자서 앓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이젠 아버지말고는 내가 믿을 사람이 없는데, 아버지에게는 말하지 못할 일이 생기면 저는 어떻게 해야해요.


아버지랑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너무 무서워요.


제 얼굴을 보다가 지난 밤일을 아버지가 기억해 내실까봐 무서워요.


겨우 술주정을 부렸다는 이야기에도 눈에 띄게 미안해 하시는 마음 여린 아버지가, 저를 겁탈했다는 것을 알면 무슨 반응을 하실지 두려워요.


무엇보다 아프기만 했던 첫 경험이.


필사적으로 엄마에게 외치던 사랑의 말들이.


해선 안될 부자... 아니, 부녀간의 그 행위가 '난 너 뿐이야'라고 속삭여준 그 말 한마디에.


너무나도 황홀하다고 생각해버렸어요.


아버지의 애절한 사랑이 전부 내것인 것만 같아서 흥분되었어요.


내게 남은 유일한 사람이 나 뿐이라고 해준 것만 같아서 행복했어요.


몸안으로 들어온 정액이 증표처럼 느껴져서, 샤워를 하는 순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버지의 성격을 알면서도 전부 말해버리면 한번 더... 이번에는 정말로 내게 사랑을 속삭여주지 않을까하고 생각했어요.



- 1층. 문이 열립니다.



없었던 일로 하자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한 번을 생각한 제가 혐오스러워요.


그러니 엄마.


어떤 반응이라도 좋으니 욕을 하거나 때리셔도 좋으니까.



-문이 닫힙니다.



제게 대답해주세요... 제발.



.

.

.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웅크리고 있던 나는 불러둔 택시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택시에 몸을 싣고 조금 멀리 떨어진 약국으로 향했다.


근처 약국에서 아는 얼굴이라도 만나서 무슨 약을 사는지 들키면 아버지 귀에도 들어갈지도 모르니까


택시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마지막으로 생리가 온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을 되새겼다.


25일 전. 슬슬 생리가 올 시기가 가까웠다.


가임기에서 크게 벗어나서 다행일까... 아니, 다행이다. 다행이 맞아.



"도착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택시에서 내려 찾아둔 약국으로 곧장 들어갔다.


문을 밀어서 열자,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약국 특유의 냄새가 느껴졌다.



"무슨일로 오셨나요?"



안경을 쓴 인상이 좋아보이는 아저씨가 웃으며 내게 말을 거셨다.


나는 한참을 첫 심부름을 나온 아이처럼 입을 열지 못하고 우물쭈물 거렸다.


생각보다 쉽게 달라고 하기 힘이 들었다.


아저씨는 내 반응을 보더니 무언가 익숙하다는 듯이 포스트잇에 무언가 적어 내게 건내주셨다.


[응급]


이라고 적혀있는 포스트잇을 보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는 조용히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작은 약상자를 하나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두셨다.



"이만원입니다. 정수기는 문 옆에 있습니다."



결제를 하고 약상자에서 약을 꺼냈다.


단 한알만 포장되어있는 약을 만지막 거리면서 어물쩡거렸다.


임신을 피하기 위해서 먹는 응급피임약을 내가 먹게 될 일이 생길줄은 상상도 못했으니까.


하지만 길게 망설이지는 않았다. 이런일이 생기면 최대한 빨리 먹으라는 엄마의 강한 당부가 있었느니까.


가임기에서도 크게 벗어났고 응급피임약도 먹었다.


아버지도 술기운에 어제 밤의 기억이 없으시니 이젠 정말로 나만 없던 일로 치부한다면, 나와 아버지는 여전히 사이좋은 부녀일 뿐이다.


이대로 돌아가면 끝나는 일이다.



"... 경구 피임약도 주세요."



하지만 나는 걸국 없던 일로 끝내지 못했다.


한 여름밤의 꿈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다시 한 번 같은 꿈을 원했다.



"하나에 팔천원입니다."

"두개 주세요."



해서는 안 될 꿈을 준비하는 비용은 잊기 위한 비용보다 저렴했다.


엄마는 여전히 내게 어떤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