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용사는 태어나지 않는다. 만들어진다.
개념글 모음


‘칸틀러가…여자라고?’


선배 귀쟁이년의 주옥같은 발언에서 밝혀진 또 하나의 사실.


여태껏 남자라고 상정했던 칸틀러가 여자라니?


이러한 정보는 이 몸의 7번 척추부터 전두엽까지 아찔하게 만들었다.


‘…분명, 사진 상에선 콧수염이 있었는데?’


그렇다.


고블린년이 보여줬던 그 때의 사진.


그 사진 속에서 칸틀러는 두툼하고 길쭉한 투스브러시 수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멋드러진 수염은 칸틀러가 남자라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게 만들었다.


애당초 여자가 수염을 가지는 건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기도 하니까.


‘파면 팔 수록 괴상한 녀석이다.’


도대체 뭐하는 놈…아니, 년인가?


시장과 연인관계인 건 그러려니 해도, 치정싸움의 끝으로 납치 및 암컷타락 시키고


메이드들과 야밤에 가위치기 조지면서 그걸로도 만족못해 변태같은 플레이를 하다니.


저런 문란한 년이 정치한답시고 나서는 것도 이해 못하겠다만, 저런 년을 족장으로 뽑은 귀쟁이들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살다살다 저 글러빠진 마왕년이 정상적인 정치인으로 보일 지경이다.’


고개를 슬쩍 돌려보니, 덩달아 넋이 나간 마왕년의 얼굴이 보인다.


‘이런 애미뒤진 경우가 있느냐?’ 라고 입으로 중얼거리는 마왕년의 얼굴이 말이지.


‘하긴, 별 특이한 잡종들이 모이는 마왕군에서도 칸틀러 같이 난잡한 새끼는 없었으니 놀랄 만도 하다.’


일단 칸틀러에 대한 소회는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언제까지고 그 년의 개인사에 놀라 까무러 칠 수 없는 노릇이니까.


지금은 놀란 가슴을 추스리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할 때니까.


“얘, 너 왜 아까부터 말이 없는거야? 이제와서 주인님과 못하겠다 하는 건 아니겠지?”


“…뭐라고요?”


“설마…너 이런 사실들을 모르고 지원한거야? 그냥 돈 좀 준다니까 덥썩 지원한거야?”


잠시 상념에 빠진 찰나, 이 몸과 여우년을 흘겨보는 선배 메이드년의 시선이 심상치 않다.


마치, 본인이 말한 정보들이 ‘모르면 간첩’ 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면서 말이지.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리고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 아까 전에도 말했듯이 지금도 칸틀러님을 생각하면 조갯살 사이에서…”


“아악! 그…그만해! 생긴 건 여리여리하게 생긴애가 왜 입만 열면 못 배워 쳐먹은 중년 개저씨 처럼 떠드는거야!!”


“왜긴요, 어렸을 때 조실부모 한 탓에 못 배워 쳐먹어서 그런거죠.”


“…어휴!”


이 몸의 진심어린 개인사 고백에 감동이라도 한 걸까?


선배 메이드년의 낯색이 ‘도저히 범접 할 수 없는 미친년이구나.’ 라고 대변하고 있었으니…


“일단 알겠어! 하지만, 칸틀러님과 동침 할 수 있는 영광은 개나소나 누릴 수 없어.”


“네?”


“뭐가 네? 야. 당연한 거 아니야?”


“뭐가 당연한겁니까?”


“하아~ 너 처럼 칸틀러님의 보은을 받고싶은 엘프들이 세계수 열매 숫자보다 많아!”


“…세계수 열매보다 많다?”


이게 무슨 망발일까.


고작 칸틀러와 보빔조지겠다고 대기 중인 귀쟁이들이 그렇게나 많다고?


사실, 칸틀러만 미친 년이 아니라 귀쟁이새끼들 단체로 미친게 아닐까?


이정도면, 단체로 세계수 잎을 코로 흡입하다가 부작용이라도 생긴게 아닌가 의심 될 지경이다.


혹은 장기간의 채식주의 생활을 끝에, 기초 영양소의 결핍으로 미쳐버렸거나 말이지.


“그래! 하지만, 난 네가 원한다면 사흘 안에 칸틀러님의 밤시중을 들 기회를 마련 해 줄 수 있어.”


“호오, 대단하신 분입니다. 역시 차기 메이드장이 되실 재목 다우십…”


“물론!”


그 때, 오른손을 쭉 펼치며 이 몸의 말을 끊은 선배 메이드년.


“그냥 들어주기엔 수지타산이 안 맞잖아? 안 그래?”


이윽고 검지를 까닥까닥 거리며 자신의 요구시항을 들어 줄 것을 피력했다.


“…원하는게 뭡니까?”


“아아~ 별로 어려운 건 아냐. 사실, 요즘따라 격무에 너~무 시달려서 피곤하거든.”


“…”


“선임 메이드로서 매일 청소, 빨래, 시설관리에 이젠 교육담당까지…이러다간 골병나서 세계수 아래에 묻힐 지경이야.”


굳이 더 이상 듣지않아도 이 년이 원하는게 무엇인지 바로 알아 챌 수 있었다.


누가 들어도 명백하게 자신의 일을 짬통때리겠다는 저의니까.


“아아! 너무 걱정하지마. 설혹 하던 일이 잘못되어도…그건 너희들이 알아서 하면 되니까.”


“…”


“응? 처음부터 실수 하지 않으면 그만이잖아? 내 말 틀렸어?”


“…”


“불만없지?”


역시 메이드계에서 살아남은 년답게 만만치않은 년이다.


업무를 짬통때리는 걸 넘어, 일이 잘못 될 경우 그 책임까지 짬통때리겠다고 대놓고 말하다니.


“흠.”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니까.


마음같았으면 두들겨패서 개소리를 지껄이지 못하게 만들겠다만…


결단코 그럴 수 없다.


왜냐고?


이 몸은 질서 선의 사나이니까, 용사니까.


추후에 좆같음을 배로 갚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은 겸허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좋습니다. 무슨 일을 하면 되겠습니까?”


“우후후후! 일단 창문 청소 마저하고…여기에 있는 리스트들을 오늘 중으로 끝내.”


투욱ㅡ!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 몸의 품으로 인도된 두꺼운 서류철.


‘이런! 작정하고 짬 때릴 심산이었군.’


저택 지하에 위치한 마력 발전기 점검부터 저택 지붕 이끼 청소, 심지어 정원 조경까지…


사실상 저택의 처음부터 끝까지 싹 다 관리하는 것과 진배없는 업무 리스트를 이 몸에게 내던졌다.


‘…그런데, 이 정도의 업무를 아주 태연스럽게 오늘 중으로 끝내라고?’


이 말은 즉슨, 밥도 먹지말고 잠도 자지말라는 뜻인 동시에


재대로 완수하지 못하면 그걸로 꼬투리잡고 늘어지겠다는 무언의 협박이다.


“…알겠습니다. 그 대신, 제 부탁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들어 주셔야 될 겁니다.”


“우후후후후! 물론이지~ 난 거짓말은 하지 않아. 그럼 나 먼저 들어가볼게~ 다 끝났으면 내 방으로 찾아와~”


그렇게, 마지막 말을 끝으로 시야 밖으로 점점 멀어져가는 선배 귀쟁이년.


본인의 일감을 다 맡겼다는 후련함 때문인지


혹은, 어떤 식으로 꼬투리 잡아서 우리를 괴롭히면 재미있을지


저 년의 머릿 속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지 모르지만,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라져갔다.


“좆같은 년.”


그래, 어쩔 수 없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이 두툼한 리스트를 완수하는 것.


그냥 완수하는게 아니라, 꼬투리 잡지 못 할 정도로 완벽하게해서 상대방의 귀를 누르는 것 뿐이다.


.

.

.

.

.


10시간 후…



“후우우우! 마왕, 이제 여기가 마지막 리스트다.”


“쿠후우우우! 하나씩 하나씩 하다보니 결국 끝이 도래되는구나.”


1000시간처럼 느껴졌던 10시간이 흘렀다.


세상을 밝게 비춘 태양이 어느새 구름 뒤편에 가려져, 이내 광휘를 머금은 달과 서로 위치를 바꾼 그 무렵…


선배 귀쟁이년이 때린 짬을 처리하기 위해, 1분 1초 숨 업무에 매진했던 우리는 지붕 청소만 남긴 채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쿠후후후…메이드의 일이란 참으로 고되구나.”


“흐음?”


“만일, 이 일을 닷새만 더 한다면 돌아가신 어마마마와 아바마마 곁으로 가겠구나.”


평소 재색을 자랑하던 외모는 어디로가고, 완전히 숯검댕이가 되어버린 여우년.


낯빛은 왠 구걸나온 거지새끼마냥 꼬질꼬질해졌고


메이드복은 두번 다시 입기엔 부적절 할 정도로 엉망진창 되어버렸다.


“이렇듯 말단이란 어디가도 서러운 법이다. 비단, 메이드 뿐만이 아니지.”


“쿠후후! 그래도, 그대 덕분에 좋은 경험을 많이 하게 되었다네.”


“좋은 경험이라…특별한 감정이라도 느꼈나보지?”


“물론일세.”


월광을 머금어 평소보다 더 광채를 띄는 여우년의 분홍 눈동자.


육체는 너덜너덜 했으나, 눈빛은 여전히 생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새로운 것을 체득하고, 모르는 것을 깨우친 그런 사람의 눈빛을…


“그대도 알겠지만, 마왕성에는 수 많은 메이드들이 짐을 보필하고 있다네.”


“그렇지.”


“짐은 그들의 고충을 헤아리지 않았네. 아니, 헤아릴 필요성을 못 느꼈지. 그들은 짐의 안락을 위해 존재한다 여겼으니까.”


“…”


“그래서 그들이 힘든 건 당연히 힘든거라 여겼고, 그들이 배풀어 주는 건 당연히 배푸는거라 여겼지.”


“…”


“허나, 직접 경험해보니 그렇지 않구나. 남을 위해 일 한다는 건, 한 사람의 안락을 위해 일 한다는 건…참으로 좆같은 일일세.”


“…훗.”


끝 마무리가 병신같지만, 어떻게 보면 여우년 다운 마무리.


뭐, 그건 둘 째 치더라도 무언가 느낀게 있다니 세삼 신비롭다.


역시, 사람은 본인이 직접 겪어봐야 성장한다는 말이 사실인가보다.


“다시 돌아간다면 반찬 투정을 하지 않을 걸세. 그리고, 그들에게 고맙다는 말을…꼭 할거라네.”


“…”


“용사여, 그것이 짐이 오늘 메이드 업무를 하면서 느낀 바일세.”


“성장했구나, 에멜드.”


“…그대, 방금…”


툭ㅡ!


그렇게, 눈이 살짝 휘둥그레진 채 무언가 말 하려던 여우년의 말을 끊고 청소도구를 건내준 이 몸.


“이쯤 했으면 충분히 쉴 만큼 쉬었다.”


이윽고, 소감을 담은 짧은 휴식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을 울렸다.


“자, 마무리 하도록 하지.”


그렇게, 어두운 밤 하늘을 덮은 은빛 물결 속으로 한 발자국 내 딛었다.


어슴푸른 먹구름이 걷혀가며 점점 밝아지는 월광을 향해서.


앞으로 가야 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