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이른 아침 새벽. 나와 레아는 검은색 상복을 입고 공동 묘지로 향했다.

그녀의 옷은 어제 가게에서 따로 맞춰줬고, 나는 아버지의 것을 그대로 입었다...


"아직 새벽이라 좀 춥네. 괜찮아 레아?"


"응."


"그래, 다행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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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버트."


"어?"


"당신이야말로 괜찮아?"


"그...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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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힘겹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건 꽤 익숙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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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아는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없이 손을 잡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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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보자. 윈델... 윈델... 아, 저깄다."


나는 레아와 나란히 놓여져 있는 묘비 쪽으로 걸어갔다.


[오스문드 윈델: 822 - 878] 

[마리아 윈델: 827- 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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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 오랜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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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 사람의 무덤 앞에 흰색 장미를 하나씩 내려 놓았다.


"미안해요. 너무 늦게 돌아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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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만나러 가기 싫은 게 아니었어요. 단지... 저 혼자 살아남기 바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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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차한 변명인 거 알아요. 그래도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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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아서 이렇게 두 사람을 다시 볼 수 있어서... 너무 기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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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 진짜 미안해..."


나는 결국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조용히 흐느꼈다.


"진짜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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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아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서 있었다. 마치 필요한 만큼 시간을 갖도록 배려해주는 것처럼...

그렇게 나는 한참을 혼자 흐느끼다가, 레아가 떠올랐다.


"저... 사실 오늘 소개 시켜주고 싶은 아이가 하나 있어요. 레아, 내 옆에 서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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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어서서 레아의 양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얘는 레아라고 해요. 전역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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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제 가족이 될 아이에요. 너무 예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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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레아도 두 사람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도 돼."


"나도?"


"그래, 가족끼리 서로 인사라도 나눠야지."


"알았어."


그녀는 무덤 앞에 공손하게 무릎을 꿇으며 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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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말해. 이제 레아도 우리 가족이니까."


"알버트."


"어...?"


"조용히 해. 지금 두 분한테 말하고 있으니까."


"아,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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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버트를 낳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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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턴 제가 잘 갖고 있을게요)


스윽


레아는 곧 바로 일어서며 무릎 위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벌써 다 끝났어?"


"응."


"더 하고 싶은 말은 없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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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아의 단호한 태도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역시 그녀답다고 해야 하나...    


"그래... 그러면 이제 슬슬 내려가 볼까. 아침도 거르고 나왔으니."


"아침도 좋지만, 당신은 오늘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아?" 


"더 중요한 일...?"


"등록."


"아, 맞다!"


어제 마을 회관에서 나는 사업자 등록을 신청하는 걸 까먹었다. 제빵사부터 플로리스트까지... 이 나라에선 거의 모든 직종이 의무적으로 신고부터 해야 했기 때문에, 신청 기간을 놓치면 앞으로 몇 달은 더 기다려야 될 판국이었다.


"이런... 또 까먹고 있었어. 그럼, 아침은 내가 빨리 만들 테니까..."


"됐어, 내가 준비할 테니까 당신은 필요한 서류들부터 챙겨."


"어? 레아가 요리를 할 줄 알았어?"


"못한다고 한 적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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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레아의 반응에 벙찐 표정을 지었다. 가만 보면, 참 신기한 아이였다.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성숙한 목소리에 어른 같은 말투.

그리고 어린아이 치고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세상 물정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자기 앞가림도 잘하는 애가 그 때는, 어쩌다가 삶을 포기했었을까...)


"알버트."


"어?"


"무슨 생각하고 있어?"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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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보다 레아가 차려주는 아침상이라니, 너무 기대 되는걸?"


"말투가 영 못 미더워 보이는데."


"아냐, 내가 우리 레아를 얼마나 신뢰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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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야..."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계속 걸은 우리는, 곧 집에 도착했다.

나는 서둘러 서재에서 필요한 서류들부터 챙겼다.


"하... 그건 또 어디 있는 거야. 미치겠네... 이런 건 잘 좀 정리해 놓으시지..."


한참을 뒤져도 몇 개가 도저히 보이지 않자, 앞치마를 매고 있는 레아가 부엌에서 걸어왔다.


"아직도 찾는 중이야?"


"응. 아무리 뒤져도 보이지가 않네..."


"흠..."


그녀는 잠시 책장과 서랍들을 살펴보더니, 곧 바로 손을 뻗어 종이 뭉치를 들어 올렸다.


"찾고 있던 거."


"맞아... 어떻게 찾은 거야...?"


"별 거 아냐. 이제 나와서 식사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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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때부터 평생을 산 집을,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나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그녀는 능숙해 보였다.

귀족가 애들은 원래 다 이렇게 똑 부러지는 건가 생각하며 부엌으로 갔는데....


"워..."


....................


식탁 위엔 푸짐한 요리들이 한 가득 놓여져 있었다.

오믈렛과 프렌치 토스트, 팬 케이크에 야채 샐러드까지... 그리고 주전자엔 커피까지 끓고 있었다.


"이걸 레아가 직접 다 만든 거야?"


"응."


어제 대충 사온 재료들로 만든 것 치고, 너무나 훌륭한 상차림.

누가 봐도, 그녀가 요리에 대해선 나보다 몇 수는 위인 게 분명했다.


"이거... 이러면 앞으로 내가 만들기가 너무 부끄러워지는데..."


"그럼 앞으로도 나한테 맡기던가."


"진짜...?"


"그래. 빨리 자리에 앉기나 해."


나는 군침을 삼키며 의자에 앉았다.


(이게 얼마 만에 먹는 집 밥이냐...)


"알버트."


"어?"


레아는 두 손으로 앞치마를 잡아당기며 쑥스러운 듯이 말했다.


"당신은 나갈 채비를 하고... 나는 아침을 준비하고..."


"그런데...?"


"이러니까, 우리 둘 꼭 부... 부... 같지 않아...?//"


그녀는 뭔가 살짝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하하~ 그런가? 아무튼 이렇게 식사까지 준비해주고, 나는 레아가 너무나 대견한걸?"


....................


(애는 갑자기 표정이 왜 또 이러지...)


급속도로 살벌해지는 그녀의 표정에, 나는 식은 땀을 흘리며 숟가락을 들었다.


...................


(됐고, 밥이나 얼른 먹자...)


나는 오믈렛을 한 술 떠 먹으며 말했다.


"이야~ 완전 맛있는데? 내가 여태 먹어본 오믈렛 중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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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들도 전부 맛있네~ 나는 레아가 이런 솜씨를 갖고 있는 줄 전혀 몰랐어."


....................


무지성 칭찬 공세에, 그녀는 새침한 표정으로 내 컵에 커피를 따라주었다.


"잘 마실게. 근데 난 우유는 안 넣는 게..."


째릿-


"사실 난 라떼도 좋아해."


....................


나는 왠지 모르게 화가 나 있는 그녀 앞에서 서둘러 식사를 끝마치고, 서류를 챙겨 나갈 채비를 했다.


"금방 돌아올게 레아. 집 잘 보고 있어."


"다녀와..."


(오는 길에 선물이라도 하나 사와야겠군)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마을 회관)


"안녕하세요."


"윈델씨? 또 오셨네요. 뭐 잊으신 거라도..."


"제가 어제 사업자 등록을 하는 걸 까먹어서요."


"아하~ 그러면, 먼저 서류들부터 꺼내보시겠어요?"


"네, 여기..."


"흠..."


여직원은 눈으로 서류들을 대충 훑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목수 일을 다시 시작하시는 거죠?"


"네. 저희 집 가업이기도 하고..."


"그러면, 이 서류들은 딱히 필요가 없을 거 같네요."


"그래요?"


"네, 윈델씨 같은 경우는 이미 등록된 사업을 이전 받으시는 거니까, 따로 재 등록 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죠?"


"어제 설명해드린 유산 증명서가 따로 우편으로 발송될 거라고 말했잖아요? 수령하시면, 그 즉시 일을 시작할 수 있어요."


"그렇군요. 그럼 이것들은 괜히 갖고 왔네요..."


"그나저나, 윈델씨는 정말 부지런하시네요. 그 정도 재산이면 평생 놀고 먹으실 수 있을텐데..."


"하하... 집에 식구가 늘어서요."


"그게 제 소원이거든요. 평생 일 안하고 놀고 먹는 거. 말단 공무원 월급으론 어림도 없겠지만 말이죠..."


"그래도 덕분에 저를 포함해서 많은 분들이 그쪽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음..."


[행정관: 라라 위스티나]


나는 카운터 앞에 그녀의 명패를 보고 말을 이어갔다.


"위스티나 양."


"별 말씀을요. 제가 도울 수 있어서 기쁘네요.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네, 위스티나 양도... 아, 맞다."


"뭐 빠뜨리신 거라도?"


"혹시... 여자 아이가 좋아할만한 게 뭐가 있을까요?"


---------------------------(알버트의 집)


....................


레아는 뚱한 표정으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아침 식사 때 알버트가 자신에게 보여준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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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어린애로만 보고 있다는 거겠지...)


달그락- 달그락-


(조금만 기다려 알버트... 조금만...)


그녀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레아, 나 왔어. 생각보다 일 처리가 쉽게 끝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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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화나있어? 내가 선물도 사왔는데."


(선물...?)


레아는 선물이라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내 쪽을 쳐다봤다.


"일로 와서 손 좀 내밀어 볼래?"


....................


레아가 왼손을 내밀자, 나는 그녀의 손목에 끈 하나를 감아줬다.

하얀 초승달 장식이 달린 푸른색 팔찌였다.


"이건..."


그녀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마음에 들어?"


....................


"일부러 레아 눈이랑 같은 색깔로 골라봤어. 꽤 잘 어울리는데?"


....................


....................


"정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거로 바꿔도 되니까..."


"고마워."


"응?"


"고맙다고...///"


"그래... 마음에 든 거 같아서 다행이네."


나는 서재로 가서 서류들을 다시 꽂아 넣으며 말했다.


"레아~ 나 오후에도 나가봐야 할 거 같아."


....................


"레아?"


내 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식탁 의자에 앉아서 팔찌를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레아...?"


....................


"워-!"


"흐꺗?!!"


내가 뒤에서 놀래키자, 그녀의 입에서 깜찍한 비명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팔찌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


"알버트... 다시는 그러지마..."


"미안, 내 말을 못 들은 거 같아서. 나 아무래도 오후에도 나가봐야 할 거 같아."


"왜, 또?"


"이왕 할 거, 쇠뿔도 단김에 빼야지. 아는 벌목소에 가서 자재들부터 주문하려고."


"아는 벌목소? 혹시 한나라는 여자가 딸이라는 그 곳?"


"맞아... 근데, 그건 어떻게 알았어?"


"어제 당신이 마을 회관에서 말했으니까."


"그랬지... (귀도 밝네)


레아는 갑자기 손톱을 물어 뜯으며 중얼거렸다.


"그딴 곳은 죽어도 가기 싫은데... 그렇다고 알버트를 혼자 보내면, 그 한나라는 여자가 꼬리 칠 수도 있고..."


"응? 뭐라고 말했어?"


"아무것도 아냐."


"그럼, 점심은 혼자 먹고 있어.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으니까."


"아냐, 알버트."


"어?"


"나도 같이 가봐야겠어."


"뭐,상관은 없지만... (같이 가봐야겠다는 건 무슨 뜻이지)"


"옷 갈아입고 올게. 잠깐 기다려."


"그래."


레아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다시 나왔다.


"됐어, 가자."


"너 그 옷 진짜 좋아하네."


그녀는 허리에 파란색 리본이 달린 흰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에 사줬던 옷이었다.


"나한테 어울리니까."


"확실히 그렇긴 해. 그 팔찌랑도 잘 어울리고."


"당연하지."


레아는 당당하게 어깨를 피며 나한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알버트."


"큭큭... 알겠어."


..........??


나는 그녀의 앙칼진 모습에 귀여워서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덕분에 가는 길 내내, 그녀의 따가운 눈총을 감내해야만 했다.


"다 왔네."


"그래... 여기가 그 한나라는 여자의 집..."


나는 나무 문에 노크를 했다.


똑- 똑- 


"누구쇼?"


"접니다. 알버트."


곧 문이 열리자, 턱수염이 수북하게 난 후덕한 인상의 아저씨가 모습을 보였다.


"오... 알버트... 돌아왔다는 소식은 어제 들었단다. 이게 정말 몇 년 만인지..."


"오랜만이에요 욘 아저씨. 집에 한나도 있나요?"


"걔는 친구 일 때문에, 반년 정도 그 곳에서 지내다 오겠다고 하더구나."


(좋았어, 6개월이면 시간은 충분해...)


"호오? 이 귀여운 여자애는 누구니?"


아저씨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레아를 쳐다보며 물었다.


"제 새 가족이에요. 이름은 레아고요."


"그래... 레아라고 하는구나. 반갑다 레아야."


....................


"흠... 면도라도 하고 올 걸 그랬나. 내 인상이 많이 무섭나?"


"아뇨. 그냥 얘가 낯을 좀 많이 가려요."


"뭐, 그럴 수도 있지. 일단 둘 다 안으로 들어오렴."


우리는 아저씨를 따라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내부는 몇 몇 부분을 제외하곤, 어릴 적 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이 소파랑 책상... 아직도 갖고 계시네요."


"그래. 그것들도 오래 쓰다 보니, 정이 들어버려서..."


"저 선반이랑 옷장도 그대로..."


나는 즐겁게 회상에 젖은 채로, 집 안을 쭉 살펴봤다.


"앞으로도 자주 놀러 오거라. 너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물론, 이 아이도."


"감사합니다. 근데 오늘은 인사도 드릴 겸, 부탁 할 일도 있어서 왔어요."


"부탁?"


"네, 앞으로 아저씨네 가게에서 나무를 발주하고 싶어요."


"음... 얘기가 꽤 길어지겠구나. 둘 다 여기 앉아 있으렴."


그는 잠시 후, 식탁 위에 차랑 간단한 다과를 한 접시 올려놨다.


"이 과자도 오랜만이네요."


"그래, 네가 좋아하는 거니까. 우리 귀여운 아가씨는 코코아 좀 마시렴."


....................


레아는 살짝 못마땅한 표정으로 컵을 들어 올렸다.


"그래, 알버트... 이제 사업 얘기 좀 해볼까?"


"네."


우리 둘은 이후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업 얘기 뿐만 아니라, 군대에 있을 때랑 어릴 적 추억에 관한 얘기도...


"그러면, 재고는 매달 이만큼 씩 부탁 드릴게요."


"알았다. 수종은 어떤 걸로 보내주면 될까?"


"전부 다 참나무로 보내주세요."


"좋구나. 마침 괜찮은 녀석들이 뒤뜰에서 자라나고 있거든."


"네, 건축용 자재로 참나무 만한 게 없죠."


"이거 참, 세상도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네가 나랑 마주 앉아서 사업 얘기도 다 하고... 어른 다 됐네 알버트?"


"이제 막 시작하는 건데요 뭘. 아저씨도 정정해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너는 못 본 사이에, 키랑 덩치가 엄청나게 커졌구나. 예전엔 우리 한나랑 비슷했던 거 같았는데."


"10년 동안 몸을 굴릴 시간은 넘쳐 나더라고요."


"그래, 그나저나 이 아이... 과자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많이 있으니까, 천천히 먹으렴."


우물... 우물...


레아는 아저씨가 세 번째로 갖다 준 접시를 비우는 중이었다. 이렇게 보면 어린애 같은 면도 있는 거 같고...


"아줌마가 직접 만드신 계피 과자가 끝내주긴 하죠. 근데 아줌마는 안보이시네요?"


"마누라는 지금, 외부로 출장 중이니까. 아마 한나랑 비슷한 시기에 돌아올 거 같은데."


"그렇군요... 그럼, 오늘은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오랜만에 아저씨랑 얘기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래... 아 맞다, 잠깐 이리 좀 와 보거라."


"네?"


욘 아저씨는 나를 잠깐 구석으로 데려가더니, 작게 속삭였다.


"딸을 키울 땐, 항상 조심히 대해야 돼. 아무리 멀쩡해 보여도 말 한마디에 크게 상처 받는 게 여자애들이거든."


"아... 저도 지금 조심하고 있기는 해요. 근데 가끔씩 삐지는 포인트를 도저히 모르겠더라고요."


"그게 핵심이야 알버트. 최대한 빠르게 삐지는 이유부터 알아내봐. 아니면, 평생 나처럼 시달릴 수도 있어.


"네, 명심할게요."


"그래... 이제 이거 들고 가보렴."


"이렇게 많이 챙겨주실 필요는 없는데..."


나는 아저씨가 종이 봉투에 잔뜩 넣어준 계피 과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 애가 정말 좋아하더구나. 꼭 어릴 때, 우리 한나 모습을 보는 거 같애."


"한나랑은 이미지가 완전... 딴판인 거 같지만, 여튼 감사합니다."


"그래 잘 가렴. 우리 꼬마 아가씨도 과자 다 떨어지면, 언제든지 다시 찾아오고."


....................


"녀석... 쑥스러워 하기는..."


나와 레아는 늦은 저녁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때, 아저씨 엄청 좋은 분이지?"


"뭐... 괜찮은 사람인 거 같네..."


레아는 과자 봉투를 자기 방 안으로 들고 가며 말했다.


"이제 씻고, 잘 준비나 해야겠다. 그 과자 밤에는 먹으면 안돼."


"난 어린애가 아냐, 알아서 해."


"그래 그래... (네가 그러면 어른이니?)"


나는 다 씻은 후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아저씨 덕분에, 좋은 가격으로 나무를 매입 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레아도 점점 잘 적응하고 있는 거 같아서 다행이고)


....................


(그나저나... 여자애가 삐지는 이유라....)


....................


(피곤하네.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나는 복잡한 생각은 미뤄두고, 깊은 잠에 빠졌다.

레아가 내 이불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세 달 후)


"알버트. 점심 때 뭐 먹고 싶어?"


"난 레아가 해주는 건 다 맛있는데."


"흥, 당연하지. 그럼... 내가 알아서 준비할게."


"고마워. 도와줄 거 있으면, 공방 쪽으로 와."


우리들은 쉽게 일상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나는 목수 일을, 레아는 요리와 청소 같은 집안일을 도맡았다.


"근데 레아..."


"왜?"


"너 원래 키가 이렇게 컸었나...?"


....................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키의 절반 정도 밖에 안되는 거 같았는데, 이젠 내 가슴 아래까지 올라오네."


"잘 먹고 잘 자고 있으니까."


"그런가... (그래도 너무 빨리 크는 거 같은데...?)"


레아는 근 세 달 동안, 신체적으로 엄청난 성장세를 보였다. 13살 정도의 말라깽이 소녀였던 그녀는, 이제 제법 몸의 굴곡 진 부분들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특히 키가 매우 빠르게 자라났다. 그리고 막 기르던 긴 머리도 깔끔하게 단발로 정리해서, 예전보다 훨씬 더 성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제 레아는 누가 봐도, 아름다운 미소녀로 자라나 있었다.


"흠...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이상해...)"


"알버트."


"응?"


"나한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네...?//"


레아는 살짝 홍조를 띄우며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당연하지. 세상 어떤 식물이라도 너처럼 빨리 자라지는 못할걸?"


....................


"그나마 비슷한 게 소나 말 정도겠지. 저번에 내가 옆집에 갔을 때... 어, 어디가?"


....................


(또 내가 뭘 잘못했나...)


레아는 살짝 뾰루퉁한 표정으로 부엌으로 가버렸다. 

난 아직도 그녀가 삐지는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


(흥... 바보 알버트...)


그녀는 볼에 바람이 들어갔지만, 곧 다시 미소를 지었다.


(뭐, 이런 순수한 점도 내 알버트의 매력이지만...)


레아는 요즘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했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식사를 하고, 잠을 자고...

그녀는 속으로 이 행복한 일상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랬다.


"오늘은 알버트가 좋아하는 고기찜이라도 해볼까..."


똑- 똑- 똑- 


.......??


그녀가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냄비를 꺼내고 있을 때, 현관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철컥-


"안녕! 네가 레아구나. 혹시 안에 알버트도 있어?"


한나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