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이챈러스 채널

지인이 몇 년 전 가죽공예를 시작해서 이제는 그럭저럭 솜씨가 늘어 '공방'이라는 소매와 교육을 겸하는 창업을 했어.

교육받는 사람도 조금씩 생겨나고 슬슬 자리를 잡아가니까 이 친구가 이제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판로를 개척할 생각을 했다더군.

그래서 텀블벅이랑 와디즈에 어떤 수제 가죽 제품들이 팔리고 있는지 볼려고 어제 검색을 해 봤대.


...그리고 정말 신박한 펀딩을 발견했다는 카톡이 그 친구에게 오더라.


'착하고 윤리적이고 친환경적인 비건레더 가방' 1xx,xxx원.

'비건레더' 또는 '비건가죽'이나 '비건스웨이드'란 거 들어 본 적 있어? 나는 어제 친구한테 처음 들었어.

채식가죽? 채식세무? 뭔지는 모르지만 일단 동물 가죽은 아니겠다 싶지. 그럼 정체가 뭘까? 혹시 콩으로 가죽을 만드나? 

대체 뭐를 두고 비건가죽이라고 할 거 같아?


정답은 촌스러운 말로 '레쟈', 좀 세련되게 돌려 말하던 시절에는 'PU가죽'이라고 불리던 물건이더라.

알고 봤더니 이거 요즘 유행한다며? 난 구닥다리라 그런지 먹는 것 두고만 비건을 논하는 줄 알았는데

이젠 '동물권을 존중하는 생활 방식'을 그렇게 부른대나 뭐래나.


난 고기 좋아하고 가죽으로 만든 구두 신고 가죽지갑 갖고 있지만 동물 학대는 눈쌀을 찌푸리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만으로 열 살 꽉 채운 녀석이랑 이제 만으로 여섯 되는 녀석(코리안 똥고양이. 코숏이 아니라)을 물고빨고 애지중지 기르고 있고

남한테 강요하고 같잖은 우월심리만 드러내지 않는다면 식생활에서의 채식주의 상관 안 해.

우유도 안 먹는 친구 하나, 물고기까지는 먹는 친구 하나 있는데 식당 고를 때 조금 고민되는 거 빼면 같이 잘 놀아.

모피 반대 운동도 별 적대감 없어. 만약 누가 들이닥쳐서 내 신이랑 지갑을 갈기갈기 찢고 욕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물론 아직 그런 일은 없었고.


근데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동물가죽 제품 쓰지 마시고 인조가죽 제품 쓰세요' 라면 상관없는데

왜 이런 데에 폼 재면서 '비건'이라는 말을 붙여서 허영의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그래?

난 속은 놈의 잘못보다는 속이는 놈의 잘못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지라

'비건가죽'이라는 걸 사서 쓰면서 '아아 나는 이렇게나 동물권을 존중하는 깨달은 자' 라고 생각하는 '검소'한 사람들은 그냥 불쌍해 보이고

저런 말을 만들어내서 팔아먹는 장사꾼들이 정말 기가 찰 뿐이야.

도살을 하지 않는 인조가죽은 '윤리적'일 수 있다고 보고,

그걸 사는 사람들이 '나는 착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그렇게 해서 소소한 마음의 행복을 얻는다면 나름의 효과는 있겠지)

대체 인조가죽이 친환경적이라는 논리는 어디서 튀어나오지?

레자는 저기 산골짝 깨끗한 땅에 깨끗한 물 주고 길러 기계를 쓰지 않고 정성들여 손으로 수확하는 거야? 석유화학 고분자화합물을 우습게 보네.

'비건가죽'같은 같잖은 말 만들고는 친환경이니 뭐니 얼토당토않는 사람들 현혹하는 사족 달지 말고

'인조가죽은 천연가죽에 뒤지지 않습니다. 자 보라구요. 괜찮죠?' 라고 하라고.

만약 '인조가죽'이라는 말이 부끄러워서 '비건가죽'같은 말을 만들어 쓰는 거라면 더더욱 자격이 없고.

여하튼, 호박을 수박이라 부른다고 호박이 수박 되냐...같은 말이 있었는데 이런 걸 보면 요즘에는 되는 모양이야.




한창 비아냥댔지만, 사실 사업 아이디어로는 괜찮은 거 같긴 해. 그래서 '비건아이보리'같은 걸 나도 팔아 보면 어떨까 생각은 드네.

밀렵당한 코끼리 사진 흑백으로 싣고 '참혹한 밀렵의 현장, 상아를 노리는 어쩌구 운운, 세계적으로 멸종 추세, 우리가 지키자' 어쩌고 글 써놓고는

'비건아이보리'로 만든 빗, 도장, 펜던트니 브로치니 하는 거를 팔아 보는 거지.

착하고 윤리적이고 친환경적이고 내면과 외면의 아름다움을 모두 만족시키는 '비건아이보리'라는 게 있다면 대체 뭐일 거 같아?

세간에서는 그걸 '플라스틱'이라고 부르고 있겠지. 알 게 뭐야? 이제부터는 '비건아이보리'라 부르면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