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사회 채널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는  한국과 북한의 외교전이 가장 치열하던 시기였다.
한국이 점차 군사, 정치 등등 여러면에서 북한에 우위에 서기 시작하자 더더욱 외교전에 집중을 할수 있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1세계도 2세계도 속하지 않은 제 3세계의 국가들을 둘러싸고 한국과 북한은 한나라라도 더 자신의 편을 만들기 위해서 애쓰던 시대였다.

둘의 목표는 대상만 다를뿐이지 목표는 비슷했다. 바로 북한/남한을 3세계로부터 고립시키는것.

하지만 3세계와의 외교에서 한국은 북한보다도 후달린 감이 있었다. 북한은 일단은 2세계에 속하는 공산진영이지만 중소결렬이후 주체사상을 고집하면서 소련이랑 중국과는 다른 자주 노선을 걷는 한편 3세계 비동맹 운동에도 관심을 보이면서 3세계랑의 관계가 매우 밀접하였다. 그에 반해 반공 친미라는 이념을 간판에 내걸고 있던 한국은 3세계랑 관계를 맺는데 다소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3세계 국가들은 북한이랑 한국이랑 양다리를 걸치기는 했지만 경제적으로는 한국을, 정치적으로 북한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미얀마도 이러한 양다리를 걸치는 국가중 하나였다. 사회주의 국가인 미얀마는 북한을 선호하기는 했지만 경제적인 문제때문에 한국과의 관계도 무시할수가 없는 수준이였다. 

결국 전두환 대통령은 미얀마에 확실하게 못밖기 위해서 미얀마 방문을 하게 된다.
그러나 미얀마 순방 이틀째, 미얀마의 성소중의 성소인 아웅산묘소에서 폭음과 함께 건물이 날아가버린다. 이 폭발은 북한이 주도한 테러로 한국 최고위층 인사들이 한줌의 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북한의 이러한 도발이 하루이틀은 아니다만 이번 사건은 그 궤를 여타 사건이랑은 한참 달리했다. 1.21사태나 문세광 사건등등 북한이 대통령을 암살하려 한 적은 있었어도 그건 어디까지나 남한 땅에서, 대통령, 단 한사람을 목표로했었지 이 사태는 3국에서, 행정부수반을 모조리 다 날려버려서 정부 전복을 꾀했다는 점이였다. 거기에다가 이건 7.4남북공동성명을 뒤엎어버린 점에서 북한의 행동은 더더욱 용납이 될수가 없었다.

사실상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는 이 행위는 국내를 발칵뒤집었고 군부내도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데프콘 3가 발령되었고 남북국경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군부. 하나회의 강경론자들은 내친김에 북한을 공격하자는 여론이 조성되었고 이 분위기는 점차 군 내부로 확산이 될 조짐을 보였다.이러한 군부의 행태에 미국도 많이 당황하였으며 한국의 북진을 막으려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때 나선 전두환 대통령이 한 말 한마디, “내 명령 없이 움직이면 반역”

전두환은 자신의 목숨이 날라갈뻔했음에도 차분하게 미국의 말에 수긍하면서 전방을 돌고 군 지휘관들을 일일이 만나 전방 장교들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북한을 향한 보복공격행위를 일체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 덕분에 판문점도끼사태 처럼 우리군이 북한 초소를 파괴하고 다니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한국은 이 사태를 계기로 한미 동맹을 강화함과 동시에 전쟁 대신에 북한의 행적을 3세계에 대대적으로 선전하기로 하는 노선을 취하기로 하였다. 

전두환의 이러한 방식은 전쟁보다도 매우 효과적이였다. 
3세계의 국가들은 일제히 대북성명에 규탄을 하였고 친북 성향의 3세계 국가들은 북한이랑 단교를 하기 시작하고 한국이랑 단독수교를 하였다.

물론, 이는 북한의 자업자득인 요소가 컸지만 만약 한국이 북한이랑 전쟁을 했다면 3 세계 국가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고려해서라도 한국의 편을 들지 않았을 가능성도 크다.

결국 1980년대 남한-북한의 외교전은 진짜로 전쟁으로 벌어질 뻔했으나 북한의 장렬한 산화와 전두환의 침착한 대처, 그리고 발빠른 외교대책 덕분에 전쟁을 하지 않고도 북한보다 더 우위에 서는데 성공을 하며 북한을 대외적으로 압박시키는데 성공을 한다. 

이러한 전두환의 업적은 진보파 역사학자이자 반전주의자인 한홍구 조차도 '전두환의 과오는 평생 심판을 받아야하지만 전쟁으로 비화될 뻔한 사건에  침착하게 대처하여 역으로 북한을 더욱 세계적으로 고립시킨 업적은 매우 훌륭한 업적'이라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