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태 (1903~1954)
 1903년 3월 10일 매천시 송암구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이야기를 지어내는 능력이 뛰어나 또래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지어내 들려주곤 했다.
 1910년 북월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14년 송암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 장전 시장에서 누이와 함께 3.5 만세 운동에 나서다 누이와 함께 체포된다.
 이후 누이가 고문을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자 출소 후 누이를 그리워하는 시 「매화꽃」을 쓴다.
 이후 1922년 매천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온혈」을 통해 등단한다.
 1923년 수필 「누이에 바치는 사모곡」을 쓰면서 문학가들에게 큰 인상을 남긴다.
 이후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게되어 염군사에 가입하게 된다.
 1925년 염군사가 파스큘라와 합쳐지며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속칭 카프(KAPF)에 가입한다.
 이후 카프에서 소설 「붉은 강」,「백설」과 시 「소월」,「붉은 깃발이 휘날릴 그 날」을 집필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한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가 국내 사회주의 단체에 대한 탄압을 강화함과 동시에 카프 역시 존립에 위협을 받자 소련으로 망명을 떠난다.
 이후 소련의 국립극동대학교에 입학해 학생들과 함께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토론을 하면서 사상적 토대를 쌓았다.
 이후 1943년 국립극동대학교 한국어과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1945년 광복을 맞자 교수직에서 사임하고 고향 매천으로 돌아온다.
 이 때 조국의 광복을 기뻐하며 시「광춘」을 쓴다.
 이후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매천 대표를 지낸다.
 1948년 북한 정부 수립 이후 교육문화성 부부상을 맡으며 북한의 내각에 참석한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참전을 독려하며 "미제로부터 남조선 인민들을 해방하기 위한 해방전쟁."이라며 남침을 옹호한다.
 1950년 평양에 원폭이 투하되었을 당시 평양의 자택 지하 창고에서 문학 작품 등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덕에 원폭으로 숨진 다른 북한 관료들과는 달리 살아남았으나 방사능에 피폭되었다.
 이후 평양을 점령한 미군에 의해 체포된 그는 매천교도소에 수감되어 평양의 원폭 피해 참상을 생생히 고발한 「평양의 버섯구름」을 써낸다.
 1953년 한국전쟁 종전 이후 재판을 받게된 한경태는 재판장에서 "이 자리에 서야할 사람은 내가 아닌 평양에 원폭 투하를 명령한 간악한 미제의 대통령이다."라고 주장한다.
 이후 사형판결을 받은 그는 1954년 2월 3일 교수형에 처해진다.
 교수형에 처해지기 직전 남긴 유언으로는 "공화국 만세! 사회주의 혁명 만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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