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계 현 재광(玄在光, 1864 ~ 1905) 선생은 조선/대한제국의 문학인이자 사회운동가, 독립운동가로 현 당산구청장의 고조부이기도 하다.


 부유한 지주 가문의 장손으로 태어난 그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부친이 천주교 박해와 연루되어 사망한 이후 가세가 급격히 기울게 되었다. 아버지를 여의고 송은에 있던 외가로 쫓기듯이 도망친 그와 그의 가족들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처하게 되었고, 그를 제외한 모든 가족들은 밭일을 하며 살아가는 도중에도 집안을 다시 일으켜세우기 위해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19세가 되어서야 한양으로 떠난 능계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나 과거의 폐단으로 인해 번번히 낙방하게 된다. 고향으로 가던 도중 노잣돈이 떨어져, 주막에 빌붙어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던 그는 어느날 농민들의 호소문을 대신 써주게 되고, 그게 인연이 되어 민란을 이끌게 되었다. 민란은 실패하였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는 커녕 객사하지 않으면 다행인 처지였던 그는 삼남지방까지 도망친다.


 산에 숨어살다 함성소리를 듣고 나와보니, 엄청난 규모의 농민들이 낫이며 창을 들고 나와 결의를 다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결국 다시 한 번 민란을 돕게 된다. 기세 좋게 전진하고 왕가의 본향인 전주성에까지 무혈입성하는 광경을 목격한 그는 본격적으로 개혁운동에 몰두하기로 결심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송은 선생께서 기거하시던, 당시 비어있던 당산서원을 수리하고 시조를 지으며 문예 활동에 몰두하였다. 당시 저술한 "능계문집"에는 70편의 한시와 36장의 글씨, 5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있어 가치가 높을 것으로 예상되나 6.25전쟁 중 소실되었다.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서학에 관심이 많던 그는 30세가 되던 해에 서양의 학문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신학보다는 철학에 집중하였고, 자유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아 당시 기준으로 마냥 젊지 않은 나이었으나 교육에 힘썼다. 유교 경전이 아닌 신식 학문을 가르치고, 더 넓은 세계를 보라고 가르친 탓에 지역 유림들의 견제를 받아 결국 평양으로 쫓겨가게 된다.


 평양에 도망쳐온 그는 여러 개혁 운동에 힘을 보태다, 을사늑약 체결 소식에 충격을 받고 자결을 계획하셨다.

 그는 전차를 타고 독립문 앞에서 내려, "대한국 자주 독립 만세"를 외치며 분신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