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1978년 5월 28일 ~ 6월 14일

장소 : 매천시와 재령군 일대


황해대학교 학생회는 대표적 반정부 학생회였다. 인사 대부분이 박정희룰 싫어하고 자유민주주의를 갈망하였다. 황해대는 보수적 학생이 매우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유로 정부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유신헌법 공표 6년이 되는 해, 시민들은 무언가 잘못되었다 생각했다. 독재에 슬슬 염증을 느꼈다. 고 성장률을 기록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매천시민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독재에 반대했다. 


5월 27일, 황해대 학생들이 시 전역에 시위 홍보를 하고 우리의 목소리를 내자고 주장했다. 



梅川市民 여러분 團結합시다!

우리의 権利와 自由民主主義를 지켜내기 위하여 저희 黃海大學校 學生会에서 示威를 앞에서 主催하겠읍니다. 

날짜 : 1970년 5월 28일 13:00
장소 : 梅川市廳 앞

(송은구 청명동 거주 황해대학교 69학번 김서형 님 기증)


날이 밝고 해가 중천이 되자 시청 앞은 시위대로 붐볐다. 즉시 한 학생이 큰 목소리로 유신철폐 민주정부 구호를 외쳤다. 곧 한 무리가 나와 따라 외쳤고, 광장 앞에 나온 10만명의 시민들도 뒤이어 외쳤다. 전체 87만명 중 10만명이 나온 것이었다. 


박정희 : 빨갱이들이 또 문제야?! 당장 짓밟아버려! 


5월 29일 0시를 기해 북위 38도선 이북 지역에 계엄이 선포되었지만 시위의 불은 더욱 더 치솟았다. 5월 30일 도청 앞 시위에서는 무려 22만명이나 되는 시민들이 운집했다. 정부는 계엄군을 투입해 진압작전을 시작했다. 30일 하루에만 오십이 죽고 이백이 다쳤을 정도다. 


6월 2일, 시위대는 퍼포먼스를 보였다. 시청 앞 구호 현수막을 고쳐 다시 달기로 한 것이다. 시청 당국은 무반응을 보였다 (이것이 시장 교체의 원인이 되었다) .


九十万 梅川民主市民이 勝利한다!
黃 海 大 學 校 學 生 会


시위는 날이 갈수록 더 뜨거워졌고 그럴수록 정부의 강경대응또한 강해졌다. 6월 5일, 버스 터미널과 시외전화선이 끊겼다. 뒤이어 매천시와 재령군 전역을 봉쇄하였다. (6.5 봉쇄령)

6월 11일 시민들은 최후의 시위라는 이름으로 도청광장에 모여 행진을 하였으니, 그 수가 30만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도시가 봉쇄되어 진압이 사람을 죽이는 등 도를 넘자 결국 시위는 6월 14일 새벽 5시 15분 종료되었다. 


시민측 사망자 : 201명 

시민측 부상자 : 1,582명 

시민측 실종자 : 99명


계엄군측 사망자 : 11명

계엄군측 부상자 : 109명

계엄군측 부상자 :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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