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형소년 채널

2.


                                                                                  *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꿈은 현실이나 다름없어.

그건 이 입원실에서 처음 눈을 뜬 날 팔뚝에 박혀있던, 바늘이 찌르는 기분 나쁜 통증으로 충분히 알고도 남았지.


꿈 속의 그는 시간이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입원실에 갇혀있었지. 언제부터 갇혀있었는지도 모르겠고, 그도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어. 먹거나 잠에 들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형벌이나 다름 없었고 그런 것쯤이야 버틸 수 있었지만 제일 괴로운건 이곳에 홀로 현실의 기억은 단절 되어버려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이었어. 분명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어느 날 자신의 병실에 문을 열고 나타난 손님을 만난 이후로 단단히 굳혀있던 이곳이 조금씩 바뀌어져 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지.


오늘도 소녀는 다시 그를 찾아왔어. 처음 왔을 때보단 더 밝은 모습이었지. 경계 가득한 걸음걸이도 사뿐해졌고 낮게 깔렸던 목소리도 그 나이 소녀처럼 높고 재잘거렸어. 그녀의 밝은 몸짓에 절로 기분이 간질였고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여러 이야기를 그의 앞에서 쏟아냈지. 그 모습은 마치 어두운 밤하늘에 은색 별처럼 반짝이고 아름다워서 잠시 넋놓고 바라 볼 수 밖에 없었어. 


"우리, 같이 따뜻한 차도 마시고 맛있는 식사를 했잖아. 둘 다 너무 맛있어서..."

"있잖아."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라면 뭐든지 들어주던 그는 그 답지 않게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소녀의 말을 끊었어. 다만 그가 말을 끊은 이유는 소녀의 말들이 기분 나빠서, 듣기 싫어서 끊은 것이 아닌 그녀가 한 말들은 그가 전혀 알 수 없는 것들이어서 대화가 될 수 없는 것들이었거든. 그는 이 꿈 속에서 깨어날 수 없는 존재였어. 하지만 이 꿈 속이 곧 현실이었으니 할 수 있는 건 그저 소녀를 기다리는 것 뿐이었지. 그녀가 이곳의 전부인데 아무것도 몰라 공감해줄 수 없는 스스로에게 속상했어. 


"미안하지만... 머리 속에서 전혀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

"그런..."

"아무래도 이곳의 일은 너밖에 기억이 나지 않나봐."


미안해 어쩔줄 몰라하는 그의 얼굴을 뒤로 소녀는 현실에서 그가 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어. 서로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또다른 현실같은 이곳에서의 일들을 그가 먼저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뒤늦게 밀려드는 위화감에 소녀의 표정에서 당황스러움이 숨겨지지 않자 그는 허둥지둥 그녀를 달래주었어. 


"그, 그래도 같이 밥을 먹었다는거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살짝 붉게 달아진 그의 얼굴, 그리고 어색한지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모습에 큰 덩치와 달리 그가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란걸 알게된 소녀는 쿡쿡 웃음이 나왔지. 현실과 꿈 속, 두 사이의 모습은 조금 달랐지만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조금씩 확신 할 수 있었으니까. 


"스스로 말하기도 뭐하지만 '현실의 나'는 눈치도 없고 좋아하는 이야기만 나오면 정신없이 떠들어대는 바보라서... 이래저래 네가 이해 좀 해줘."

"아니야. 현실의 윤은 이곳의 윤과 똑같이 상냥하고 친절한걸."

"내 이름을... 알고 있네?"

"응. 그리고 내 이름은 '하루'야."

"하루..."


정말 예쁜 이름이야, 라고 그는 말하고 싶었지만 그는 입안에서 그녀의 이름을 작게 맴돌기만 했지. 스스로가 생각해도 예쁜 이름이라고 말하는건 너무 뻔하고 감동도 없는 시시한 멘트였으니 말이야. 그래도 정말 예쁜 이름이라고 마음 속으로 생각했지. 어느덧 시간은 길게 흘러 해는 조금씩 저물기 시작했고 그래도 그녀는 계속 그의 곁을 지켰어. 


"몸, 안아팠으면 좋겠다."

"노력할게. 하루."

'...이렇게 크고 따뜻한데 심장소리는 너무 약하고 느려...'


하루는 꿈 속에서 갑자기 피곤함이 밀려들어왔어. 그 말은 즉 곧 꿈에서 깨어난다는 뜻이었지. 그녀의 몸이 스르륵 그에게 기대지자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받아 안아주었지. 이대로 쭉 함께하고 싶었지만 그는 그녀가 잠에 빠져든다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린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렇게 그녀가 사라지면, 그는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거야. 그녀는 이 영원한 꿈 속의 전부였고 그녀를 무척 좋아했으니까. 


                                                                                 *


오늘도 그녀가 와줄려나, 윤의 하루는 그렇게 생각하며 시작되었어. 신기하게도 그녀를 만나니 평소 그를 괴롭히고 있던 통증이 많이 줄어들었지. 그 어떤 약과 치료도 해낼 수 없던 걸 그녀가 해냈다니, 그는 소녀의 존재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게 여겼지. 약간의 경계가 느껴졌기에 점심 쯤에 오려나 싶었지만 그의 예상을 가볍게 깨는 작은 말소리가 들려왔어. 


"윤."

"하, 하루...?!"


바로 왼발 밑에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작은 소녀가 서있었어.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나무를 바라보는 인간같은 모습 같았고 그는 화들짝 놀라 살짝 뒤로 물러난 뒤 조심조심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그녀를 감싸 안았어. 이젠 그의 손길에 거부감이 없어보였기에 다행이라 여기면서 말이야. 


"어, 언제 온거야?"

"방금."

"그...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나한테 올때는 멀리서 손 흔들어줄 수 있어?"

"응... 왜?"

"내 발 바로 옆에 있으면 위험하잖아.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그러고보니 그렇네. 미안해."

"미안할 것 까진 아니고..."


.

.

.


"주로 이 시간엔 뭘 하고 지내?"

"창과 갈고리를 깎거나 밧줄을 만들거나... 남은 고기를 손질했어."

"어떤 고기? 고기는 어떻게 손질 했는데? 요리를 하는거야?"

"아니, 요리는 안하고..."

"미, 미안... 너무 많은 질문을 갑자기 다 해버렸네."


그의 사과에 소녀는 꿈 속에서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어. 윤 스스로가 말하길, 자기는 좋아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눈치도 없이 이래저래 잔뜩 쏟아내는 바보라고 했었지. 그녀는 그것이 '바보' 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오히려 무관심하거나 무감각한 것이 바보라 생각했고 지금처럼 이야기를 나누것이 예전에 엄마, 아빠와 대화 하는 것처럼 똑같이 즐거웠거든. 혼자 있을 때는 죽을만큼 외로웠지만 자신에 대해 이것저것 궁금해하는 그가 좋았어. 자신의 이야기를 천천히, 충분히 풀으면 그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듣는 그의 얼굴도 그녀를 더 기운차게 만들어주었지. 


"괜찮아.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요리는 안해. 겨울엔 쥐고기가 제일 구하기 쉽고... 손질은, 거꾸로 매달아서 핏물을 다 뺀 다음에 약초를 넣고 재워뒀다가 뭐 구워놓거나 말려놓고 먹는거지."


하루는 자세하게 몸짓을 하며 그에게 고기 손질하는 시범을 보여줬어. 어떻게 해야 핏물을 잘 빼고 가죽을 쉽게 벗길 수 있는지, 그리고 무슨 약초를 써야 오래오래 남겨먹을 수 있는지, 까지 말이야. 물론 아무리 손질을 잘해놔도 날짐승 특유의 역한 냄새는 완전히 지우기 힘들었지만 살기 위해서라면 나름 먹을만하다고 생각했거든. 다만 이야기를 풀어내니 그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졌음을 눈치챘어. 화난건 아닌 것 같은 그의 눈동자는 다른 곳으로 향해있는게 무언가 다른 생각을 깊게 하는 것 같았지. 


"무슨 일 있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다만 식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

"응?"

"더 맛있는 걸로 말이야..."

"정말? 기대해도 돼?"


하루가 신난듯 밝게 물어보는 것과 반대로 그의 표정은 어디 전쟁에 나가는 전사처럼 비장하고 진지했었지. 그녀는 몰랐겠지만 평범한 사람들 입장에선 당연하게도 그런 음식을 먹으며 살아왔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윤은 조금만 더 그녀와 일찍 만났어야 했는데, 하며 후회했지. 후회해도 이미 시간은 돌이킬 순 없었지만 앞으로 잘 먹여야겠다고 진지하게 다짐했어. 


"그러고보니 다친 다리는 어때?"

"다 나았어."

"...뭐라고?"


당황스러워 되묻는 그에게 그녀는 대답 대신 다리에 감긴 붕대를 풀고 맨다리를 그에게 보여주었어. 그 상처는 분명 몇 주는 지나야 아물 수준이었는데 어느새 다리는 애초에 다치지 않았었다고 믿어도 될 정도로 말끔히 나아있었어. 보통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회복 속도에 그는 다행인 것과 동시에 놀라웠고 경이로웠지. 한편으로는 부럽다는 마음과 함께 말이야. 


"눈으로 보고 있지만... 믿겨지지가 않네."

"왜?"

"나같은... 하루 입장에서 '거인'들은 그정도의 상처는 단순히 치료를 하고 며칠이 흐른다고 금방 낫지 않아.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해."

"음, 거인이라고 다 좋은건 아니었네."

"그렇지?"


그녀의 솔직한 대답에 윤은 웃으며 잠시나마 괴로웠던 현실을 잊을 수 있었어. 여태까지의 삶과 현실들은 괴로운 투병 생활이 전부였는데 하루를 만나고 나서는 매 순간이 동화 같았거든. 만난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같이 식사도 하고 서로의 규칙을 정하고 새오로운 사실도 알아가고 이렇게 소소한 이야기까지 하나하나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즐거웠던 거야. 


                                                                               *


"나 부탁이 있어."

"뭔데?"

"윤의 심장소리, 듣고 싶어."

"으, 으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라는 표정을 그는 숨길 수 없었어. 하지만 그의 반응과 반대로 소녀의 부탁엔 단 한 점의 가벼움도 없었지. 무언가 결의에 가득찬 모습에 그는 어쩔줄 몰랐지만 그래도 무슨 이유가 있겠지, 하며 그녀를 이해했어. 소인들끼리는 서로의 심장 소리를 확인하는 문화라도 있나, 하면서. 


"확인할게 있어서 그래."

"잘 이해는 안되지만... 어려운 부탁은 아니니까."


그녀의 부탁에 그는 작게 한숨을 쉬며 그녀를 한 손에 감싸 쥔 채로 침대로 향했어. 그리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뒤, 배 위에 그녀를 내려놓았어. 그러자 그녀는 바로 그의 넓다랗고 따뜻한 언덕같은 배에 발을 딛고 그의 심장이 있는 가슴쪽에 귀를 귀울였지. 서로의 조용하지만 어색한 기류가 흘렀고 윤은 의식하고 싶지 않았지만 작은 여자아이가 배, 가슴 쪽에 가까히 올라와 자신의 심장소리를 듣고 있는 이 상황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이 빨리 뛰고 있었어. 게다가 심장은 계속 기분좋게 간질거렸고 그랬기에 하루에게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지. 한편, 심장소리를 듣던 하루는 그의 속마음은 전혀 모른 채 그의 심장이 힘차게 뛰고 있는 소리에 내심 안심했지. 


"응. 확실히 잘들려."

"하핫, 당연하지. 뭐가 걱정되서 확인한거야?"

"아, 아무것도..."

"뭐... 궁금증이 해결 됐다면 그걸로 됐다만."


그녀의 속마음을 이해 못한 채, 그는 눈만 깜빡깜빡거린채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어. 사실 몸이 안좋은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직감을 존중해주었던 거야. 몸이 커서 들키지 않을 것 같았는데, 오히려 몸이 크니 작고 섬세한 그녀가 더 알아차리는게 빨랐을지도 모를 일이었지. 그치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추측이었고 사실 하루는 꿈 속에서의 그의 모습을 알고 있다는 건 전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러고보니 윤은 예전에 살던 곳에서 왜 이곳으로 온거야?"

"그, 그거야... 여기가 산 좋고 물 좋은 곳이니까... 사람 많이 모여있는 곳에서 살면 건강에 안좋아."


아파서가 아니라? 라고 다시 물어보고 싶었지만 하루는 그의 어색한 거짓말에 무던히 고개를 끄덕였어. 몸이 아파서라고, 대답하고 싶지 않은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거든. 꿈 속에서의 그는 자신의 아픈 몸을 좋아하지 않았어. 쇠사슬에 묶여 침대에서 한 발자국 나가지 못하는 무력한 자신을 말이야. 그 사실을 하루는 모를리 없었고 자신에게만큼은 병약한 모습을 보여고 싶지 않은 그런 그를 이해했지. 아프고 약한 모습을 다른 존재에게 보여준다는건 그녀가 살아왔던 삶에서 절대 있어서는 안될, 바로 목숨을 잃는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어, 밖에 눈온다."


어느새 둘이 함께 있던 침대 옆 창가에는 늦은 밤 눈이 내리고 있었어. 사실 둘은 서로 각각의 삶을 살아오며 둘 다 눈이 내리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었어. 윤은 몸이 약해서, 하루는 몸이 작아서. 그렇게 각각의 이유로, 눈이 내리면 몸이 얼어붙고 점점 쇠약해지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째서일까 이렇게 함께 눈이 내리는 걸 구경하니 꽤나 운치있다고 느껴졌어.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밤이었지.


"이정도 눈발이면 내일 쌓여있겠는데... 예전에 하루는 눈이 쌓이면 많이 불편했겠어."

"차갑고 얼어붙는건 최악이었지만 그래도 녹으면 마시는 물로 쓸 수 있어서 마냥 나쁜건 아니었어."


하루의 진지한 대답에 윤은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어. 아무리 작고 약한 존재여도 살아나갈 방법은 찾아 이겨내는 것이 당연한건데 그녀가 어린 아이라는 이유로 너무 과하게 걱정하는건 오히려 그녀의 존재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지. 따지고 보면 그녀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몇 개월의 공백 안에서도 소녀는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살아갔으니까. 


                                                                                 *


이른 아침, 둘은 집안이 아닌 집 뒤 눈이 쌓인, 고요하고 넓은 시골 들판에 함께 있었어. 이렇게 깨끗한 눈이 소복히 쌓인건 이번 겨울이 처음이었기에 그나 그녀나 그 장관을 가까히서 느끼고 싶었거든. 다만 서로가 혼자였다면 윤은 감기 걸리니 딱좋다고 안나가고, 하루는 이렇게 쌓이면 이동하기 힘드니 눈밭에 가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둘이니 그는 이 풍경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고, 그녀는 그의 도움으로 편하게 올 수 있었지. 그가 애지중지 손으로 감싸서 이 눈밭에 올라왔거든. 차갑지만 깨끗한 바람을 느끼며 둘은 뭘 할지 잠깐 고민하다 그가 먼저 무릎을 꿇고 그녀를 내려준 뒤 손바닥만한 작은 눈덩이 굴리기 시작했어. 


"뭐하려고?"

"일단 봐봐. 하루도 이거랑 똑같은 눈덩이 하나 만들어줄래?"

"응."


그녀도 그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눈덩이를 만들었지. 둘은 맨손으로 눈을 만져 손이 빨개진지도 모른 채 열심히 만들기 시작했고 둘의 모습은 영락없는 꼬마 아이들 같았어. 그렇게 둘이 만든 눈덩이는 크기가 비슷했지만 하루가 굴리는 눈덩이는 하루에게 손바닥만한 크기가 아니라 거의 허리 이상의 크기라 그가 옆에서 조금 도와주었어. 그렇게 눈덩이 하나랑 조금 작은 눈덩이 두개가 준비 되었고, 그는 작은 눈덩이를 큰 눈덩이 위에 올려놓자 조그만 눈사람이 만들어졌지.


"이렇게 작은 눈덩이를 큰 눈덩이 위에 올리면 눈사람 완성이야."

"눈으로 만든 사람이라..."


하루는 신기한 눈빛으로 눈사람을 쳐다봤어. 그리고 뿌듯한 표정의 윤도 올려다보았지. 다만 신기하다는 감정은 눈사람보단 윤에게 더 느껴지는 감정이었어. 자신보다 훨씬 오래 살은 어른임에도 어린아이같이 천진난만했거든. 철없다거나 유치하다는 것이 아닌, 정말 자신을 즐겁게 해주고 싶어서 순수한 마음으로 눈사람을 함께 만들자 한 것이었으니까. 그런 솔직한 그를 이제, 더 이상 싫어할 수 없었지. 그녀는 그가 모르게 살짝 미소지었어.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 챌리 없는 그는 그녀와 썰매를 타겠다고 미리 챙겨온 포대자루를 꺼내며 눈을 빛내자 하루는 태연하게 그것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어. 뭔가 우당탕할 일이 벌어질 것 같지만 일단 그가 하고 싶은대로 내버려두고 싶었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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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돼... 어디다 흘려버린거야 바보같이..."


그녀의 예상이 적절하게 들어맞듯, 불과 몇 분이 채 지나지도 않았음에도 그는 눈밭에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사라진 무언가를 찾고 있었어. 그것은 핸드폰도, 지갑도 아닌 바로 작은 소인인 '하루'였지. 분명 오른손에 가볍게 그녀를 감싸고 눈썰매를 탔는데 눈썰매는 후반쯤에 중심을 잃은 채 뒤집어져버렸고 윤은 그대로 푹신한 눈밭에 두세번 굴러버리고 말았어. 그러다 그녀를 어디다 흘려버린 것이겠지. 최악의 상황이라면 그녀는 차가운 눈 속에 기절해 묻혀있겠거나. 윤은 자신의 철없는 행동에 후회하며 제대로 된 생각이 돌아가지 않았어. 좀 더 조심스럽게 했어야 했는데 너무 행동만이 앞서 버렸으니까.


"나 찾는거야?"

"하... 하루...?!"


그때, 그의 머리 위에서 살짝 무게감이 그제서야 느껴지더니 조그만 소녀가 빼꼼 그의 시야에 내밀며 말을 걸어왔어. 그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위로 올리자 그녀는 자연스레 그의 손 안으로 들어왔지. 


"다... 다행이다... 아까 썰매가 넘어져 뒹굴었는데 어디 튕겨져버린 줄 알고..."

"튕겨나가질 뻔 했는데, 그냥... 그러면 한참 혼자 걸어와야되니까 그건 싫어서 윤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있었지."

"미안해. 많이 어지러웠을텐데. 어디 다치진 않았어?"

"괜찮아. 오히려 엄청 재밌었어. 몸이 공중에도 오랫동안 떠보고 말이야."


하루가 키득거리며 웃자 그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어. 그 빠른 찰나에도 작은 그녀는 그 순간순간이 느리게 보일 정도로 감각이 좋아서,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거야. 어느새 하루의 머리 위에 살짝 쌓여있던 눈이 녹아 물방울이 되자 그는 머쓱하게 엄지손가락으로 그 물방울을 튕겨내주었지. 이만 몸이 으슬으슬하니 슬슬 돌아가자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녀는 한번 더 타고 싶었지만 그의 성격으론 허락해줄 것 같지 않아서 그러자고 고개를 끄덕였어. 썰매를 타는 것도 좋지만 그와 함께 따뜻한 집안에서 추운 몸을 녹이며 여유롭게 차 한잔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


다음 날 아침, 하루는 그가 준비해 준 작은 이부자리에서 몸이 따뜻한 기운이 맴돌아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어. 더 이상 춥고 먼지 쌓인 은신처가 아닌 그의 침실 옆 작은 좌식 테이블에 마련 되어있는 그녀만의 잠자리였지. 작게 칸막이까지 되어있어 꽤 아늑해보였고 좌식테이블은 아래엔 그녀가 자유롭게 내려갈 수 있게 푹신한 쿠션이 몇 개 놓아져있었어. 하루는 가뿐하게 쿠션에서 점프해 바닥에 닿았고 바로 옆 침대를 올려다보았어. 보통의 인간이라면 족히 4-5m는 되어보일 높이를 그녀는 밧줄이나 갈고리같은 도구 없이 맨손으로 가뿐히 올라갔지. 꽤나 조용한 분위기에 아직도 그가 자고 있나 싶어 호기심이 생겨 확인해보려는 것이었어. 빼꼼 고개를 내밀자 구녀의 예상외로 윤은 작은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어. 하지만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 평소와 달리 그의 눈가는 어두웠고, 힘겨워보였지. 얼굴엔 식은 땀까지 맺혀있었어. 뭔가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지. 

 

"어디... 아파?"

"너무 추운 곳에 있으면 걸리는 병이야... 내가 이런 데는 좀 약해서."

"밖에 오래 있었잖아. 알고도 오래 있던거야?"

"하하... 너무 신나서 그만..."

"... 심각한 건 아니지?

"응. 며칠 쉬면 나아."


그는 골골 거리며 이불을 좀 더 어깨까지 끌어올렸어. 그도 원해서 감기에 걸린 건 아니라 조금 억울했지만 그래도 어제 하루와 눈밭에서 즐겁게 놀았으니 잘못에 대해서 어느정도 수긍해야만 했지. 꼼짝없이 누워서 쉬어야했기에 윤은 이대로 잠이라도 더 자서 시간을 보내야 될 것 같아 눈을 꼭 감았지. 하지만 익숙하게 느껴지는 시선에 금새 눈을 뜨게 되었고 자신의 가슴팍 위에 올라와 있는 하루와 눈이 마주쳤지.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불안한건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 보고 있었어. 마치 철부지 아들을 보는 엄마 같은 모습이었지. 하루는 단순히 그가 걱정되어 올라왔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몸과 하루가 가깝게 닿은 것이 더 의식되었기에 다시 심장이 빨라지고 있었어. 그런 줄도 모르고 그와 눈이 마주친 하루는 천천히 그의 얼굴 쪽으로 가까히 다가왔고 그는 옴짝달싹 움직일 수 없었지. 놀라서 갑자기 움직이면 그녀가 다칠 수 있었으니까. 


"하.. 하루...?!"

"역시 걱정 되서 말이지."

"걱정 되는건 알겠는데 이렇게... 가까히 있으면 안돼.."

"왜?"

"이건 하루도 걸릴 수 있거든."

"괜찮아. 같이 걸리면 되지."

"그치만..."

"그치만."

"으... 안된다니까아..."


능글스런 그녀의 고집스러운 대답에 그는 무어라 대꾸하려다 들었던 고개를 푹 베개에 힘없게 내려놓았어.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단순한 감기여도 약해진 몸은 꽤나 지쳐있었거든. 더군다나 그녀를 말려서 멀리 떨어트려놔도 그녀가 좋아할리도 없었고 그냥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게 낫겠다 싶었어. 어느덧 하루는 누워있는 그의 얼굴 넘어 어느새 이마 옆, 베개에 살짝 발을 딛고 기대고 있었어. 그리고 천천히 작고 하얀 손으로 뜨거운 그의 이마와 땀에 살짝 젖은 밤색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었지. 작지만 부드럽고 상냥한 손길에 아파서 지쳐 퀭했던 그의 눈빛은 점점 살아나기 시작했어.


"내가 왜 자꾸 윤이 안된다해도 고집부리면서 곁에 있고 싶은건 말이야..."

"응..."

"아픈데 누군가 곁에 없다는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슬프고 괴로우니까. 아픈 것보다 더..."

"..."

"그래서 함께 있어주고 싶어."


그녀의 위로에, 윤은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지. 서로 공통점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던 그녀와 자신이, 어떻게 가까워질 수 있을까 했던 걱정들이 이렇게 간단하게 사라질 정도로 그리고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가 과도하게 다가갈 필요도, 그녀가 무리하게 용기를 낼 필요도 없었지. 그녀는 단순히 숨쉬고 살아움직이는 생명체가 아닌 똑같은 감정과 생각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어느새 그녀는 그의 얼굴 곁에 앉아 다시 눈이 내리는, 흐리고 어둑해진 창가를 바라보며 그를 지켜주었지. 그 덕분일까 감기에 걸린 괴로운 몸이었는데도 그는 한번도 깨지 않고 다시 편안하게 잠에 들 수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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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주신 분들 감사감사콩


윤은 원래 지금보다 더 무뚝뚝한 성격으로 하려 했는데 어쩌다보니 말많고 상냥한게 패시브가 되어버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