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은 격변의 해였다. 


5월 9일 동옥 외무부가 받은 삼국 통일에 관한 기밀 문서가 어찌 된 영문인지 유출되고 말았다. 시민들은 처음에는 반신반의 했으나 본디 루머에 대해서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던 정부가 과잉 진압을 했다. 그리고 5월 13일, 외무부 제3차관 김성옥이 '통일 논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폭로함과 동시에 사직하고 잠적했다. 


5월 15일, 통일반대자주권수호본부(수본)가 조직된다. 총수에 장경대학 96학번 이범수가 되었다. 수본은 평해군 일대를 장악하고 왜 통일이 이루어지면 안되는지 주민들에게 연설한다. 군은 수본을 반체제 인사들로 지정하고 지명수배를 내리려 했으나 경찰의 반대로 실패한다.


5월 19일, 마침내 중앙거리에서 <통일 반대! '98 자주권 수호 궐기대회>가 열린다. 많은 사람을 불러오지 못했음에도 소식을 듣고 동옥 전국에서 86만명이 모여 집회를 열었다. 이 날 경찰은 정부청사와 장경시청을 부수려는 시민들을 제지하기 위해 최루탄을 사용했다. 고무탄 사격을 했으나 이것이 잘못 맞아 이신주(장경대학 95학번, 이신희 후보의 친척)가 사망한다.


5월 20일, 장경대학에 조기가 걸린다. '신주 선배님을 되살리라!' '그의 죽음을 헛되이 말게 하자' 등의 현수막이 걸렸다. 정부는 장경시 전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통행금지가 내려졌지만 분노한 국민들에게 그것은 보이지 않았다. 


5월 21일 오후 2시였다. 장양궁부터 중앙거리 끝까지 230만명이 모여 시위했다. 계엄군은 무장하고 시민들을 진압했다. 더욱 더 격렬해진 시위세는 인원이 줄었어도 강경파는 늘어나 결국 정부청사에 시위대가 들어와 국무부청이 반파되고 중앙동사무소가 방화되는 비극을 낳는다. 진압 과정에서 103명이 사망하고 24,191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231,148명이 연행되었다.


98사태는 장경의 비극으로 일컬어진다. 시민들의 염원에도 결국 통일은 막지 못했으며, 통일이 되는 순간 중앙광장에는 울다가 실신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