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시작
한국전쟁은 39도선을 기준으로 하여 휴전선이 설정되면서 끝났습니다. 정부는 남평양을 소개시키고 그곳 인구를 38도선 이남 대한민국 령으로 남하하지 않도록 규재하면서 38도 9분 즈음을 최종 인구남하 한계선으로 설정하고 1.4후퇴당시 대한민국 령으로 남하한 피난민들을 재수복 지역에 귀향시키는 한편, 여전히 북한령으로 남은 지역 피난민들은 화천에 수용하기로 결정하면서 재령군 남부 읍면 몇개가 화천군으로 분리 독립되면서 화천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966년 화천시로의 승격
정부는 1966년 화천시를 시로 승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화천은 이제 군이 아니라 어엿한 황해도의 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1981년 그리고 직할시로
제5공화국 정부는 화천시를 광주,대구,인천등 다른 대한민국의 대도시들과 함께 북부지방과 황해도를 대표하여 드디어 황해도에서 분리시키며 직할시로 승격하였습니다.

1991년 불안한 통일전야
1991년 4월 1일 북한정부의 갑작스런 남방한계선 국경개방 선언이 처음 전세계로 전해졌을때 모두는 그것을 만우절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1991년 12월 31일, 남북한 통일조약이 발효되기 하루전, 매천시민들은 통일시대에 대한 희망과 불안감을 모두 느끼고 있었습니다.

2000년 새로운 밀레니엄
통일충격으로 인해 발생한 1997년 외환위기와 또한차례의 쿠데타시도, 그리고 쿠데타의 실패와 함꼐 구 북한군 세력의 주도로 발발한 내전은 수개월만에 평양등 북한 구수도권 전역에 막대한 피해만을 남긴채 대한민국의 승리로 마무리되며 완벽하게 민족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화천광역시는 외환위기와 내전이 이지역에 남긴 그림자를 수습하고 2년후로 다가오는 2002년 한일월드컵 성공시켜야합니다. 

2026년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참여정부의 공약대로 평양이 통일시대 신행정수도로 지정되면서 평양을 대체하기 위해 화천에 있었던 대부분의 정부청사들이 평양으로 이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천의 인구는 수도권과의 접근성이 더 가깝다는 점때문에 예전만은 아니지만 일정한 수치를 지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