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한국전쟁 중 1.4후퇴가 UN군과 국군에 의해 성공리에 이루어지고 맹조의 발톱작전이 실행되면서 53년 결국 평양~원산선을 기준으로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평양은 대동강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안보를 이유로 남 평양에서 소개시킨 주민들과 북한에서 1.4후퇴당시 같이 내려온 대량의 피난민들이 남한사회에서 여러 문제를 일으키자 이들을 도로 이북지역에 수용하며, 평양을 무인지대화 했지만 이북지역을 포기한다는 뉘앙스는 정통성 때문이라도 도저히 한국정부 입장상 보일수가 없는 노릇이었고 지역균형발전론 이란 명분까지 더해지면서 50년대 이를 감안한 이북지역의 새로운 이북지방 중심도시를 건설한다는 계획인 '화천계획'이 수립되었다. 

4.19를 거치면서 2공화국이 수립되고 5.16군사정변과 군정기간에도 계획은 수정 보완되었고 결국 3공화국때 국토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화천시 종합개발 계획의 첫삽이 떠졌다. 그리고 이북지방 주민들의 민원소요 때문에 굳이 서울에 두지 않아도 되는 외청들 일부와 지청개념의 정부기관들이 구색맞추기와 생색용으로 이전이 추진되면서 화천계획은 제2수도 건설계획으로 수정, 확대되었다.

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수도 서울과 무인지대화한 평양 중간에 위치한 황해도 재령전체,신천,사리원시,벽성군 등에서 각각 읍면 1,2개를 가져와서 더해 설정한 신도시가 '화천시'이다. 이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한 사람이 재령 송암출신 육군공병대령 '이동영' 이다. 본래 인구 5만명을 목표로 계획된 도시였으나 당초 계획자들의 예상을 뛰어넘은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결국 막대한 생활용수를 감당하기 위해 은파호, 장수호, 아양호등 인공호수와 이들을 잇는 인공수로인 '송암강'이 주한 UN군의 도움을 받아 국군 공병대가 건설을 추진했다.  

50년대에 계획자체는 수립되었지만 실행은 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으며 이때 얻어진 경험으로 이후 서울및 수도권의 도시개발 계획의 기초를 세웠다. 사실 한국전쟁 이후 이미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대규모 인구를 분산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81년 직할시로 승격되었으며, 95년엔 광역시로 개칭되어 오늘날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