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가득 메운 등불, 끝을 모르고 늘어진 노점, 거리를 채우는 음악,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음식 냄새, 감추지 못하는 고양된 표정, 무질서한듯 질서 있게 거니는 사람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린세와 만홍이 있었다. 


 

“설마 배가 한대도 없을 줄이야.”


 

“외교부도 수배를 못할 줄은 몰랐습니다.”


 

개벽의 날을 앞두고 대양을 건널 정도로 큰 배들은 선원 부족이나 물류랑 폭증으로 여객 운송을 중단했다. 공무수행을 위한 것도 아닌 단순 귀국편을 구하는 린세와 만홍의 노력은 거대한 국가적인 사건을 앞에 두고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자 린세는 이렇게 된김에 마음을 놓고 놀자는 제안을 했다. 달리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닌 만홍은 수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본격적인 행사에 앞서 전야제에 나온 둘은 엄청난 인파에 압도되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이는 축제인줄은 몰랐네요.”


 

둘 모두 살면서 충분히 많은 개벽의 날을 맞이했지만, 수도 훼이징(黑京)에서 맞이하는 건 처음이었다. 탄트라 최대의 명절이라는 것만 알았지 이정도일 줄은 모르고 있었다. 


 

“붙어있지 않으면 떨어질 것 같군요.”


 

둘은 서로 떨어지지 않게 주의하며 인파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지나가며 한번쯤 구경해보고 싶은 가게들이나 장식들이 나오긴 했으나 사람이 너무 많아서 멈출 수가 없어 그냥 지나쳐야 했다. 


 

담배가게, 옷가게, 국수가게, 빵가게, 튀김가게, 과자가게, 음료가게, 장난감 가게 등등 조금씩 구경만 해도 하루는 족히 갈 것 같았다. 린세는 기회를 엿보다가 틈이 나자 만홍의 손을 잡고 그쪽으로 갔다. 


 

“어서옵쇼! 정해지면 말해주세요.”


 

“새우랑 달걀, 그리고 고수 약간으로 2개요.”


 

“네! 금방 나옵니다!”


 

볶음밥. 너무나도 간단한 음식. 그러나 둘에겐 다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 나왔습니다!”


 

활기찬 점원에게 그릇을 받은 린세는 길에서 조금 떨어진 인적 드문 곳으로 향했다. 간신히 한숨 돌리게 된 둘은 자리를 펴고 앉아 각자 하나씩 볶음밥을 먹었다. 


 

“음. 괜찮네요. 새우도 나름 신선하고요.”


 

“괜찮은 것 같습니다.”


 

둘은 축제의 소란을 한발짝 뒤에서 감상하며 볶음밥을 먹었다. 두 손으로 세기도 힘든 재료가 들어간 볶음밥은 어느 하나 튀는 것 없이 자연스럽게 섞여서 하나의 맛을 자아냈다.


 

마치 수많은 사람들이 섞여 있음에도 어지러지는 일 없이 유지되는 행렬과도 같았다. 그 조화로움에 쉽사리 빠져나오기 힘든 것도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저희 첫 식사도 볶음밥이었죠.”


 

갑작스럽게 휘말린 사건때문에 혼란스러운 와중 간신히 입안에 우겨넣은 음식이었다.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랬죠. 그떈 배고파서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게 고작 만나고 이틀만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 지금 와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둘의 관계가 평범하게 이어졌어도 언젠가는 지금처럼 가까워졌을지 모르지만, 그 일련의 사건들이 기폭제가 된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사무적인 관계로 시작한 만남은 크고 작은 고난을 거쳐 탐스러운 과실을 맺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고난과 역경을 거쳐 맺어진 과실들은 둘의 양분이 되어 뱃속으로 들어갔다. 


 

“사실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네요.”


 

공복에 볶음밥은 봄바람에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땐 이렇게 될줄 몰랐는데 말이에요.”


 

“그 상황에서 앞날을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백호님 뿐일 것 같습니다.”


 

린세는 빈 식기를 만지작거리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구름 한점 없이 맑은 저녁하늘은 보는 이의 기분마저 맑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전 그래도 좋았어요. 그 일들이 있었던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란펑을 만나지 못한 린세가 다시 백호 앞에 서기 위해서는 대체 무슨 업적을 세워야 하는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또한 만홍이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만홍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앉아있는 린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홍에겐 별다른 사심 없이 행동일지 몰랐으나 린세는 감격스러운 기분으로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린세가 일어난 뒤 만홍은 손을 놓으려고 하였으나 린세는 더욱 힘을 주어 만홍의 손을 잡았다. 만홍은 동요하는 대신 자연스럽게 반대쪽 손을 내밀어 린세의 식기를 가져왔다. 


 

“갈까요?”


 

“네.”


 

노점에 식기를 반납한 둘은 그대로 손을 잡은 채로 다시 행렬에 합류했다. 겨대한 한무리가 지나간 뒤인지 방금 전보다는 훨씬 걷기 편한 밀도가 되어있었다. 


 

덕분에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긴 둘은 노점을 이리저리 건너다니며 구경했다. 물속에 잠긴 나무토막을 건져서 경품을 받기도 하고, 솜사탕을 하나 사서 나눠먹기도 하고,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듣거나 칼을 던지며 불을 뿜는 사람의 공연을 보거나 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둘의 손은 끊어지는 일 없이 이어져 있었다. 


 

“조금 더운 것 같은데, 잠시 숨 좀 돌릴까요?”


 

날씨는 그다지 덮지 않았으나 인파에 쌓여있으니 왠지 열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러죠.”


 

만홍은 차갑게 식힌 차를 사서 행렬에서 벗어났다. 


 

잠시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빠져나온 둘은 차가운 차를 마시며 열기를 식혔다. 갈증에 자기 몫의 차를 단번에 마신 린세는 물끄러미 차를 마시고 있는 만홍을 보았다. 


 

“제 몫도 드시겠습니까?”


 

린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말했다. 


 

“한가지만 부탁해도 될까요?”


 

만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만홍 씨의 피를 마셔도 될까요?”


 

린세는 남에게 자기 취향을 권하는 경향이 있고, 쉽게 흥분하는데다 상당히 감정적이었다. 그러나 절대 고의로 선을 넘거나 악의를 가지고 행동하는 법은 없었다. 


 

그런 맥락에서 린세는 자신이 마족이라는 것을 가능하면 부각시키지 않으려 했다. 사회생활을 하며 당연히 지켜야 하는 규범이었고, 상대의 기분을 존중하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그런데 린세가 자신의 마족으로서의 특성을 드러내었다. 만홍으로서는 린세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요구를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절대 경솔하거나 가벼운 생각으로 나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만홍은 흡혈귀 이야기에 나오듯 목덜미를 내밀어야 하는지, 만약 목덜미에 상처가 나면 어떻게 가려야 하는지 등의 고민이 들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린세가 요구한 것은 전혀 다른 곳이었다.


 

“팔뚝이면 돼요.”


 

린세는 잡고 있던 만홍의 팔을 들어 소매를 걷었다. 그리고 천천히 팔뚝에 입을 가져다 댔다. 만홍이 한번도 이상하다 생각해본적 없는 린세의 눈이 오늘따라 유난히 붉게 느껴졌다. 


 

“아!”


 

둔탁한 통증이 있고 이내 따스함, 그리고 포근함으로 변했다. 절대 상처가 났을 때 날 감각이 아니었다. 


 

린세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다. 만홍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 광경에 숨쉬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린세를 바라보았다. 


 

“하아……. 고마워요.”


 

린세는 한껏 달아오른 표정으로 입을 땠다. 만홍의 팔뚝엔 자그마한 구멍 2개가 남았다. 신기하게도 피는 나지 않았다. 


 

약간의 빈혈기가 가져오는 몽롱함에 만홍은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만홍은 생각하는 대신 자신의 팔을 신기한듯 둘러보다가 말했다. 


 

“조금, 놀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잠시 너무 달아올라 버려서……. 몸에 해가 있거나 하진 않을 거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린세는 상기된 얼굴에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멋쩍게 웃었다. 만홍은 자신도 뭔가 기분이 상기되는 것을 말했다. 


 

“괜찮습니다. 진정되시면 이동하도록 하지요.”


 

만홍은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차를 린세에게 내밀었다. 린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받아들고 조금씩 마셨다.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어색한 느낌보다는 서로 여운을 느낀다는 감각이 강했다. 


 

“예전에 제가 했던 말 기억하시나요?”


 

린세의 물음에 만홍은 작게 웃었다. 린세도 이내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멋쩍게 웃었다. 


 

“생각해보니 제가 너무 많이 말했죠? 그러니까 제가 만홍 씨가 매력이 없는 것 같으냐고 했던거요.”


 

“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만홍은 곧장 대답하는 대신 린세가 들고 있는 차를 가져와 입안에 털어넣었다. 그리고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습니다. 저는 속국 출신이고, 키도 작고, 생긴 것도 보잘것 없고, 성격도 어둡고, 능력도 없으니까요.”


 

만홍은 청산유수처럼 자신의 못난 점을 늘여놓았다. 린세는 좋은 점을 저렇게 늘여놓았으면 했지만, 아직 만홍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이런 저라도 영사님이 마음을 주신다는 건 제게 무언가 매력이 있다는 거겠지요.”


 

만홍의 말은 끝까지 자학하는 내용이긴 했으나 그래도 린세의 말을 부정하지 않는 선에서 끝마쳤다. 


 

“아쉽네요. 제가 이렇게 마음을 표해도 그게 끝이라니요.”


 

린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만홍의 팔뚝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타고난 천성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 법이었다. 그래도 사람간의 관계는 변할 수 있었다. 


 

“괜찮아요. 차차 익숙해지면 되는거죠.”


 

린세는 가볍게 만홍에게 입맞춤을 했다. 만홍은 다소 놀라기는 했으나 당황하거나 하지 않고 담담히 입맞춤을 마쳤다. 


 

“히히, 가죠. 좀 더 둘러봐요.”


 

“네.”


 

둘은 방금 전보다 강하게 손을 맞잡고 다시금 행렬에 합류했다. 앞으로 걸음을 옮기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인파가 있었다. 그럼에도 마치 다른 세계의 존재인 듯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걷고 있는 자를 보았을 때 린세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영사님.”


 

“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게 새하얀 소녀. 소녀는 기묘한 공간을 만들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주위의 사람들은 그녀를 인식하지 못함에도 자연스럽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구경하던 소녀는 뒤의 둘을 발견하자 반갑게 미소를 지었다. 


 

“쉿.”


 

검지를 입술에 대고 작게 말한 소녀는 그대로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즐거운 개벽의 날이 되길, 젊은 연인들이여.”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이 그것이 조용한 축복임을 알아차리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늘이 공인해준 연인인 거군요. 저희.”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둘은 잠시 멍하게 길 한가운데 서있다가 이내 들이닥친 인파에 강제로 앞으로 이동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요.”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둘은 붙잡은 손을 다시금 고쳐 잡고 축제의 현장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시대를 기념하는 축제는 시간을 모르고 이어졌다. 사람들의 열망이 사그라들지 않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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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로 린세의 얘기는 끝


뭔가 길었네


그래도 잘 마무리 돼서 다행이야


곧 다른 이야기로 돌아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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