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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요동-요서에서 이 지역에 걸쳐 고조선인이 살았고 고조선의 영역이었다.

한 군현

고조선 멸망 이후 한의 4군현이 설치되었다.

중화민국의 영역은 낙랑군의 영역에 속했다.

고구려

고구려로 이름을 바꾼 졸본부여가 빠르게 세력을 넓혀나갔다. 한군현은 황해도,평안도 지역에서 점차 요동으로 밀려난다.

이후 나당연합군에 멸망할때까지 이 지역은 고구려에 속한다.

예멕계 유이민들이 정착하면서 예멕화되었다.

당의 지배

나당연합군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다.

대동강-원산만을 경계로 이남은 신라 이북은 당이 지배하면서 평북은 당의 영토가 된다. 이후 이 지역에 살던 고구려 유민들은 영주로 강제이주되거나 신라로 이주하였다.

발해의 지배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이 발해를 세우고 이 지역은 다시 예멕계 국가인 발해에 복속된다. 신라와의 교역로가 지나는 요충지로 번영하였다.

거란(요)의 지배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한 이후 이 지역은 다시 중원계 국가의 땅이 되었다. 남쪽에서 후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의 패자가 된 고려는 대동강 이북으로 북진을 시도했다. 결과로 청천강-영흥만 이남이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고려는 청천강 이북으로 확장하려 했지만 유의미한 영향을 주지못했고 청천강영흥만 경계는 고려의 전기국경으로 굳어졌다. 발해멸망 이후 거란과 고려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이 지역은 강동 6주라 불리며 거란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금의 지배

거란의 지배 아래 있었던 여진족이 통합하여 금을 건국하게 된다. 곧 거란은 금에게 밀려나고 이 지역은 금의 지배를 받게되었다.

원의 지배

거란을 멸망시키고 영원할것 같았던 금나라도 마침내 명을 다했다. 칭기즈칸의 몽골족이 금나라와 강남의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했다. 그런 몽골족이 고려가 탐나지 않을리가 없었다. 몽골족이 고려를 침공할때 강동지역은 다시 전진기지가 되었다. 강화도에서 버티던 고려는 결국 몽골과 화친했고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고려는 이때 많은 영토를 상실했는데 강동지역은 원이 고려에게 빼앗은 평남지역과 묶여 동녕부가 설치된다. 

1290년에 고려의 끈질긴 요구로 서경평남지역은 반환되었지만 여전히 강동은 원의 동녕부 영토로 남았다.

고려의 지배

원의 세력이 약해지자 공민왕은 반원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자

원나라의 평장사(平章事) 기새인티무르(奇賽因帖木兒)가 그의 부친 기철이 고려에서 참형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원나라 유민을 모아 동녕부에서 침공해왔다. 1369년(공민왕 18년) 음력 12월 고려에서는 이인임을 총지휘관이자 서북면 도통사로 하고, 이성계를 동북면 원수, 지용수(池龍壽)를 서북면 원수, 양백안을 서북면 부원수, 임견미를 안주상만호로 삼고 군사 1만 5천을 주어 원나라의 동녕부를 치게 하였다. 의주성을 함락하고 압록강을 건너 요양을 공격하여 성을 빼앗았다. 그러나 이는 고려의 장기적인 지배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부근 주민들에게 고려에 귀순할 것을 권고하고 회군하였다. 그러나 압록강 이남에서는 고려의 실효지배가 유지되었다. 이후 조선이 건국될때까지 이 지역은 고려의 영토로 존속한다.

명의 지배

원을 몰아내고 한족농민반란군이었던 주원장이 명을 세웠다. 주원장은 압록강 지역에 군사를 배치하고 조선에 이 지역을 반환할것을 요구했고 결국 조선은 강동지방을 명에 반환한다

이후 청이 들어설때까지 쭉 명나라의 영토로 남는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국경을 넘어 안주에 피난온적이 있다.

명은 만리장성을 이 지역까지 건설했다.

청의 지배

명이 쇠퇴하고 여진족들이 다시 모여 만들어진 후금이 산해관을 넘어 중원을 차지하게 된다. 이 지역은 요동과 함께 제일 먼저 후금의 지배로 떨어졌다.  후금은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이 지역은 요양성에 편입되어 유지되었다.

또한 봉금정책으로 인해 한족의 유입이 엄금되었던 지역이었다. 이때 청천강과 두만강을 건너 조선인들이 불법이주했다.

중화민국의 지배

1860년 청 정부는 만주를 한족들에게 열기 시작했고, 얼마 가지 않아 한족은 이 지역의 주요 민족 그룹이 되었다. 1907년 봉천(중국어 정체자: 奉天)성이 현재의 랴오닝 성에 세워졌다. 강동은 봉천성에 포함되었다. 러일 전쟁 동안 주요 전투의 다수가 랴오닝,강동 지역에서 행해졌다. 20세기 전반의 군벌 할거 기간 동안은 봉천 군벌 장쭤린(중국어 정체자: 張作霖)과 그의 아들 장쉐량(중국어 정체자: 張學良)의 통치 하에 있었으며 1928년에 성 이름이 랴오닝 성으로 바뀌었다. 1931년 일본 제국이 만주 사변을 일으켜 이 지역을 점령한 이후에 만주국이라는 괴뢰 정부를 세워 만주를 지배하게 된다. 일제의 패망 이후 국공내전 동안의 첫 번째 대전투가 랴오닝과 강동 일대에서 벌어진다. 일본이 패망한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영토로 존속하였다.

국부천강 (~현재)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의 공농홍군에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화북과 만주에 있었던 다수의 기업가,국민당원,국민해방군,정치인,지식인,지주가 이 지역으로 이주했고 곧 국민해방군의 최대 목표는 압록강 방어선을 사수하는 것이었다.

위화도와 압록강 위의 하중도들은 중공군의 도강을 저지하는 방어선이었다. 중화민국의 지배는 공고했고 위화도 포격전과 여러차례 상륙시도가 있었으나 저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