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서울대 에브리타임에 올라와서 화제가 됐던 글이다. 꽤 많은 사이트에 캡처되어 퍼졌는데 담백할 정도로 직접적인 뉘앙스가 엄청난 공분을 일으켰다.대중의 전반적인 수준이 낮다는 주장이었다. 개중에는 서울대는 암기만 잘하면 가는 학교이며 세계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반푼이 대학이라 무시하는 반응이 많았다. 서울대가 그렇게 쉬운 곳이었으면 왜 진즉에 입결 문을 걷어차고 한국 사회에서 죽을 때까지 메리트가 되는 서울대 졸업장이 당신에겐 없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는 정신승리겠지만 아무튼 '어떻게 사람의 수준을 나눌 수 있느냐' 하는 인본주의적 사랑에 감화되어 쓰레기 엘리트를 죽여야 하네 살려야 되네 하는 상황까지 갔다.인터넷에 만연한 수준 차별, 예를 들면 사회복무요원을 정공(정신병 공익), 돼공(돼지 공익), 멸공(멸치처럼 마른 공익) 식으로 부르며 급을 매기거나 국민 평균 5등급이니, 짱깨니(중국식당 종업원), 편피노니(편의점 종업원, 피시방 종업원, 노가다 종업원), 휴거니(휴먼시아 거지) 하는 용어가 익숙할 대로 익숙해졌으면서 비슷한 잣대로 취급당하는 것 같자 그 차별성에 분노하는 것이다. 요는 '어떠한 이유가 됐던 사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겠지만 나는 이 글이 쓰인 의도를 이해한다. 나는 전국단위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최상위권에 속한 비평준화 고등학교를 나왔다. 당시 경기도 내에서 서울대를 가장 많이 보내는 인문계 학교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인상 깊었던 점은 학교 내에 일진이나 양아치라는 개념이 없었고 부모들이 대부분 중산층 이상이었다. 같은 시기에 과학고를 다녔던 친척은 더 심했다.비슷한 수준의 부모들이 그룹화되어 종합학원과 각종 과외를 맞춰 동선을 관리했다.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비슷한 수준의 계층끼리만 만나고 외부와의 교류는 차단됐다.그리고 그런 아이들이 3년 동안 빡공해서 소위 명문대를 걷어차고 들어갔다. 서울대 입학 통계만 봐도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이제 끝났다. 학업의 수준은 학군과 부모의 사회적 지위에 비례한다. 스트레스받지 않는 환경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꾸준한 관심을 주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 계층의 학업 성취도가 높다는 얘기다. 

 

  문제는 이 '비슷한 계층'끼리만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위와 부를 쌓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특별하다는 것이다. 남들과 견줬을 때 특출난 재능과 매력, 지능이 겸비됐을 때 시대적 운을 만나 가능케 되는 것이다. 노동을 소득으로 전환해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과 달리 부자들은 사람을 부려 돈을 번다. 사람을 이용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상황이 이치에 합한 지 볼 수 있어야 하고 선택에 앞서 감정과 이성을 분리할 줄 알아야 한다. 평생 배우고자 하는 열의도 남달라야 하고 사회의 상식이나 예의에 능통해야 한다. 그런 부모 밑에서 그런 교육을 받은 똑똑한 자식들이 나온다. 이 '똑똑하다'는 것은 단순히 지능의 편차가 아니다. 부모가 가진 판단의 습관을 말한다. ‘이게 정말 이익이 되는지' 논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습관, 이 습관이 사람을 똑똑하게 만든다. 서울대 에브리타임에서 논란이 된 글쓴이의 '똑똑함'은 이 판단의 습관화가 가능한 인간과 불가능한 인간의 분별일 것이다. 습관화에 성공한 아이들은 비슷한 수준의 부모에게 똑똑한 습관을 물려받은 아이들과 어울리게 된다. 이런 습관화 된 자들의 사회는 대학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학생의 신분을 벗고 첫발을 들이 민 진짜 사회의 모습은 어떨까? 나는 이 사회의 진실을 집안이 망하고 첫 알바를 뛸 때 비로소 체감하게 됐다. 판단의 근거가 논리와 이성에 기반하는 사람들이 감정과 사유화되지 않은 이념으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의 사회로 편입되었을 때 면역이 없는 부류는 엄청난 혼란을 겪는다.내 사촌 형도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왔지만, 나이 40이 넘은 지금, 제대로 된 취직생활을 하지 않고 있다. 그냥 말 자체가 통하지를 않는다. 이것이 본질적인 계층 분리의 이유고 부자들이 기를 쓰고 자신들만의 성을 짓는 이유다. 자본 생산의 주체가 되는 일반인을 거부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 정신적 유대를 맺고 싶어 하진 않는다. 영화 기생충 속 박 사장이 그렇게 강조하는 '선'은 서로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쳐놓은 방어막에 가깝다.글쓴이의 의도는 면역이 전혀 없는 습관화된 사회 속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충고일 것이다. 일찌감치 백신 맞으라고. 나중에 깜짝 놀라서 얼타고 사회부적응자 취급 받지 말라고. 그 정도의 의미일 뿐이지 남을 깔보는 나쁜 새끼라 손가락 하기 이전에 우리는 이미 타인을 충분히 깔보며 살아간다.누가 선동하지 않아도.

   내 아버지는 성균관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침대나 소파에 누워 여러 얘기를 하는 게 부자간의 취미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같이 뉴스를 보다가도, 영화를 보다가도 '왜 저 사람들이 저런 주장을 할까?', '저게 왜 옳은 일일까?' 하는 '왜?'라는 질문들을 심심치 않게 던진다. 그러면 본인의 생각을 정리해서 명확하게 대답해야 한다. 모르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사유화되지 않은 이념을 내 것인 것 마냥 떠들어대는 것은 금기다. 논리적 아다리가 맞지 않는 '말 같지 않은 말'은 서로가 싫어하니까. 나는 이런 방식의 문답하는 습관 때문에 곤란을 겪은 적이 많다. 대부분의 사람은 '왜?'를 싫어한다. 싸가지 없고 따지려 든다고. 군대에서의 '왜?'는 특히 그랬다. 군 생활 내내 엄청난 회의를 느꼈는데 그럼에도 부대 내에서 '왜?'를 멈추지 않은 사람은 검은 머리 외국인과(호주인이었는데 아빠가 대한의 건아가 되라고 보냈다) 나뿐이었다. 검은 머리 외국인은 한국 군대가 '왜?'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을 주지 못하자 스트레스로 기절까지 하며 그린캠프에(부적응자 재활훈련센터 같은 곳) 왔다 갔다 했는데 결국 한국에 악감정만 잔뜩 품고 전역했다. 한국말도 잘 못 하는 검머외가 한국 군대 욕은 네이티브 수준이었다. 나는 그린캠프까진 가지 않았지만 병장 때까지 선임에게 미친놈 취급을 받으며 전역했다. 학교를 벗어난 사회는 논리적 판단이 우선시되지 않는다. 그게 현실이다.

  논리적 판단이 습관화된 사람은 소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다수다. 사회는 다수가 실질적인 헤게모니를 갖는다.다수가 사회의 생산과 소비를 담당하기 때문이다.자연인이 되어 사회성을 포기하고 살 것이 아닌 이상 소수는 결정해야 한다. 내가 속한 사회의 장기적인 이익을 위해 불합리함을 감수하며 헌신할지, 사람을 속이고 조종하여 개인의 영달을 추구할지...어떤 이익을 추구할지 결정해야 하는 시기가 분명 온다. 정말 무서운 인간은 서울대생만 볼 수 있는 게시판에 대중의 수준이 어떠네 저떠네 쓰고 있는 순진한 서울대생이 아니라 조용히 입 다물고 피 빨아먹는데 집중하고 있는 이미 결정한 사람들이다. 나는 이미 결정한 사람들이 쥐고 흔드는 꼭두각시가 될까봐 두렵다.

 

 

개드립 - 대중의 수준이 낮다는 말의 의미 (장문) ( https://www.dogdrip.net/2207258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