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정

우리는 언제나 '그것은 이것이다' 라고 써놓고는

'그것' 또는 '이것'에 밑줄을 친다. 

그런데 '그것은 이것이 아니다' 라고 써야할 때면

'아니다'에 밑줄을 긋는다.


2. 미해결

의문을 표시하는 네 가지 단계

첫째: '왜 그것이 이것인가?'

둘째: '그것이 이것인가?'

셋째: '이것이 그것이다'

넷째: '이것이다 ... 그래서 그것이다'


3. 무게감

한 권의 독서가 막바지에 접어들 때

우리는 책의 더 두꺼운 부분을 잡고 있느라 진땀을 뺀다

손을 놓쳐버린다면 어김없이 책의 표지가 드러날 것이다 처음 책에게 나를 인도했던 그 표지.

지금은 나를 막아내는 문지기 같은 이 표지.


4. 서점

도서관을 다니는 것과 별개로 동네 서점을 한 번 

둘러보는 것은 제법 즐길거리가 된다

아동학습 코너부터 시작해서 ~ 입시, 전공, 자격증, 

취미만드는 법, 관계심리학, 증권투자 지침서까지 

한 나라의 평균적 삶들이 이 작은 공간에 집약되어 있다.


5. 대필가

글을 쓸 줄 아는 AI 에게 자신이 쓴 글을 읽어보라고

주문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것이 정말 '출력'과정이 아닌

듣는 이를 상정할 수 있는 행위라고 한다면

그때는 흔쾌히 AI 에게 대필을 맞겨도 좋을 것이다.


6. 의문

도대체 내 머릿속에 있는 그 문장을 어떻게 밖으로 

꺼내서 옮겨놓을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여지껏 단 한 번도 그것을 성공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7. 주사위

세상을 온통 확률로 보는 시각의 정말 큰 문제점은

어떤 사건만이 연달아 일어나는 사건은 기적이 되지만

그 건만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들을 진정 곤혹스럽게 만드는 적이란 동전던지기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람들이다.


8.

공백문자 '' 는 가장 지독한 금언이다 그러므로

글을 완성하기 전에 퇴고와 수정을 주문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명백한 오류이다.


9. 조우

어느날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새삼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건 처음으로 거울이라는 사물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10. 환하게 웃기

밤하늘의 별빛을 빼앗아간 것이 도시의 네온광이라면

도처의 LED 조명들은 우리 일상에서 무엇을 앗아가는가.

그 빛들은 차라리 낡은 것이어야 좋았다고 - 말하기에는

차라리 늦은 것이 나았다.


11. 동명이인

내가 나라는 것을 입증할 방법은 정녕 내게 있지 않다는

사실 - 나는 글을 쓸 때마다 이것을 깨닫는다.

먼저 번호표를 뽑고 저기서 줄을 서세요.


12. 21세기 샤머니즘

'초연결'이라는 구호가 이제 옛말이 되어갈 때

다음으로 온 것은 아마도 '초근접'이다.

연결은 최소한의 거리감을 필요로 하지만 가능하면 

사람들은 모든 것을 '곁에'두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함께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13. 신대륙

인도라는 개념이 탄생한 계기는 분명 자동차에 있는데

인간문명이 기계문명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한 징표이다.


14. 과적규제

생각이 많아질때면 오히려 아무것도 '더'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아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