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1990년대 초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참고로 필자는 이 사건을 겪은 충격으로 인해 현재는 미국 이민 신분의 상태이다.

중학교 시절 난 한 대학교의 모 사립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내가 다닌 중학교는 모 대학교 학생들의 교생들의 실습 차원에서 설립된 중학교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소중한 학창 시절을 대학교 의대생들의 실습 교보재마냥 보내아만 했었던 억울한 느낌도 없지않아 있다.

그때 당시 나는 모 대학교 부설 사립 중학교를 다녔고 가끔 퇴교 중에 대학생형들한테 잡혀서 화염병 휘발유에 심지를 꽂아주다 집에 갈 때 최루탄 연기에 울면서 뛰어가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 옛날 이야기다.

한번은 몸이 아파 일찍 조퇴하고 집에 가는 길이었는데 그 대학교 교정에 붙은 안기부 성고문 여성 피해자들의 털복숭이 노모 사진을 보고서 어린 마음에 오바이트하던 기억도 떠오른다.

일단 이 이야기들은 원래 하려고 결심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던 중 생각이 난 겉절이 기억들이니 그냥 지나가 보겠다.

때는 1990년대 초중반, 내 기억 속에는 한창 윈도우 95 이야기, 삼성 워드프로세서 훈민정음으로 학교 선생님들이 시끌 시끌벅적한 때였다.

그때가 한창 무더운 여름이었지 아마? 

내가 다니던 그 중학교에 국어 선생님으로는 존나 늙어서 오늘 내일하는 남자 선생님 하나랑 존나 젊은 여자 선생님 하나가 있었다.

내 기억 속에 그 여자 국어 선생님은 30대 초반이었다. 

말수가 너무 적은 데다가 눈빛이 매우 강렬해서 지금도 내 중고교 시절을 통틀어 기억에 유일하게 남는 학창 시절에 기억나는 두 명 중 한명인 선생님이다.

참고로 다른 사람은 남자 선생님인데 고3때 존나 쳐맞아서 기억에 남는다.

일단 이 여자 선생님을 모르는 사람을 사람들 위해서 간단히 묘사하자면, 첫 인상에 풍기는 레지스탕스적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선생님이 아직 나의 기억에 선명한 이유는 그해 여름 보충 수업 국어 독해 교재로 내가 처음 접한 충격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날 수업 시간에 그 여자 국어 선생님께서는 중학 독해 능력 향상이라는 명목으로 갱지에 인쇄한 유인물들을 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지금이야 살기 좋아져서 모르겠지만 그 당시 수업 교보재들은 거진 다 회색빛 갱지에 인쇄되어 있었다.

일단 유인물의 내용은 내가 학원 등지를 다니면서 입시 교재로 접했던 소재들과는 주제가 너무나 남달랐다.

지금 생각해보건데 중학생 시절 접한 그 독해 소재 이후 나는 그 어디에서도 그러한 정치색이 강한 주제를 교육적으로서 접하지는 못했었다고 회고한다.

아마 너무 불편하기 때문에 3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나는지 모르겠다.

그날 수업 시간 동안에 그 여자 선생님은 우리가 미국에서 제작한 미국 드라마에 익숙해져 버렸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 동안 머나먼 정글처럼 베트남전 일화부터 북한 김정일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늘 보았던 선과 악의 대상은 모두 미국 백인이 선이고 베트콩 같은 동양인은 악이라고 하였다.

그때 중학생으로서 아무 생각 없이 TV 외화를 보며 미국인인 람보,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나와 피부색이 같은 동양인들을 무참히 살육하는 것을 보며 박수를 치던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지만 당시 중학생인 나는 미국인인 백인과 한국인의 아시아인인 나를 동일시 한 쇄뇌 문화에 빠져있어서 이러한 지적이 더욱 충격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해 여름 내내 콘크리트 학교 담장의 이끼마냥 회색빛 갱지에 인쇄되었던 그 독해 구문이 내 머릿 속에 멤돌며 나를 괴롭혔다.

친구들은 나에게 벌써부터 가을을 타냐고 놀렸지만 나는 그저 창문 밖으로 담장의 이끼만 볼 뿐이었다.

그러던 찰나 보충 수업 휴식 시간에 나는 매점으로 가다가 길가에 주차된 그 여자 국어 선생님의 검은색 차 안에서 울고 있는 아기를 발견하였다.

차 안의 아기는 그 여자 국어 선생님의 아기였는데 90년대는 지금처럼 출산 휴가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서 국어 선생님이 아기를 차에 싣고 학교까지 데려온 듯 해 보였다.

아기는 무더위에 지쳐 탈수 직전이었고 나는 급한대로 119에 신고해서 소방서 대원들이 차 유리를 깨고 무더위에 죽을 뻔도 했던 아기를 긴급 구조했다.

요즘 같으면 박원순 서울 시장의 표창장을 받아 대학교 갈 때 수시 전형에 특례 입학을 받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90년대 학생 인구가 많던 시절 나는 쓸데없는 짓을 한 죄로 교무실에 불려갔고 젖 때문에 아기를 차에 싣고다닌다는 국어 선생님한테 정강이 조인트를 까이는 치욕마저 경험했다. 

미국이 살인마라며 중학생들에게 유인물까지 돌리시는 분께서 정작 자기 혈육 하나는 죽기 직전인데 제대로 챙기지를 못하시니 얼마나 견강부회인가?

그때가 내가 바로 반미주의자들의 이중성을 처음으로 몸소 체험한 때가 아닌가 싶다.

졸업 후 나는 지방의 한 대학교에 진학했고 그때 당시 한창이던 효순이 미선이 장갑차 압사사고로 발발된 반미 운동 때 나는 모르쇠로 무시하고 학교에 다녔다.

학교에 피투성이로 쨔부된 인육 시진들이 널려 붙었지만 나는 내가 중학교 다니며 미리 겪었던 그 대학 캠퍼스의 사진들을 기억하며 이것 역시 계획된 선동임을 파악하고 불응하였다.

다행히도 그 후 2~3년 동안 내가 다니던 지잡대에 몰아 닥친 구속 수사 열풍에서 나는 살아남았고 내 대학 동기들이 해외 여행을 제한받는 상황에서도 나는 무사히 이민 수속을 밟았다.

그 당시 여자 동기는 나를 보면 '너만 살려고 하냐'고 호통도 쳤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중학 시절 여자 국어 선생님이 나의 진정한 멘토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 역시 순진한 일반인이니니 20대 경험없던 당시 대학시절 반미의 울분에 북받쳐 쉽사리 선동에 휩쓸렸다면 반미 시위에 동참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여타 친구들과는 다르게 중학교 시절 조인트를 까이며 겪은 한 젊은 국어 선생님의 교훈이 었었다.

그리고 그 어린시절 나의 뼈져린 경험을 통해 나는 올바르게 대학 시절을 보냈었고 흔히 말하듯이 호적에 빨간 줄 가는 일은 피할 수가 있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미국 시애틀의 맥도날드에서 해피밀 세트 '아침의 나라' 애플파이를 먹고 있다.

행복을 느끼도록 너무 달아서 갑자기 툭 쓰게됐다.

미국 이민을 준비할 때 어머니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힘들거라고 염려하시던 것과 다르게 달달한 애플 파이 튀김은 나에게 극한의 행복감을 선사한다.

나는 특이하게도 고추장의 매운 맛에는 매일 설사를 하지만 미국 패스트푸드를 먹으면 그날은 해피하게 된똥을 싼다.

만약 2000년대 내가 대학교 데모에 휩쓸려 다른 동기들처럼 반미시위에 따라다녔더라면 지금 나의 풍족한 생활은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