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학문에서 귀중히 여길 것은 실용임을 강조했다. "글을 읽고서 실용을 모를진대 그것은 학문이 아니다. 학문이 귀한 것은 그의 실용에 있으니, 부질없이 인간의 본성이니 운명이니 하고 떠들어대고 이(理)와 기(氣)를 가지고 승강질하면서 제 고집만 부리는 것은 학문에 유해롭다"며 학문의 초점을 유민익국(裕民益國)과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맞추었다. 유민익국의 요체로서 생산력의 발전을 급선무라고 인식하고, 생산력의 발전을 위해서는 북(北), 즉 청에서 선진 기술을 배울 것을 주장했다. 그는 그것이 백성들에게 유익하고 국가에 유용할 때에는, 비록 그 법이 오랑캐로부터 나왔다 할지라도 주저없이 배워야 하며 다른 사람이 열 가지를 배울 때에 우리는 백 가지를 배워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나라 백성들에게 이익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덤으로 당시 청에 사신으로 가는 연경사들이 서적이나 실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사오거나 부국강병에 도움이되는 지식 대신 이미 망한 명나라 의복을 자랑하거나 겨우 3개월만 쓰고 버리는 털벙거지, 화장품, 가죽신 등 사치품만 구입하는 것을 상당히 비판하였다. 즉 외국에 나가면 쓸데없는 허영심이 아니라 국가와 백성들 생계에 도움되는 것을 구하라는 뜻이었다.

그는 생산력을 복구·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생산 도구의 개선과 영농법의 개량, 농사 시설의 복구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이에 대한 방책을 저서 〈과농소초〉에서 제시하고 있다.

과농소초에서는 절기와 그에 따른 전답(田畓)의 구획법, 농기구의 개량, 토지의 경작과 개간 및 수리 사업과 그 설비, 토양, 거름, 곡물의 품종, 종자의 선택, 파종, 김매기, 해충 구제, 수확, 곡물 저장 등 다방면에서 구체적인 개선 대책을 제시했다. 특히 관개 사업의 복구·발전을 강조하면서, 저수지를 구축해 수차(水車)와 기타 수리 시설을 광범위하게 이용할 방책을 제시했다.

한편 박지원은 당시 생산력의 발전을 생산 관계가 저지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생산 관계를 개혁할 것을 제기했다. <과농소초>의 뒤에 부록으로 첨부한 〈한민명전의〉에서 토지 제도의 개혁안을 제기했다. 당시의 토지 소유 관계의 형편에 대해 "농민들의 속담에 '일 년 내내 뼈가 빠지게 일해도 소금 값도 남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농가 중에서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건 부농의 경우로서 열에 겨우 한둘밖에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토지 소유 관계의 개혁안으로서 한전법(限田法)을 제창했는데, 전국의 토지 면적과 호구를 조사하여 1호당 평균 경작 면적을 국가가 제정하고, 누구든지 그 이상으로 토지를 소유하는 것을 법률적으로 제한하되, 이 법을 시행하기 이전의 토지 소유는 그대로 인정하고, 새로운 매입은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하면 수십 년이 못 가서 전국의 토지는 고르게 나누어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한편으로는 조선의 모든 토지와 부가 소수의 대지주나 위정자들에게 쏠리는 부의 불평등함을 지적하며 지배층의 가혹한 수탈과 그로 인한 농민들의 몰락을 과감하게 비판하였다. 특히 허생전을 통해 순진한 백성들이 도적이 되거나 유랑민이 된 것은 양반과 관리들의 부패와 수탈로 몰락한 백성들이 살고 싶어서 도적이 되거나 유랑민으로 떠도는 것이지. 이들이 천성이 천하고 악하거나 게을러서된 것이 아님에도 사회적문제 해결은 등한시 하고 추상적인 도덕관념에 빠져 토벌할 생각만 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그는 국가가 확고한 화폐 정책을 실시하여, 상평통보의 발행을 합리적으로 조절할 것과 은(銀)을 화폐로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또 생산품이 전국적 규모로 유통되지 못하기 때문에 수공업도 농업도 발전하지 못하므로, 우선 교통을 발전시켜서 생산품이 전국적 규모로 유통되도록 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 광범위하게 수레와 선박을 이용하여 국내 상업과 외국 무역을 촉진할 것도 제기했다.

이상에서와 같이 그는 생산력의 발전을 가장 중요시했고, 이를 위해 한전법을 통한 농업 생산 관계의 개혁을 제기했으며 상품의 전국적 유통을 주장했다. 이는 객관적으로는 통일적 내수 시장의 형성을 가져올 수 있는 개혁안이었다. 그는 또 이러한 개혁의 일차적인 책임이 지식인들에게 있음을 강조하면서, 이용이 있은 다음에야 가히 후생이 있고, 후생이 있은 다음에야 가히 덕(德)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이용후생 위주의 새로운 사고 방식으로 종래의 인륜 위주의 사고 방식을 대신하게 함으로써, 한국 사상사에서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