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울리는 둔중한 대포소리에 집 전체가 흔들리고 콩 볶는 듯 한 기관총 소리에 온 가족이 놀라서 안절부절 못했다. 고위 경찰이었던 아버지는 결단을 내리신 듯 색(sack)을 짊어지고 어머니에게 몇 마디 당부를 한 뒤 가족들과 헤어져 남쪽(대구)으로 탈출했다.

그리고 세상이 바뀌었다. 사람들의 일상은 어제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우리 집은 수저 와 밥그릇 몇 개만 남고 소위 적산(敵産: 적에게 강압적으로 넘어가게 된 재산)으로 압류됐다. 

우리 집의 사랑채는 집주인의 허락도 없이 인민위원장이 임의로 들어와 살게 됐다. 

동네에서 배추장수를 하던 ‘뺑대’(별명)가 어느 날 갑자기 인민위원장으로 돌변해 젊은 청년들을 마구잡이로 인민군에 강제 입대 시키면서 소위 右翼 인사들을 잡아들였다. 

예전에는 양같이 순해 보였던 ‘맨발’(별명: 술 만 먹으면 맨발로 동네를 돌아다니며 행패를 부렸다)이 ‘완장’을 차고 동네를 휘 젖고 다닐 때는 사람들은 멀리서 그 모습만 보아도 기가 죽어 버렸다.

1950년 7월 초에 목격한 인민재판은 70이 넘은 지금도 뇌리에서 잊을 수 없는 충격으로 남아 그때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백짓장처럼 창백한 얼굴을 한 10여명의 포승줄로 묶인 사람들, 소위 반동(反動: 右翼인사)들은 재판도 없이 “죽여라” 하는 일부 동원 군중의 아우성과 동시에 곡괭이와 몽둥이에 맞아 그대로 머리에서 피를 내뿜으며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재판을 시작한지 불과 10분도 못되어 반동들은 주인 없는 주검이 되어 거적에 덮인 채로 뒷골목에 버려졌다. 지금이야 평화로운 청계천 변이 전쟁당시에는 시체들이 즐비했던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청계천을 복개하면서 뼈가 많이 나왔던 걸로 기억되는데, 그것은 동물 뼈가 아니다. 6.25 전쟁당시 죽은 시체들의 뼈로 보면 될 것이다.  

이념문제에 관한한 나는 국민학교 때 이미 졸업을 했다. 

어느 날은 집에서 애지중지하던 애견(메리)을 ‘붉은 완장’(맨발)이 와서 복중에 보신하겠다며 당장 내놓으라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서울의 양반이었던 할머니는 단호히 거절했다.

할머니는 첫째, 어린아이가 애지중지하는 짐승이고, 둘째, 아무리 짐승이지만 뱃속에 새끼가 있기 때문에 해산 전에는 내어줄 수 없다고 했다.

할머니는 서슬 퍼런 ‘맨발’ 완력에도 굴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마음 졸이며 자초지종을 바라보던 나는 마침내 망치를 들고 울면서 ‘맨발’에게 대들었다. ‘맨발’은 마침내 더러운 술 냄새를 풍기던 입으로 상스러운 말을 하면서 집을 떠났다.

집에서는 이웃의 도움을 받아 메리를 경기도 양주군 진건면 사능(思陵; 단종의 비 정순왕후 宋씨의 능이 있는 곳)으로 대피시켰다. 자전거에 실려 가던 귀여운 강아지 메리의 애처로운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이 나와 메리와의 마지막이었다.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노래가 있다.

 

이북 독재정권이 인민재판을 하겠다고 아버지와 아들을 포승줄에 묶어 끌고가는통에

 

어머니와 딸과 아내가 울부짖으며 통곡한 역사를 담은 노래임 

 

이런 역사상 너무나도 잔인한정권을 두둔하는 인간들은 

 

반세기도 안되어 후손들에게 비난을 받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