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조선왕조는 자기완결성을 갖는 하나의 독립국가였을까.

 

한국사 교과서를 보면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설명하면서 현명한 조선이 중국과 실리외교를 했다는 식으로 서술하면서 조선왕조를 자기완결성을 갖는 하나의 독립국가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역사교과서가 사실일까.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공개한 '태평성시도'라는 병풍이 있는데, 정조 임금이 도화서의 화원들을 시켜서 도성을 그리게 한 그림이다.

 

그런데 이 '태평성시도'에 나와 있는 조선의 도성의 풍경은 조선의 것이 아니라 마치 중국의 것과 비슷함. 그림에 나오는 서민, 천민들은 조선의 옷을 입었지만 양반 관료들은 조선의 옷이 아니라 중국의 옷을 입고 있지. 그리고 궁궐이나 고위층들의 집은 중국의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지만, 서민 천민들의 주거지는 조선의 양식으로 그려져 있음.

 

이 그림을 그린 화원은 왕이 원하는 그림을 그렸을 텐데, 과연 이 그림은 조선의 어떠한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것일까.

 

왕실이 아닌 양반계급의 의식세계에 대해 살펴보자면 김만중이 지은 '구운몽'이라는 소설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구운몽도'라는 것이 있는데,

 

이 그림에서도 양반귀족들의 집이나 옷은 중국의 양식이고, 하층민들의 집이나 옷은 조선의 양식으로 그려져 있다.

 

과연 이 그림에서 양반들의 어떠한 의식세계를 찾을 수 있을까.

 

19세기 쓰여진 소설 중에서 김기동이라는 사람이 지은 '옥수기'라는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이 마치 위에 나오는 구운몽하고 비슷하다.

 

중국의 어느 지방에 가씨라는 가문이 있고 이 두 가문이 혼인의 언약을 맺는다. 그러다가 어느 간신의 모함으로 역적으로 몰리게 되고, 가씨가문의 남자와 화씨가문의 여자는 헤어지게 되고, 이 두 사람이 온갖 고난을 이겨낸 끝에 입신양명과 사랑의 성취를 모두 이룬다는 것이 대체적인 줄거리이다.

 

이걸 가지고 대한민국 정부는 조선시대의 국제적인 시각을 재평가 하자면서 문화사업에 투자를 하는데 과연 이러한 시각이 맞는 걸까?

 

분명한 것은 조선왕조가 오백년 동안 제후의 나라였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것이 조선사회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조선왕조를 이해하는 데에도 이 점에 대해서 유념하여서 보아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학자들은 용기가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이러한 사실을 숨기려고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를 보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한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역사학자들의 위선이라고 할 수 있지.

 

조선왕조가 어느 한 순간 제후의 나라로 변한 것은 아니다. 조선왕조가 제후의 나라가 되는 점진적인 과정이 있다.

 

세종이 다스리던 15세기를 중점으로 보았을 때, 일단 조선왕조의 국호는 '기자조선'에서 따 온 것이다. 중국의 성인인 '기자'가 야만과 암흑의 땅인 동방으로 와서 문명을 전수해 주었다는 것이지.

 

그래서 조선왕조는 명나라에 나라 이름의 후보를 올릴때 기자조선에서 조선을 따서 올렸고, 이것은 명나라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문명을 전수해 준 중국을 어버이로 섬기겠다는 하나의 상징적 선언이었으니까.

 

사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기자조선은 정체성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들 중 하나였을 뿐이지만, 조선왕조가 '기자조선'에서 국호를 따 오면서 기자조선을 계승했다는 역사의식이, 조선의 정통성이 기자조선으로부터 내려온다는 것이 확고해졌고, 이를 토대로 권위를 강화하였지.

 

1422년 세종은 역월제를 폐지한다. 선왕이 죽으면 그 다음 대를 잇는 왕은 선왕을 위해 상례를 치러야 하는데, 원래 예법대로라면 3년(25개월)을 치르게 되어 있음. 그런데 이렇게 하면 왕이 나라일을 돌볼 수가 없으니까 25개월을 25일로 단축해서 이 기간 동안만 상복을 입었다가 나라 일을 돌보았다. 이걸 바로 역월제라고 한다.

 

그런데 세종은 이 역월제를 없애면서 25개월간 상복을 입었다. 이것은 조선의 왕도 효라는 윤리에 따라야 하는 하나의 가장이라는 것이지.

 

중국의 천자는 상복을 입는 예가 없었고, 거애라 해서 황제의 친족이 죽거나 대신이 죽었을 때 조의하는 것은 있어도 상복을 입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제후는 황제가 아니라 한 가문의 가장이므로 효의 모범이 되기 위해서 25개월간 상복을 입어야 했다.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역월제를 함으로써 왕은 하늘을 대신하여 국가를 통치하는 존재로, 일반적인 예법보다도 위에 있는 존재였지만 세종은 제후의 예에 따르면서 25개월간 상복을 입게 된다.

 

1438년에는 천제라고 해서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을 폐지한다. 삼한시대, 고구려 때부터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냈고 그 전통이 천년도 넘게 이어져 왔지만 세종 때에 들어서서 이러한 전통이 사라지게 된다.

 

천제라는 것은 국왕이 천신과 직접 소통하는 귀중한 예식이었지만 세종은 제후가 감히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참람되다고 하면서 천제를 폐지해 버린다.

 

그리고 1444년 오례라는 책을 내면서 천제 의식을 완전하고 확실하게 폐지하고 조선의 왕은 직접 하늘과 소통하는 것을 포기한 대신 중국의 천자를 중심으로 하는 중화질서에 소속된 제후로써 자신의 위치를 고정하게 되지.

 

1460년 경국대전을 통해 이러한 조선의 예식은 완성되었다. 더 정확하게는 1480년 성종 연간에 지어진 국조오례의에서 이것이 더욱 구체화 되었다.

 

이것을 통해 조선의 신분질서는 중국의 천자를 정점으로 해서 제후(조선왕 포함)-대부-사(선비)-서(서민)-천(천민) 으로 확립되게 된다.

 

이 위계질서의 꼭대기에는 하늘의 명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중국 황제(천자)가 있고,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은 여러 제후들이 있고 그 중에 조선 왕도 들어 있다. 제후 아래에는 대부라는 계급이 있는데 이것은 과거에 합격한 8300명의 관료들을 말한다. 이 8300명의 관료들은 조선 말까지 그 숫자가 고정되는데 그 스스로를 조선왕의 신하가 아니라 중국 황제의 신하임을 자처하게 된다. 그 아래에는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사(선비)계급이 있고 이들은 과거시험에 합격을 하기 위해 평생을 공부에 투자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상놈, 노비, 천민들이 존재한다.

 

경국대전에는 이러한 신분질서를 '예의 질서'라고 규정하고 있다. 천자는 7대까지 제사를 지내고, 제후는 6대까지 제사를 지내고, 대부는 4대까지 제사를 지내고, 사(선비)는 3대까지만 제사를 지내고, 서(서민)은 2대까지만 제사를 지내고 천민은 아예 제사를 지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예에 있어서도 차등을 둠으로써 사회적 신분의 위계질서가 국가적 질서로써 형성되게 되지.

 

조선왕조가 구축한 '예의 질서'로서의 도덕국가는 중국이 중심이 되는 중화질서 안에서 부동의 안정성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러한 안정성을 누리게 된 것은 세종의 업적이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지.

 

세종은 매우 합리적인 국가체제를 구축해 놨는데, 조선왕조 500년간 그 누구도 이 질서 자체를 부수려고 한 사람은 없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조선 왕이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질서 하에서 였고, 따라서 이러한 질서를 빼 놓고 조선사회를 논한다는 것은 무의미하고 관념적이라 할 수 있지.

 

16세기 중종은 명의 칙사를 맞아서 5배 3고두례를 거행한다. 중종 전까지는 중국에 대해 사대 체제를 정립하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자립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명나라 사신이 영은문에 와서 조선 왕은 어서 나와서 5배 3고두례를 하라고 하면 조선 왕은 그런 전례가 없다면서 거부했다. 명나라 사신이 황제의 칙서를 다 읽고 나서야 황제의 칙서에 5배 3고두례를 했지.

 

이걸 중종 때부터는 명나라의 칙사가 영은문에 도착하면 왕이 직접 마중을 나가서 명나라 칙사에게 5배 3고두례를 하게 된다. 중종이 왜 이렇게 했느냐. 계승범 교수는 조선왕조 내부의 정치적 문제(중종반정)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중종이 영은문에 가서 명나라 칙사에게 5배 3고두례를 거행하면서 조선은 명나라에게 더욱 사대하는 나라가 된다. 명나라를 어버이로 섬기는 나라로 심화된 거지. 명나라 황제는 이러한 조선에 대해 참으로 효성이 지극한 나라라고 칭찬했고, 나중에 일본이 조선에 쳐들어 왔을 때(임진왜란) 명나라 황제가 대군을 보내서 조선을 구해준다.

 

조선 왕과 양반들은 이걸 두고 '재조지은'이라고 부르면서 명나라를 칭송하였고, 나중에 명나라가 멸망하자 북벌론을 외치면서 명나라의 복수를 부르짖기도 했다(말로만 끝났지만).

 

1704년에는 명나라 황제 3명을 모시는 대보단을 건립하게 되는데, 1년에 10번이나 제사를 지낼 정도로 아주 열성이었다. 명나라는 이미 망했지만 조선은 계속해서 명나라를 섬겼던 것이지. 계승범 교수는 이것을 두고 '조선의 세계사적 시간은 정지되었다'라고 말한다.

 

그 뒤로 조선왕조는 임진왜란 이후로 시간이 정지된 채로 200년 300년을 보내게 되고, 조선 왕과 양반들도 자신들을 중국의 일부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퍼지게 되지. 그래서 위의 그림에서 처럼 중국의 건물들을, 중국의 옷을 그려넣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떠한 시사점을 주는가를 보면

 

첫째, 조선왕조의 국가체제는 자기 완결적이지가 못하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질서의 제후국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지.

 

둘째로 조선은 자주국방체제를 완전히 해체하고 군인을 천한 신분으로 만들어 버린다. 고려시대 때 까지만 해도 독립국으로서의 의식이 있어서 강인한 국방태세를 가지고 있었고 3만명의 중앙군을 보유했으며 중앙군을 지원하기 위한 토지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왕조는 중화질서 안에 속해 있었으므로 이러한 국방태세가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중앙군을 사실상 해체해 버리고 직업군인도 해체해 버리고 군인을 천한 신분으로 만들어 버린다.

 

셋째로 국가의 기둥 역할을 해야 할 양반들은 군역으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대신 양반들은 열심히 학문을 갈고 닦으면서 자신들이 학문을 갈고 닦음으로써 국가를 지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대단히 아이러니하고 특이한 정신세계라고 할 수 있지.

 

넷째로 조선왕조는 가족, 촌락, 동리, 면 등의 사회적 질서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조선왕조의 호적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던가,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던가, 그 사람이 면장이라던가 하는 자생적 실서에 일체 나타나지 않는다. 심지어는 가족관계도 국가질서에는 포함이 되어 있지 않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도 나타나지 않는다. 국가는 오로지 조세와 공물과 부역을 거두었지 그 안에서 어떠한 자율적 편성이 이루어져 있는지, 국가이성으로써 이러한 자율적 질서를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지에 대한 관심이 없다. 국가를 누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그 사람의 경제적 상태에도 관심이 없다. 이러한 국가체제는 19세기까지 쭉 유지된다.

 

조선왕조를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면 조선왕조가 망한 원인과 그 역사적 의미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가 있다.

 

조선왕조가 망한 것은 왕과 양반의 조정으로서 나라가 망한 것이다. 조선 왕조는 결코 백성들의 나라가 아니었다. 그리고 중화제국의 질서 하에 위치하던 하나의 제후국이 망한 것이다. 조선왕조가 망하게 된 것은 이러한 국가관과 국제질서감각을 해체할 만한 지성의 창조적 변화가 조선사회 안에서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가 구축한 세계관은 너무나 단단한 갑옷과 같았다. 이러한 조선왕조가 구축한 세계관은 겉보기에는 아름다울지는 몰라도 이것이 볼 조선이 망한게 된 원인이라는 것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2차 출처 : 디시인사이드.

 

1차 출처 : 이영훈의 역사비평 '조선은 제후의 나라'

이영훈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이영훈 '대한민국 이야기'

계승범 '정지된 시간'

계승범 '중종의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