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솔리니의 몰락


히틀러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알지만 의외로 무솔리니에 대해서는 그냥 '히틀러 선배' 정도로만 아는 것 같아서 설명한다.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당을 세우고 독재 정권을 수립했지만 실제로는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진짜 일인독재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무솔리니는 파시즘의 어원인 파시스트당을 세웠기 했으나 본래 이념이나 이론에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기회주의자였고 각 지역 주민들이 원하는 약속만 내걸며 세력을 불리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래서 파시즘이 대체 무엇이냐는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을 정도로 이념적으로는 불분명했다. 하지만 적어도 두가지 공통점은 있다. 하나는 강력한 민족주의,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막강한 정부가 어떤 고민이든 해결해줄 수 있다는

포퓰리즘이었다. (6~70년대 남미의 포퓰리스트들 중에 무솔리니 숭배자가 많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지금까지도 거론되는 이유는 그가 대놓고 폭력을 예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 등에서는 파시즘 하면 물리적인 힘을 사용하는 정치 폭력을 의미한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미래를 위한 착한 폭력'이라는 컨셉을 만들어놓고 소위 '검은셔츠단'으로 불리우는 준군사조직을 창설했다. 그리고 검은셔츠단은 무정부주의들과 공산주의자들을 비롯한 반대파에 대한 폭력을 자행하면서 영향력을 넓히게 된다. 그런데 이는 당시 이탈리아의 경제가 폭망 상태였고 공권력이 기능을 못했기 때문에 (게다가 무솔리니의 가장 중요한 세력 기반은 다름아닌 공무원들이었다) 가능한 일이었다. 히틀러가 무솔리니를 본따 뮌헨 반란을 일으켜보지만 이런 수법은 정부 조직이 강력한 독일에서는 실패했다.

 

맥주를 들며 시민과 소통하는 지도자의 모습들



 

파시스트당은 지금의 한국으로 치면 정의당 같은 위치에 해당했다. 밀란 같은 특정 지역에서는 큰 지지를 모았지만 전국적으로 보면 거대여당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솔리니는 우익정당과 좌익정당의 특징을 모두 아우르며 파시스트당의 컬러를 '중도진보'로 위장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냥 지지율을 높이기 위한 립서비스에 불과했다. 당시의 이태리인들은 무솔리니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무솔리니는 "정치는 연극과 같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리고 idea(이념)보다 praxis(전달하는 방식, 그러니까 정치에서 praxis는 곧 쇼통이라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파시스트당은 검은셔츠단을 동원하여 민심이 어지럽다고 선동하거나 파시스트당의 세력이 전국적인 것처럼 과시하는 수법을 썼다. 그리고 당시 아직 군소정당이었던 파시스트당을 정부 조직에 참여시키라고 요구하며 '전국적 봉기'를 일으킨다. 그것이 바로 1922년의 로마 진격(Marcia su Roma)이다.
 

무솔리니는 권력을 잡은 후, 자신이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비결 및 자기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방법으로 (문재인 촛불혁명을 팔아먹듯이) 로마 진격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당시 이탈리아는 입헌군주제였는데 총리 루이지 팍타(Luigi Facta)와 국왕 에마누엘3세가 대립 중이었다. 에마누엘3세는 무솔리니가 팍타의 권한을 축소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에 파시스트에 우호적이었다. 군부는 국왕의 명령이 없으면 파시스트 진압에 나서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왕실과 군부가 파시스트당을 반대하지 않았다는 점이 무솔리니에게 큰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국왕은 팍타 총리을 압박하기 위해 파시스트당과 연립정권을 구성하라고 발표했다. 무솔리니의 블러핑이 먹힌 것이다. 팍타 총리가 사임을 발표하자 유혈 충돌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무솔리니는 "유혈 충돌 없이" 총리에 임명되었고 자연스럽게 권력을 쥐게 되었다.

 


 

오른쪽이 에마뉴엘3세. 난쟁이에 가분수라서 가히 최악의 비율을 자랑한다. 그래도 정치 감각은 있었다.
무솔리니는 기회주의자답게 어떤 이념에 목숨을 바칠 인간이 아니었다. 로마 진격을 주도한 사람들은 무솔리니가 아니라 무솔리니의 지지자이자 파시스트당의 과격파 인물인 미켈레 비앙키(Michele Bianchi)였고 정작 무솔리니는 여차하면 스위스로 도망칠 수 있도록 국경지대에 있었다. 그러다가 국왕의 연립정부 발표를 듣자마자 부리나케 로마로 날아와 이런 사진을 찍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솔리니의 독재는 어디까지나 국왕이 내려준 권력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무솔리니는 군부에 기반이 없었으며 권력을 잡은 후에도 군을 장악하지 못했다. 이것이 히틀러와 스탈린과 다른 결정적인 차이였고 무솔리니의 결정적 약점이었다.

 

히틀러의 꼭두각시로 부활한 무솔리니


권력을 잡은 후, 무솔리니는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며 여기저기 전쟁을 벌려놨는데 그 결과가 영 좋지 못했다. 그러자 국왕과 파시스트당 이외의 정당들을 중심으로 무솔리니에 대한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 결국 1943년 5월, 연합군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자 에마뉴엘 3세는 전쟁의 책임을 무솔리니에게 떠넘길 결심을 한다. 파시스트당 이외의 정당들은 1943년 7월에 무솔리니가 없는 틈을 타 무솔리니의 총리직에 대한 비신임 투표를 가결시켰고 국왕은 재빨리 피에트로 바도글리오 장군을 새 총리로 임명했다. 무솔리니가 반격할 법적 근거를 빼앗은 것이다. 

바도글리오 장군은 무솔리니를 체포하여 이탈리아 중부 산악지대에 위치한 캄포 임포라토레 호텔에 유폐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히틀러가 가만 있지 않았다. 이태리군이 비록 약군이라 해도 이태리가 독일 남쪽 전선에서 버텨주어야 소련과 계속 싸울 수 있었다. 히틀러는 그가 가장 아끼는 정예부대 무장친위대(Waffen SS)와 공수부대(Fallschirmjager)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솔리니를 구출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독일 특수부대는 영화를 방불케하는 세계 최초의 현대적인 요인 구출 임무를 수행한다. 이게 떡갈나무 작전(Operation Oak)으로 알려진 작전인데 이건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아무튼 무솔리는 구출되어 독일군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무솔리니(검은옷) 구출 직후의 무장친위대 대원들. 무솔리니 오른쪽의 덩치 큰 아재가 바로 '유럽에서 제일 위험한 남자' 오토 스코르체니.

히틀러는 무솔리니에게 다시 이태리로 돌아가 정부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겁이 많은 무솔리니는 거부했다. 그러자 히틀러는 무솔리니에게 당장 귀국하지 않으면 그의 정치적 기반이자 공업도시인 밀란을 쑥대밭으로 만들 거라고 협박했다. 무솔리니는 독일군이 스페인 게르니카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독일군을 따라 다시 이태리로 돌아갔다.

무솔리니를 다시 권좌에 앉히기 위해 독일군은 에마뉴엘 3세가 다스리는 이탈리아 왕국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에마뉴엘3세는 로마를 버리고 남쪽 연합군 지역으로 피난 갔다. 무솔리니는 다시 로마에 진군하여 새로운 국가(그래봐야 독일의 괴뢰국가지만)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Italian Social Republic)을 세웠다.
비록 수도는 로마였으나 무솔리니는 로마 시민들이 자신을 암살할까봐 몹시 두려워했다. 그래서 로마에는 나치독일에서 파견온 SS 병력이 주둔했고 무솔리니는 로마에서 떨어진 교외의 작은 도시 살로(Salo)에서 지냈다. 그래서 이 괴뢰국가는 살로공화국(Republic of Salo)이라 불리게 되었다.

 


 

살로공화국은 국제무대에서는 나치독일, 일본제국, 그리고 루마니아나 만주국을 비롯한 괴뢰국가들에게만 인정을 받았다.
(녹색부분이 살로공화국이 다스리는 지역, 누런색 부분은 독일에게 빼앗긴 영토)

 

무솔리니의 발악


'살로'하면 엽기적인 영화로 자주 거론되는 '살로 소돔에서의 120일'이라는 영화가 떠오를 것이다. 사실 영화의 내용 자체는 프랑스인 사드 후작의 소설을 각색한 거 뿐이다. 그렇긴 해도 살로공화국은 폭력이 판치는 나라였다.

히틀러가 무솔리니를 권좌에 다시 앉힌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이탈리아를 전쟁기지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히틀러는 일본제국이 조선을 전쟁기지로 만들었듯이 이탈리아의 인력과 자원을 수탈해갔다. 그러자 이태리인들은 독일군과 무솔리니에 맞서 게릴라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에 고전한 바 있던 독일군은 이탈리아에서도 게릴라 문제로 골치를 썩히기 싫었다. 그래서 살로공화국의 경찰 조직을 확대하여 준군사조직을 만들고, 이태리인들로 하여금 이태리인들을 죽이게 했다.

 


 

이때부터 이탈리아에서는 지옥이 열렸다. 이태리 민병대와 독일군은 게릴라와의 전투에서 아군이 전사하면 몇배에 달하는 민간인을 살륙하는 것으로 보복하는 수법을 택했기 때문에 대량 학살이 수시로 일어나곤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집단은 피에트로 코흐(Pietro Koch)가 이끄는 민병대였다. 독일군은 직접 피를 보는 일은 민병대에게 맡겼는데 이 일을 가장 잘 수행하던 집단이 바로 코흐의 민병대였던 것이다. 한편 전황이 불리함을 알고 있는 무솔리니는 코흐가 벌이는 학살극에 질려버렸다. 나중에 살로공화국의 전쟁범죄를 추궁할 때 자기가 덮어쓸까봐 두려웠던 무솔리니는 포로를 잡으면 코흐가 죽이기 전에 재빨리 사면령을 내리곤 했다.

 


 

독일군에 의해 벌어진 아르데아틴 학살을 소재로 한 영화 Massacre in Rome.
리처드 버튼이 SD국장 요제프 에르베르트역을 맡음. 꽤 재미있음. 세련된 독일인처럼 보이던 버튼이 갑자기 냉혹한 살인마로 변하는 연기는 볼만함.
하지만 무솔리니도 자신의 세력을 불리기 위한 노력을 단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군사 업무는 독일에게 맡길 수 밖에 없지만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어 포퓰리스트 정권을 만들면 자신이 실력자로 부상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무솔리니는 에마뉴엘3세와 자본가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동조합을 탄압하던 정책을 버리고 스스로를 '노동자들의 벗'이라 부르며 종업원 100명 이하의 모든 기업들을 국유화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수탈과 무솔리니의 무리한 국유화 정책으로 물가는 폭등했고 오히려 이태리 노동자들은 고통을 겪게 되었다. 무솔리니에 대한 모든 희망을 버린 노동자들은 1944년 로마를 중심으로 총파업을 벌이면서 살로공화국에 저항했다. 이 일로 무솔리니는 포퓰리스트 정권을 세울 희망도 잃고 말았다. 이제 그에게 남겨진 길은 끝까지 독일에게 충성하다가 중립국 스위스로 도망쳤다가 그의 정치적 동지인 프랑코 장군이 다스리는 스페인으로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절망 속에서도 무솔리니는 대중 앞에 나서면 변함없는 허세를 부렸다. 자기가 했던 말 '정치는 연극'을 끝까지 지키는 그 모습은 처연하기도 했고 혹은 경악스럽기도 했다.

 

살로공화국과 무솔리니의 종말


연합군은 계속 이태리 반도에서 북상하고 있었다. 무솔리니는 우선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밀란 시민들에게 전쟁을 독려하며 "밀란은 이탈리아의 스탈린그라드가 될 것이다!"고 선언했지만 이미 몰래 스위스로 도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4월25일. 무솔리니는 애인과 측근들을 데리고 독일군에게도 들키지 않게 차량으로 은밀히 스위스로 도주했다. 


하지만 4월27일, 게릴라들이 무솔리니가 탄 차량을 발견했다. 무솔리니 일행은 스페인인으로 변장했지만 그들은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을 살해한 철천지원수 무솔리니를 바로 알아보았다. 무솔리니와 일행은 작은 농가에 감금되었다. 이때 무솔리니는 "7년 전 나는 매우 즐거운 사람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거의 시체로군"하고 말했다고 한다.

 


4월28일. 무솔리니와 일행들은 총살형을 당했다. 29일에는 그의 시체가 밀란에 전시되었다. 
그리고 무솔리니와 존나게 닮은 애가 동아시아에 있음.

 



세줄요약
1. 나치독일이 쇼통맨 무솔리니를 구출하고 괴뢰국가 살로공화국 세움
2. 살로공화국은 국민들 탄압하고 경제수탈하다가 망함
3. 문솔리니 이녀석 기억해라

 

출처:https://m.blog.naver.com/anommy/221337573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