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폭동때 북한군침투개입을 부정하는 증거들과 근거들 109개를 반박하겠다  

광주폭동때 북한군침투개입여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길지만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다.

글전체가 한번에 안올라가니 세 부분으로 나누어 올리겠다. 1부터 41까지가 상. 41부터 81까지가 중. 81부터 마지막까지가 하 이다.

 

5.18광주폭동때 북한군침투개입을 부정하는 증거들과 근거들은 인터넷과 책과 방송에서 109개의 증거들과 근거들을 보았다.

5.18광주폭동때 북한군침투개입을 부정하는 109개의 증거들과 근거들을 여기서 전부 확실히 반박해서 박살내보이겠다.

5.18광주폭동때 북한군침투개입을 주장하는 증거들과 근거들은 내가 가진 것들이 250개가 있다.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과 합치면 5.18광주폭동때 북한군침투개입을 주장하는 증거들과 근거들은 400개정도는 될것이다.

5.18광주폭동때 북한군침투개입을 부정하는 증거들과 근거들은 전부 엉터리이고 허접하여 반박을 하는 것이 매우 쉬웠다.

반면에 내가 가진 5.18광주폭동때 북한군침투개입을 주장하는 증거들과 근거들 250개 중에 반박을 할 수 없는것이 100개는 될것이다.

 

5.18광주폭동때 북한군침투개입을 부정하는 증거들과 근거들 109개에 대한 반박.

1.광주폭동때 목격자들이 많았는데 목격자들이 북한군들을 못보았다.

반박. 연고대생으로 가장한 북한군 500명을 많은 광주시민들은 환영식까지 열어주었다. 그 연고대생으로 가장한 북한군이 시위대나 시민군으로 위장하여 

맹활약하는것도 많은 광주시민들,시위대들,시민군들이 보았다. 북한군들을 보았는데 북한군인지 알아보지못했다고 말해야지.  말을 정확히 해야지

침투한 북한군들이 북한군복을 입고 나타나서 활약할줄 알았나?무장공비티가 나게 하고 올줄 알았나?AK소총으로 무장하고 올줄 알았나?

북한말씨를 쓸줄 알았나?북한군들은 남한사람말씨를 6개월간 훈련받고 침투했음.

북한군군번인식표를 휴대하고 올줄 알았나?자신들이 북한군들이라고 밝힐줄 알았나? 

남한사람들과 북한사람들이 외관상 구분이 되나? 침투한 북한특수부대 600명은 남한민간인들로 위장해서 잠입했고 

시위대들이나 시민군들로 위장해서 활동했다.  북한군들,시위대들,시민군들은 구분이 안되었다.

그러니 북한군임을 못알아본거지. 광주폭동때 광주에 있었다고 모든걸 다 정확히 정확히 아는 것처럼 말하면 안되지.

북한군임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광주와 광주근교에 있던 국군일선지휘관들은 북한군들이 광주에 침투했다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계엄군 5.18상황실장 홍순영.검문소 김대위, 북한군에 강간당한 여자 등이 그렇게 말했다. 그외에도 북한군임을 알아본 사람들이 많은데 쉬쉬하면서

침묵하고있다고한다.특히 광주시민들이 그렇다고 한다. 

당시 주한미군 2사단에서 광주에 북한군침투정보로 대책회의가 열였다고한다.북한군임을 알아본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런거지.

계엄사령부와 계엄군지휘자들은 공산당,공산주의자,적색분자,간첩,불순분자가 분명히 개입했다고 말했다. 공산당,공산주의자,적색분자,간첩,불순분자가

북한군과 비슷한 것 아닌가? 시위대들과 시민군들과 광주시민들 중에서 북한군임을 알아챈 사람들을 북한군들이 2명만 제외하고 전부 죽였다.

2명만 살았는데 북한군에 강간당한 여자와 쌍간나새끼라는 말을 북한군이 해서 그쪽은 고향이 광주가 아닌 것 같은데 고향이 어디에요라고 말한 여자였다.

황장엽의 증언에는 남한에 북한간첩이 5만명이 있다고한다. 그 북한간첩 5만명 중에 북한사람이 7000명정도는 되지않을까?

북한사람인 북한간첩들 7000명이 남한에서 암약하며 수십년간 활동해도 잡혀서 처벌받은 경우는 극소수이다. 광주에 침투한 북한군이 5월 21일부터

5월 24일까지 맹활약을 했는데 북한군임을 알아본 사람이 적은건 당연하지.

2.. 비상계엄하에 해안과 광주외곽경비가 철통같아 침투를 못한다.

반박.기나긴 해안선경비는 밤이나 새벽에 경비가 취약하다. 북한군들의 한 무리는 잠수함으로 5월 3일 새벽 3시에 영광해안으로  남한민간인으로 

위장하여 와서 상륙하여 간첩을 따라 광주에 잠입하고 한 무리는 철원에 있는  땅굴로 남한민간인으로 위장하여 와서 땅굴출구를 나와 간첩을 따라 

광주에 잠입했다. 5월 3일 광주에 잠입했으니 광주외곽경비가 허술했다. 계엄령하에 있었어도 생각보다 경비가 허술했다는 증언이 많다.

침투한 북한군들이 전남 17개군에서 무기고 44곳을 털어 엄청난 무기들을 탈취해서 무장한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지.

당시 전남은 치안부재상태였다는 증언들도 있고 광주진입도로들이 통제가 안되었다고한다.

대한민국수립이후 많은 무장공비들이 휴전선을 돌파해서 또는 잠수함으로 또는 땅굴로 침투했는데 그들은 어떻게 침투했다는 말인가?

휴전선과 그 부근은 항상 계엄령이 내려져있는거나 마찮가지 상태이다. 잠수함으로나 땅굴로 침투하는 것이 휴전선을 돌파하여 침투하는것보다

100배는 쉽지. 광주폭동때 김대중의 별동대와 서울에 있던 전라도출신 깡패들도 대거 광주에 침투했다. 김대중의 별동대와 

서울에 있던 전라도출신 깡패들도 광주에 대거 침투했는데 북한군의 최정예인 북한군 534특수부대가 광주에 침투를 못할거라 생각하나?

3. 1.21사태 당시 무장공비 31명과 비교하여 왜 사람들이 잘 몰랐냐?

반박. 1.21사태 당시 124군부대 31명은 휴전선을 돌파하여 왔고 침투하며 총격전을 벌이고 총을 난사하고  버스와 검문소에 폭탄들을 던지고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여 많은 사람들이 북한군인줄 알았다.. 휴전선을 돌파하면 표시가 많이 난다. 반면에 광주침투북한군은 잠수함으로 또 땅굴로

침투하여 남한민간인들로 위장하여 와서 아주 조용히 광주에 잠입했고 광주에서는 시위대들,시민군들로 위장해서 많은 사람들이 

북한군들인지 알아보지못했다.북한군들과 시위대들과 시민군들은 구분이 안되어서 북한군들을 보고도 본 남한사람들은 시위대들이나 시민군들로 여겼다.

4. 전두환이 북한군침투를 모르겠다고 말한 신동아인터뷰.

반박.전두환은 광주사태가 난지 얼마 지나지않은 1980년 6월 4일부터 지금까지 39년 이상 광주폭동때 북한군침투개입을 주장해왔다.

1980년 6월 4일 전두환은 22명의 신원미상시신들이 발견됐는데 모두 북한침투요원으로 보고있다고 말하여 북한군광주침투개입을 처음으로 주장했다.

가장 최근에도 전두환회고록에서 광주폭동때 북한군개입을 18번이나 주장했다.

단 한 번 신동아와 몇 분 인터뷰하며 북한군침투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39년간 주장해오고 가장 최근에 주장한 것이 중요하지.

단 한 번 신동아와 몇 분 인터뷰하며 모르겠다고 말한것이 중요하나? 정치인의 인터뷰는 한 번씩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대통령의 회고록은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며 명예를 걸고 쓰는 것이다. 몇 분 인터뷰한것보다는 훨씬 중요한 것이다.

5.  5월 9일자 CIA문서에서 현재 (5얼9일) 북한군의 특이한 동향이 없다고 되어있다.

반박. 5얼 9일자 CIA문서의 그 구절은 전라도것들이 첫줄만 번역하여 왜곡해서 말한것이다.3페이지의 전체내용은 현재는(5월 9일) 북한군의 특이한 동향이

없으나 미국이 한반도에 관심을 안가지면 북한은 대담한 야욕을 부릴 것이다라고 되어있다. 그 문서전체내용으로 보면 북한군침투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5월 9일에는 북한군들이 남한민간인으로 위장하여 와서 활동을 안하고 숨어있었으니 북한군들의 특이한 동향이 없었다고 할 수 있지.

광주에 침투한 북한특수부대는 5월 21일부터 맹활약을 시작해서 5월 24일까지 계속 했다.

북한군들이 잠수함으로 5얼 3일 새벽 3시에 영광해안에 상륙했는데 1980년 당시 군사첩보위성으로는 야간에는 지상의 사람들을 식별하지못했다고한다.

지상을 감시하는 시간도 적고 설령 남한민간인들로 위장한 북한군들을 보았다고해도 남한민간인들로 알지 북한군들임을 알아보지못한다.

1979년 말의 한 CIA문서에는 북한군이 후방 깊은 곳으로 군대가 투입될 예정이다라고 되어있다.

광주폭동당시 주한미군 2사단에서 광주에 북한군침투정보로 대책회의가 열렸고 주한미군 2사단의 부대장이 광주에 북한군들이 침투했다고 말했다.

주한미군에서 광주에 북한군들이 침투한줄 알았는데 CIA에서 몰랐겠나?

1980년 5월 19일자 CIA보고서에는 광주사태가 처음 난 다음날 5월 19일 김일성주재로 열린 북한고위급비밀회담에서 광주사태가 전국규모로 확산될

조짐이 보이면 즉시 남침을 한다고 김일성은 결심했었다고 되어있다.

다른 CIA문건에는 김일성과 인민무력부장 오진우 등 북한군수뇌부는 광주사태가 나기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다 알고 있었다고 되어있다.

김일성과 북한군수뇌부들이 북한특수부대 600명에게 어떤 행동들을 할 것을 명령했으니 광주폭동때 광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다 알았지.

1980년 5월 19일 주석궁에서 김일성과 오진우 등 북한군수뇌부 비밀회담에서 광주폭동이 전민봉기로 확산되면 남침하기로 결정했다고 되어있다.

6. 북한군 600명이 침투했는데 계엄군사망자가 왜 적었냐?

반박.  계엄군들과 북한군 600명은 총격전을 벌일 기회가 적었다.침투한 북한군들은 총격전을 벌이려 광주에 침투한 것이 아니라 심리전을 벌여 

광주폭동이 전라도로 확산되어 친북성향의 전남국을 세우거나 전라도의 폭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당시 남한정부를 전복하려한 것이다.

침투한 북한군들 600명은 5월 21일 계엄군들과 총격전을 벌인다. 계엄군들 4000명은 조선대와 광주교도소로 철수했다가 광주밖으로 철수한다.

철수한 이유는 나의 추측인데 상대의 공격이 거세니 희생자들이 적게 나오게 하기위해서 작전상철수를 한게 아닐까?

북한군들이 광주교도소습격 5회를 할때 계엄군들과 총격전을 벌인다. 이때도 계엄군사망자들이 별로 나오지않았다고 한다.

계엄군들은 5얼 27일 광주에 재진입을 하며 진압작전을 펼치는데 광주에 있던 북한군들은 5얼 24일 밤에 갑자기 전부 사라졌다. 

그래서 재진입하여 진압작전을 펼치는 계엄군들과 총격전이 벌어지지않았다.

광주밖에서 북한으로 도주하는 북한군들을 계엄군들은 우세한 무기들로 사살할 수 있어서 계엄군사망자들이 적었다.

7.침투한 북한군시신들이 왜 없냐?

반박. 아니다 침투한 북한군시신들이 있다.1년전에 발표된 북한군문서와 보위부문서에는 광주망월동묘역에 매장된 아직도 신원이 확인이 안된 12구의

시신 중 11구의 시신이 광주에 침투한 북한군들 시신이라고 되어있다.그 문서들에 의하면 팀투한 북한군들 600명 중 110명은 북한에 살아돌아가고 

475명은 광주근교에 암매장되었고 11명이 광주망월동묘역에 묻혔다고한다.

광주에 침투했던 북한군출신 탈북자의 내용인 보랏빛호수라는 책에는 북한군들이 계엄군들의 총에 맞아 전사하는 경우 시신을 노출시키지않을려고

북한군 개인마다 몸에 지닌 폭약 2~3킬그램과 맞먹는 100그램의 고성능폭탄으로 살아있는 북한군들이 북한군들시신들을 폭파해서 

폭파흔적을 땅을 파서 흙으로 덮었다고한다. 그렇게 하면 시신을 찾기어렵고 발견도 어렵다.

8.항쟁지도부는 간첩으로 의심되는 자를 신고한 적이 있다.

반박. 연고대생으로 가장한 북한군 500명을 광주시민들,시민군들,시위대들은 환영식을 열어주었고 침투한 북한군 600명이 광주폭동을 주도했다.

남한의 고정간첩 약 1000명도 광주폭동때 광주에서 활동을 했다. 그래놓고 어떻게 간첩으로 의심되는 자를 신고한 적이 있다고 북한군침투를 부정하려하나?

1~2명을 신고해서 광주침투북한군 600명과 고정간첩 1000명의 전모가 드러나나?

9. 보수의 인사 중에서도 광주폭동북한군침투개입설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박. 대표적인 그런 사람으로 조갑제기자가 그런 주장을 하던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광주에서 북한군들을 보고도 북한군들임을 알지못했다.

조갑제기자가 북한군침투개입을 부정하는 증거들과 근거들은 전부 엉터리이고 허접하여 아주 쉽게 반박해서 박살낼 수 있다. 

진실을 잘 몰라서 그렇게 주장하거나 조갑제기자의 행적들에는 몇번 의심스러운 점들이 있다. 결정적인 순간에 전라도것들과 친북좌파,친북좌익의 편을

들어버렸다. 북한군광주침투개입은 보수,진보,우파,좌파를 막론하고 역사적 진실이 규명되어야한다.

10.북한군광주침투개입을 주장하는 탈북자들의 말은 카더라에 불과하다.

반박. 탈북자들 몇명 몇십명이 그런 말들을 하는게 아니라 2만명이 넘는 탈북자들이 비공개적으로 그런 말들을 하고 그 2만명 중에 극소수가 공개적으로

그런 말들을 증언한다. 남한으로 온 탈북자들 3만 2천명 중에 북한군광주침투개입을 들어본 탈북자들이 90%이상이라고 한다. 

탈북자들말에 의하면 북한정권,북한군들,북한주민들사이에서는 광주폭동때 북한군광주침투개입은 공공연한 확고한 사실이며 북한에서는 어린애들도 

다 아는 사실이라고 한다. 김대중정권때의 국정원과 노무현정권때의 국정원은 탈북자들이 5.18광주사태에 대해 증언을 하지못하도록 5.18보안각서를

써도록했다고한다.

북한군들을 광주에 침투,개입시킨 북한정권과 북한군들이 북한군광주침투개입여부를 더 잘안다. 

북한주민들은 그들로부터 전해들어 아는 것이고. 북한교과서와 북한역사책과 북한대남공작책에는 김일성이 광주사태를 일으키고 주도했다고 적혀있다.

김일성이 1980년 5월 중앙당 3호청사 부장회의에서 비밀지령을 내려 북한특수부대의공작을 직접 지시했고 그에 따라 현역 특수부대 1개대대가 

광주에 침투했다. 광주폭동때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침투했는지 잘 아는 사람들 중에 한 부류는 북한특수부대로 광주에 침투해서 활약을 하다가 

북한으로 철수하여 북한에 살다가 북한을 탈북하여 남한에 오거나 해외에 간 탈북자들을 들 수 있다. 

남한에 온 그런 탈북자는 김명국(가명),박승원,분당에 산다는 탈북자가 있다.

그들은 모두 광주폭동때 북한군들이 광주에 침투했다고한다. 해외에 간 그런 탈북자들도 그렇다고한다. 

자신들이 북한군으로 광주에 침투해 활약했으니 아주 잘 알지. 북한군광주침투개입여부를 그들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있겠나.

광주에 침투한 북한특수부대원이 아닌 북한특수부대출신탈북자들도 광주폭동때 북한군광주침투개입여부를 잘 아는 부류이다.

그들도 모두 광주폭동때 북한군침투개입이 맞다고한다.

책이나 서류나 컴퓨터소프트웨어나 하드디스크나 usb도 사람들의 말이나 생각을 기록한 것이다. 

탈북자들의 말은 광주폭동의 진실을 알 수 있는 인적정보이다. 카더라에 불과하다고 우기면 안된다.

탈북자들은 남한에 들어올 당시  경상도출신도 아니고 전라도출신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고 좌파도 아닌 제 3자 입장이고 중립적 입장이고

북한군광주침투개입의 진실을 잘 아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들을 믿을 수 있다.

11. 청진에 있는 광주폭동때 침투해서 사망한 북한특수군의 묘와 묘비(인민군영웅들의 렬사묘와 묘비)는 북한 어느지역에나 있는 것이다.

반박.  북한 어느지역에나 있는 인민군묘와 묘비는 6.25전사자들의 묘와 묘비이고 청진에 있는 인민군영웅들의 렬사묘와 묘비는 광주폭동때 광주에 

침투해서 광주와 광주근교에서 전사한 북한군 534특수부대의 전사자들의 묘와 묘비이다. 그 534북한특수부대전사자들 158명의 묘가 청진에 있는 

인민군영웅들의 렬사묘이다. 1년전에 발표된 북한군문서와 보위부문서에도 청진에 있는 인민군영웅들의 렬사묘는 광주폭동때  광주에 침투해서 활약한

광주침투534북한특수부대전사자묘지라고 되어있고 문서의 명단과 묘비에 새겨진 명단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12.  북한특수부대 600명이면 휴전선에서 먼 광주까지 갈 필요없이 계엄사령부를 공격하지 왜 먼 광주까지 가서 공격을 했느냐?

반박.  광주에 침투한 북한군들은 무기들을 가지고 오지않았다. 전남 17개지역의  무기고 44곳을 털어서 무기들을 현지조달해서 무장했다.

서울에서는 그렇게 무기고들을 털어서 무기들을 현지조달을 못한다.  북한특수부대 600명이 계엄사령부를 공격하려 시도하면  공격하러가는 도중에 

전부 사살된다. 전라도는 남한에서 친북성향,반역성향,좌익성향,폭동성향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그런 전라도의 성향을 이용해서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켜서 

전라도전역에 폭동이 일어나게하여 전남국을 수립하거나 전라도의 폭동이 전국으로 번지게하여 당시 남한정부를 전복하면 해주에서 대기하고있던 

10만에서 15만의 북한군들이 남한을 기습남침하여 남한을 삼키려했다.

13. 광주폭동당시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은 1980년 5월 13일 북한남침설은 근거가 없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반박. 5월 13일에는 광주에 침투한 북한군들이 남한민간인들로 위장하여 와서 숨어있었다. 잠수함에 있으면 또 땅굴안에 있으면 또 남한민긴인들로 

위장해서 숨어있으면  군사첩보위성에서 보이지않는다. 5월 3일 새벽 3시 잠수함에서 영광해안으로 상륙하는 북한군들을 군사첩보위성으로 보지못했다. 

1980년의 군사첩보위성은 야간에 지상에 있는 사람들을 식별할 수 없었고 지상을 감시하는 기간도 짧았다.

북한군들은 남한민간인들로 위장하여 와서 정보요원들이 보았다해도 북한군들인지 알기 어려웠다.

철원에 있는 땅굴출구로 나온 북한군들은 남한민간인들로 위장하여 와서 북한군들인지 들키지않았다.

광주에 침투한 북한군들은 5월 21일부터 활약했다. 북한군들이 5월 21일부터 맹활약을 하니 이틀정도 지나서 북한군들이 침투한지 확실히 알게되었다.

5월 23일전에는 북한군침투첩보만 있었다.

5월 23일정도 되어서야 북한군들이 광주에 침투한지 주한미군에서 알게되었다. 5월 13일에는 주한미군에서 몰랐으니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이

그렇게 보고를 할 수밖에 없었을것이다.. 광주폭동기간 중에 주한미군 2사단에서 북한군광주침투정보로 대책회의가 열렸고 주한미군 2사단 부대장이

광주에 북한군들이 침투했다고 말했다고한다. 주한미군 2사단에서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과에게 그런 보고를 했을것이다.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은 전두환과 매우 사이가 안좋았고 갈등이 심했으니 전두환에게 유리해질 말을 하지않았을 것이다..

존 위컴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의 회고록에는 전남출신의 당시 합참의장인 문형태의 발언내용이 있다.문형태의 말은 공산당들이 시내에 들어와 있거나 

아니면 외부에서 과격분자들이 조종하고 있는게 틀림없다고 말하여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고 증언하는 내용이 있다.

존 위컴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 광주폭동때 북한의 개입이 근거없다고 생각했으면 자신의 회고록에 그런 내용을 썼겠는가?

14. 특수부대작전은 최소한 침투루트가 확보되지않으면 작전자체가 실현되기 어렵고 5.18진압작전기간은 며칠만에 종료되었다.

반박. 침투루트가 확보되었다. 잠수함으로 또 땅굴로 남한민간인들로 위장하여 와서 간첩을 따라 광주에 조용히 잠입했다.

북한정권과 북한군수뇌부는 10.26사태이후부터 천재일우의 기회로 생각하고 맹훈련을 시켜온 북한특수부대를 남한에 침투시킬 것을 치밀하게 

준비해서 광주에 북한특수부대 600명을 침투시켰다. 침투한 북한특수부대는 5월 21일부터 5월 24까지 맹활약을 하다가 광주도청에서 5월 24일밤에 

갑자기 사라졌다. 북한특수부대가 국군이 침투대비를 하지않고 있던 광주에 침투해서 빨리 치고 빠져나갔으니 작전이 성공한거지.

15. 2중 3중으로 봉쇄된 광주로 북한군 수백명이 들어올 수 있다면 방법은 딱 한가지다. 전두환정권이 북한군을 초청하여 길을 열어주고 북으로

호송까지 해주면 가능하다.

반박.  북한특수부대는 광주가 봉쇄되기전인 5얼 3일 한 무리는 잠수함으로 남한민간인들로 위장하여 와서 영광해안으로 상륙하여 간첩을 따라 

잠입하고 한 무리는 땅굴로 남한민간인들로 위장하여 와서 땅굴출구를 나와 간첩을 따라 광주에 조용히 잠입했다.

남한민간인들로 위장하여 와서 땅굴출구를 나와 간첩을 따라 광주에 조용히 잠입했다.  2의 반박을 참조.

16. 북한특수군 600명이 광주에 들어왔다면 광주는 지금도 북한정권의 섬이 되어있을 것이다.

반박. 계엄군들이 재집입하기전인 5얼 24일 밤에 북한군들은 광주에서 전부 갑자기 사라졌다. 600명의 군인들로 광주를 계속 장악할 수 있나?

17.계엄군의 장교들 중에 어느 한 사람도 북한군의 출현에 대하여 보고하거나 주장하는 사람이 없다.

반박. 아니다. 광주와 광주근교의 일선지휘관들은 북한군들이 광주와 광주근교에 침투했다는 사실을 알고있었고 북한군들 출현을 상부에 보고했다.

검문소의 김대위라는 사람이 돈 커크라는 외국기자와 그 일행이 광주로 들어가려하자 북한군들이 영광해안으로 들어와 

광주근교의 야산,들판,논에서 대기하여 위험하다고 말하고 진입을 제지했다.No1 Shimbun이라는 일본 도쿄의 일본 외국특파원협회지에 그 기사가 실렸다.

계엄군 5.18상황실장 홍순영증언에는 북한군같은 자들이 있었다. 북한군같은 자들이 1.21사태때 침투했던124북한군부대가 신었던 신발과 

같은 신발을 신고있었다.지휘체계가 북한군같다. 북한군시신들위에 하얀 찔레꽃이 놓여있었다.하얀찔레꽃은 북한군들이 가장 선호하는 꽃이고 

찔레꽃은 남파간첩의 암호이다. 무장트럭에 탄 북한군들로 추정되는 폭도들이 화이바에 찔레꽃을 꽃음 

광주폭동영상들에 북한군총지휘자 이을설이 찔레꽃이 놓인 관들을 붙잡고 우는 장면들이 있다. 북한군전술같다.걷는 모습이 북한군같다.

국군일선지휘관들이 상부에 보고했으나 상부에서 일리가 있다는 의견과 과한 주장이다라는 의견으로 대립했다고한다.

계엄사령부와 계엄군지휘자들은 공산당,공산주의자들,적색분자들,간첩들,불순분자들이 분명히 개입했다고 말했다.

공산당,공산주의자들,적색분자들,간첩들,불순분자들이 북한군들과 비슷한 의미 아닌가.

18. 600명의 북한군병력을 선박으로 목포인근해안까지 침투하는 작전을 시행할 수 있을까?

반박. 북한군들은 한 무리는 잠수함으로 남한민간인들로 위장하여 영광해안에 상륙하여 간첩을 따라 광주에 잠입했다.선박으로도 불가능한게 아니다.

북한잠수함은 서해를 지나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잠실까지 들어온 적도 있다.전라도해안에 어두운 새벽때 잠수함으로 침투하는 것이 어렵지않다.

북한군은 잠수함이 우세하고 1980년 당시는 더욱 그랬다.

19 국군대북감청부대는 계속 잠만 자고있었는가?

반박. 광주침투북한군들의 무선통신은 국군감청부대에 걸리지않았다. 북한군들은 광주폭동상황을 북한정권과 북한군수뇌부에 계속 보고했다.

황장엽의 증언에 의하면 남한에 북한간첩 5만명이 있다고 한다. 그 5만명의 북한간첩이 수십년간 간첩활동을 하고 북한정권과 교신을 해도 잡힌

북한간첩은 극소수이다. 5만명의 북한간첩이 수십년간 간첩으로 암약하여 북한정권과 교신을 해도 잡힌 북한간첩이 극소수인데 광주에서 북한군이

4일에서 5일정도 극히 짧은 기간 북한정권과 교신했던 것이 국군대북감청부대에 들켰겠는가?

20. 통신없이 장기작전을 1개대대 병력이 적진에서 한다?

반박. 아니다. 북한군들은 무선통신으로 북한정권과 북한군수뇌부와 교신했다.북한군들은 광주폭동상황을 북한정권과 북한군수뇌부에 계속 보고했고 

지시를 받았다. 북한군들이 맹활약을 한 것은 5월 21일부터 5월 24일까지 4일간이어서 짧은 기간이었다.

21.대규모비정규전으로 남한사회를 뒤흔들었다가 몇번의 실패를 하고 후회하던 김일성이 과연 이 작전을 허락했을까?

반박. 김일성은 1980년 5월 중앙당 3호청사 부장회의에서 비밀지령을 내려 북한특수부대의 공작을 직접 지시했고 그에 따라 북한군현역특수부대 

1개대대가 광주에 침투했다.대한민국수립이후 무장공비침투로 남한을 뒤흔들었으니 작전이 완전히 실패한 것이 아니다. 어느정도는 성공한 것이다.

김일성이 후회했을리가 없다.

22. 대대단위는 특수전에서는 불가능하다. 통제가 안되니 자명하는 셈이다.

반박. 북한군은 20만의 특수부대를 보유하고있다. 대대단위로 특수전이 안되면 북한정권과 북한군이 미쳤다고 20만의 특수부대를 보유하고 있겠는가?

23.큰 희생을 치러 김일성이 얻는 이익이 무었인가?

반박. 북한특수부대 600명을 광주에 침투시킨 목적은 친북성향의 전남국을 세우거나 당시 남한정부를 전복하여 해주에서 대기하고있던 

북한군 10만에서 15만명을 기습남침시켜 남한을 삼키려했다. 그런 상황이 되면 김일성은 아주 큰 이익을 얻는다. 그것이 성공못해도 국군,남한정부와

광주시민들,시위대들,시민군들,전라도인들을 이간질시켜 광주폭동을 크게 일으켜 남한을 큰 혼란에 빠뜨리고 남남갈등을 조장할 수 있다.

김일성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어 이익을 거두었다.

24.인민무력부장이 실패하면 자기목이 달아나게 되는 이런 작전계속을 수립하여 김일성에게 보고했겠나?

반박. 실패하지않기위해 북한특수부대는 오래동안 강훈련을 받았고 치밀한 작전계획을 세웠고 당시 남한의 혼란기라서 성공가능성이 높았다.

100%성공한다는 군사작전은 적다. 실패할 위험부담은 어느 군사작전에서나 있는 편이라서 그런 군사작전이 실패한다고해도 인민무력부장이 목이 

달아나지않는다. 광주폭동을 일으키고 주도한  북한군들과 계획하고 보낸 대남공작부,북한장성들,김정일은 훈장을 받거나 승진했다.

25.1968년이후 김일성의 대남무력도발은 그 전술이 바뀌어 더 이상 대규모침투는 안되겠다고 판단했다.

반박. 대규모침투를 안할 북한군이 미쳤다고 북한특수부대 20만을 양성하고 강훈련을 시키고 유지하나?

26.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정보는 고사하고 카더라식의 첩보도 없었다.

반박. 13의 반박과  17의 반박을 참조.

27. 많이 태울수록 배는 느려져 도주에 한계가 있다.

반박. 많이 태운다고 배가 그리 느려지지않는다. 북한군들은 바다에서는 잠수함을 타고 이동했다.

28. 광주사태 당시 북한군 1개대대를 투입해서 무얼 얻고자 한 것일까?

반박. 23의반박을 참조.

29.북한군침투개입을 말하면 왕따를 당한다.

반박. 그건 북한군침투개입을 부정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것이다.북한군침투개입을 부정하는 증거들과 근거들은 전부 엉터리이고 허접하다.

반면에 북한군침투개입을 주장하는 증거들과 근거들은 400개나 되는데 반박을 할 수 없는 것이 150개는 된다.

그러니 두 증거들과 근거들을 비교하여 생각하면 북한군광주침투개입을 부정하는 자들은 바보취급을 당한다.

30. 북한군 600명침투는 투명인간들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반박.  1의 반박과 2의반박을 참조. 광주에 침투한 북한군들이 투명인간들이라서 못본게 아니라 

남한민간인들,시위대들,시민군들,연고대생으로 위장했으니 북한군임을 알아채지못한거지.

31. 북한이 특수부대를 내려보낼때는 우리국군으로 위장시킨다. M1총,칼빈소총,우리군복을 마련해 입혀내려보내는데 600명분을 급히 마련하기는 

쉽지않았을것이다.

반박. 북한특수부대가 우리국군복장으로만 위장해라는 법이 있나? 남한민간인들,시위대들,시민군들,연고대생들로 위장할 수도 있는거지.

북한정권과 북한군은 10.26사태이후부터 남한의 혼란기에 강훈련을 시켜오던 북한특수부대를 투입시킬려고 준비해왔다. 급히 마련한게 아니다.

32. 보급품은 어떻게 수송했나?

반박. 무기는 전남 17개 지역의 44곳의 무기고들을 털어서 현지조달하여 무장했고 식량은 시민군들,시위대들과 함께 있어서 별로 어렵지않게 조달했다.

33. 미국무부문건에 5.18은 공산주의가 배후에 있지않다. 이것은 확실한 사실이다라고 되어있다.

반박. 원문은 The may 13 incident was not communist inspired or infiltrated or infected   This is clear fact. 라고 되어있다.

원문에 5월 13일로 되어있고 5월 18일로 기재되어있지않다. 5.18광주폭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벌어진 일을 말한다.

5월 13일에는 광주시민들인 대학생들이 평범한 시위와 데모를 했고 공산주의자들이 가담했다는 증거가 없었다.

광주에 침투한 북한군들은 5월 21일부터 5월 24일까지 맹활약을 했다.

5월 21일전에는 북한군들이 잠수함에 있거나 땅굴안에 있거나 남한민간인들로 위장해서 숨어있었는데 북한군들이 광주에 침투한 것을 

미국무부는 5월 13일에는 몰랐을 것이다.

34. 1980년 5월 10일 육군정보참모부보고서에는 북한군사동향은 정상적인 활동수준으로서 특이한 전쟁징후는 없다라고 되어있다.

반박. 5월 10일에는 국군들이 광주에 북한군들이 침투를 한줄 몰랐다. 광주에 침투한 북한군들이 5월 21일부터 맹활약을 했으니 국군은 

계엄군일선지휘관들이 5월 23일정도에 북한군들이 광주에 침투한줄 확실히 알았다. 

침투한 북한군들이 활발히 활동을 해야 알지. 땅굴안에 있거나 잠수함에 있거나 남한민간인들로 위장해서 숨어있으면 국군이 알기어렵다.

35. 북한군에 죽은 사람이 없다.

반박. 아니다. 북한군들에 죽은 사람들이 많다.민간인사망자들 166명 중에 120명정도가  북한군들에 의해 살해당했는데 80명은 

칼빈총,M1총,LMG기관총에 의해 살해되었고 40명은 총이 아닌 수단에 의해 살해당했다. 계엄군들 중에도 약 20명정도가 북한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36. 당시 광주에 있던 기자들 중에 북한군을 보았다는 기자가 없다.

반박. 1의 반박을 참조.  김영택기자는 정체불명의 복면부대는 대한민국사람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라는 증언을 했다.. 

김동명기자는 북한군개입의혹을 5얼 19일부터 품었다고 증언했다. 미국의 NBC기자도 시민군총기에 의한 총상으로 죽임을 당한 시민사망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못박아 말했다. 운동권학생들이 누군지 알지못하는 과격파가 등장해서 무장봉기를 주도했다고 보도했다. 그 과격파가 북한군들이다.

다른 기자들도 위와같이 말하는 기자들이 있다.광주에 있던 기자들 중에 북한특수부대의 전술,지휘체계,침투방법,특징을 아는 사람이 몇명이나 되었겠나?

없거나 아주 적었을 것이다. 당시 광주에 있던 기자들은 남한사람과 북한사람을 구분하는 비법이라도 가지고있었는가?

북한사람을 남한사람으로 위장해서 보여주면 당시 광주에 있던 기자들은 북한사람이라고 판정을 할 수 있겠는가?    

당시 광주에 있던 기자들은 시위대들과 시민군들과 같이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말하고싶은가?  당시 광주에 있던 기자들이 유언비어에 영향을 안받았다는 

보장이 있는가? 당시 광주에  있던 기자들이 행동과 취재에 크게 제약을 받았는데 많은 곳들을 보고 취재헀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시 광주에 있던 기자들은 광주폭동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렇게 말했고 그렇게 말하는게 계속 되고 있는 것 아닌가?

북한군들이 많았다고 주장되는 곳들에 당시 광주에 있던 기자들은 그곳들에 가서 북한군들을 취재했는가?   

전라도것들이거나 좌익세력이거나 종북세력인 기자들은 북한군들을 보고서도 못봤다라고 말할 것이다. 전라도것들이거나 좌익세력이거나 종북세력인

기자들은 북한군광주침투개입의 증거들과  근거들이 명확한데도 그들세력의 건재를 위해 무조건 광주폭동때 북한군침투개입을 부정한다.                           

37. 5.18광주폭동때 연고대생으로 칭하는 500명은 투입된 신군부의 공작원들이거나 편의대거나 선무공작요원들이거나 전두환의 특수공작부대이다.

반박. 신군부의 공작원들,편의대,선무공작요원들,전두환의 특수공작부대가 미쳤다고 20사단지휘부차량을 공격하여 차량을 탈취하고 전남 17개지역의

44곳 무기고들을 털어 엄청난 무기들로 무장하고 아세아자동차를 습격하여 장갑차 4대와 차량 420대를 탈취하고 장갑차로 계엄군을 깔아죽이고

광주교도소를 5번 습격하고 계엄군들과 총격전을 벌여 계엄군들을 광주밖으로 쫓아내나? 폭동이 빨리 진압되도록 노력하지. 미쳤다고 폭동을 크게

증폭시키고 무기반납도 못하게 막나? 전두환이 미쳤다고 분란을 크게 일으키며 느리게 권력을 잡으려고 했겠나? 분란을 덜 일으키며 빨리 권력을 

잡으려고 했겠지.

38.전남의 17개지역 44곳 무기고들은 알만한 위치에 있었다.

반박. 광주나 나주 등 도시에 있는 경찰서나 파출소에 있는 무기고들은 알만한 위치에 있었다고해도 다른 무기고들은 알만한 위치에 있었지않았다.

다른 무기고들은 극비사항으로 일반인들이 어디있는지 알기어렵다. 전남 17개시군의 44곳의 무기고들을 4시간만에 털어서 엄청난 무기들로 무장한건

미리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해두지않으면 그렇게 하기 불가능하다.  무기고들이 어디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기고들을 찾는 시간과 무기고들을 

터는 시간을 고려하면 위치가 극비사항인 무기고들을 털어서 무장하려면 적어도 일주일이나 이주일정도는 걸릴 것이다. 

북한정권과 북한군수뇌부는 남한에 있는 간첩들과 광주폭동이 나기 몇달전에 미리 침투시킨 북한군들에게 광주폭동이 나기 몇달전부터 

전남의 모든 무기고들의 위치를 조사하게하였다. 남민전도 무기고들의 위치를 조사했다.

전라도것들이 주장하는대로 계엄군들의 과잉진압에 그에 대응하여 5월 21일부터 무장을 시작했으면 광주에 있던 경찰서들과 파출소들을 

터는정도였을것이다. 시민군들은 5월 21일이 아닌 5월 19일부터 광주와 나주의 무기고들을 털어서 무장했다.

힌츠페터의 영상과 사진에도 5월 20일에 찍은 영상과 사진에 총으로 무장한 폭도들을 태운 트럭들이 광주로 달려오는 장면이 찍힌 영상과 사진이 있다.

39. 장갑차는 광주시민들이 운전할 수 있었다.

장갑차를 운전하는 군인들과 군사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장갑차를 몰아보지않은 사람들은 장갑차를 몰지못한다고한다. 모든 유형의 장갑차들을 

장갑차들을 몰아보지않은 사람들은 장갑차를 몰지못한다고한다.폭도들은 장갑차를 아주 능숙하게 몰았다. 장갑차를 지그재그식으로 몰아 

한 명의 계엄군이 장갑차로 깔아죽였다. 장갑차를 몰아보지않은 현역군인도 못하는 행동이다.

당시 대학생들도 장갑차를 몰지못했다. 1980년에는 자동차를 모는 대학생들이 아주 적었다. 대학생들이 자동차도 몰지못하는데 장갑차를 몰 수 있었겠나?

북한군들은 연고대생으로 가장하여 와서 활약했지.  자신이 광주폭동때 장갑차를 몰았다고 주장하는 광주시민이나 대학생은 한 명도 없다.

40. 안기부가 작성한 광주사태 상황일지 몇 피해상황에는  북한군내용들이 언급되지않았다.

반박. 안기부의 전신은 중앙정보부이고 1980년에는 안기부가 아니라 중앙정보부였다. 광주에 있던 중앙정보부분실,보안사분실,경찰서에 있던 

북한군침투개입정황이 기록된 서류들을 광주가 북한군치하인 5월 21일부터 5월 24일사이에 북한군들이 전부 수거해서 불태웠다.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는 폭도들 중에 공산주의자,공산당,적색분자,간첩,불순분자가 있다고 말했다. 공산주의자, 공산당,적색분자,간첩,불순분자가 

북한군과 비슷하지않은가. 광주폭동때 광주에서 북한군 600명과 간첩 약 1000명이 광주폭동을 일으키고 주도했다. 그 사실이 인정이 되면 

중앙정보부와 보안사와 광주경찰은 큰 책임을 져야하고 큰 문책을 받을 수 있고 큰 비난을 받을 수 있고 아주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나의 추측인데 광주에 있던 북한군침투개입정황이 기록된 자료들도 전부 불타서 없어진김에 큰 책임을 지지않기위해  큰 문책을 받지않기위해

큰 비난을 받지않기위해 아주 부끄럽지않기위해 광주폭동때 북한군침투개입을 몰랐다고 말하거나 부정해버리자라고 결정한건 아닐까?

안기부와 국정원이 광주폭동때 북한군남파를 알고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안기부와 국정원이 그렇다면 그 전신인 중앙정보부도 알고있었을것이다.

김대중정부의 국정원은 탈북자들에게 절대로 광주사태에 말하지마라고하며 5.18보안각서를 쓰도록 강요했다.

광주폭동때 북한특수부대로 광주에 침투해서 활약하다가 북한으로 철수해서 북한에 살다가 북한에서 못살게 되어서 탈북하여 남한에 온 탈북자에게는

김대중정부의 국정원이 광주사태에 대해 말하면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다고한다. 진실이 공개되는게 두려워서 그렇게 하는 것일 것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정보를 왜곡했다는 증언이 있다. 미국항공모함 두 대가 남한에 입항한 이유를 왜곡했다고한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북한군들 600명의 광주폭동때 광주침투개입을 알았다는 증언도 있다.

41. 탈북자들의 말들은 일관성이 없다.

반박.  탈북자 2만명이 말하니 약간씩 다를 수야 있지. 탈북자 2만명이 비공개적으로 북한군침투개입을 말하고 공개적으로 북한군침투개입을 말하는 

탈북자들은 극소수이다. 북한에서는 광주폭동때 북한군침투개입이 공공연한 확고한 사실이니 탈북자들 거의 대부분이 그렇게 말하지.

광주에 침투,개입한 북한군들은 4경로로 침투했다.. 잠수함으로 침투한  북한군무리.땅굴로 침투한  북한군무리. 

적은 수의 북한군들이  배로 침투한 무리, 적은 수의 북한군들이 광주폭동이 나기 몇달전에 침투한 북한군무리.

여러 경로로 나누어 보냈으니 어떤 경로만 알고있는 탈북자들은 말들이 다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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