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로당은 대화할 여지가 있었음, 그러나 군에서 사령관을 교체하여 진압하고, 그 와중에 군이 도민을 학살
2) 남로당=당시 좌파라고 할 수 없는게 제주도민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부정적이었음
-5.10총선에서 제주도선거구 2개가 투표 미달로 선거가 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남
3) 4.3 사건에서 남로당과 군경의 문제는 최악과 차악을 다루는 문제임. 이승만이 본질적으로 공산화를 막았다는 선의 목표를 갖고 있었더라도 1만명을 학살 한 것은 없어지지 않음
1.21 이승만 대통령, 국무회의에서 제주와 전남지역의 사건에 대해 언급하면서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拔根塞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유시
아니, 예비검속 자체가 싹수가 보이는 놈들 다 잡아다 쳐 넣는거라니까. 일제강점기의 치안유지법하고 다를 바가 없음. 그런데 치안유지법 깔 때 일본 경찰들만 까는 건 아니잖어. 치안유지법 제정한 일본 정부도 까는 건데. 예비검속 자체가 문제였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방안이 있었느냐 하면 모르겠지만
. 이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제주도민들이 희생됐고 대부분의 중산간마을이 불에 타는 등
글자 그대로 ‘초토화’ 됐다.
초토화의 책임은 당시 정부와 주한미군사고문단에게 있다고 판단된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군 통수권자이며, 미군은 당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기 때
문이다.
남로당은 실질적으로 북한과 연락체계가 살아있던 북한노동당 남한지부였음 이새끼들 씨를 안말렸으면 625때 북한과 동조해서 수많은 테러행위를 벌이며파괴공작을 했을꺼임. 이건 이미 여순사태로 증명됐고. 심지어 김일성이 625를 적극적으로 벌인 근본적인 이유 하나가 남로당을 믿었기 때문임. 전쟁발발하면 지들지원해줄걸 알았거든. 남로당을 학살한건 625에서 남한이 살아남을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중의 하나로 역사에서 평가되고 이승만의 초기 최대 업적중 하나라고 볼수있음. 임산부가 죽고 양민이 죽었다? 상처부위를 파내다보면 피가 섞여나오기 나름일뿐. 그거까지 처리할 능력이 없었던걸 비판할수는 없음. 넌 미군 핵에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끌려간 조선징용부 몇분이 죽었다고 미국을 학살자라 욕할꺼냐?
왜 내가 직접명령한 증거를 가져오라고 하냐면, 노무현때도 민주화이후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군인동원해서 민간인 진압한 사례가 있고, 한미fta때 농민을 강제진압하다가 때려죽인 사건이 있어, 근데 니 논리대로라면 농민사망사건도, 군인의 민간인 진압도 전부 노무현이 직접명령해서 그런거라는 결론을 내릴수있지.
현재의 병력만으로도 진압이 가능하다는 내용의 이 보고서는 하지사령관으로 하여금 무력 진압을 결정하게 하였고, 결국 김익렬과 김달삼의 평화협상은 미군정 수뇌부에 의해 무시되었다.
평화협상 직후인 5월 1일에는 오라리 마을 방화사건이 발생, 협상을 파기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이 방화는 우익 청년들이 저질렀지만, 미군정과 경찰은 “폭도들이 한 행위”로 조작했다. 미군이 이 불타는 마을을 촬영,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란 영상 기록물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제주도민들이 희생됐고 대부분의 중산간마을이 불에 타는 등 글자 그대로 ‘초토화’ 됐다. 초토화의 책임은 당시 정부와 주한미군사고문단에게 있다고 판단된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군 통수권자이며, 미군은 당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기 때 문이다.
. 미군이 제주도 서청을
후원했다는 근거는 미군 스스로의 정보보고서에서도 확인되고 있다.97) 또한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10월 24일 ‘임시경찰(temporary policemen)’로서 활동하는 서
청 단원들이 조천면 신흥리 사건 현장에 파견돼 게릴라를 쫓아냈다”98)고 기록, 이
때 이미 경찰의 신분을 인정하고 있다. 또 다른 미군 정보문서에는 공개적으로, 때
로는 ‘은밀한 모병(the secret induction)’을 통해 서청 단원들을 제주도에 파견했
다는 내용도 있다.99)
이승만도 서청을 군인과 경찰로 전격 교체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런 사실은 미군
기밀문서와 서청 단원의 증언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미 정보보고서는 ‘청년단, 군대
와 경찰을 강화시키다’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보고에 의하면 최근 대통령(이승만)과 내무부장관(신성모)의 합의에 따라 서북청
년 단원들이 한국군에 6,500명, 국립경찰에 1,700명이 공급될 예정이다. 이들은 남
한 전역에 있는 9개 경비대와 각 경찰청에 배정될 것이다. 모든 단체들간의 상호합
의에 따라, 서북청년회는 경찰에서 단원 20명당 경사 1명, 50명당 경위 1명, 2백명
당 경감 1명 등의 비율로 경사급과 간부급 요원으로 배치하도록 합의돼 있다.100)
서청 단원으로 1948년 12월 19일 동료 250명과 함께 제주에 도착, 경찰의 길을
걸었던 박형요는 이승만 대통령이 서청 총회에 직접 참석, 모병을 역설하는 연설을
듣고 제주도까지 오게 됐다고 증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