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결! 대위, 유진영은 금일 부로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사람 인생이란 게 원래 자기 생각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 법이다.


“그래, 3중대장 그동안 고생 많았어. 내가 이번 진급은 꼭 챙겨주려고 했었는데, …미안하게 됐네.”


그리고 그 원흉인 대대장이, 지금도 능구렁이 같은 웃음을 흘리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자, 뺨을 후려치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어긋나버린 내 인생 계획이 다시 짜 맞춰지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이 역겨운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이 앞섰다.


“아닙니다! 그동안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그래, 버스 시간 늦기 전에 얼른 가보고.”


그건 대대장도 마찬가지였는지, 자기 할 말 다 끝났으니 이제 볼일 없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빨리 대대장실을 나설 것을 종용했다.


하여간 황 중령 저 인간은 꼭 장군까지 해먹을 놈이다.


갈라치기에 꼬리 자르기, 말 바꾸기까지, 성공하기 위해 장교가 갖춰야 할 3대 덕목을 그대로 옮겨놓은 거나 다름없는 인간.


저런 놈을 믿고 진급 한 번 해보겠다고 간 쓸개 다 빼주려던 내가 등신이었지.


사람 심리가 참 간사한 게, 서 있는 자리가 바뀌면 그렇게 정겹게도 느껴지던 공간도 한순간에 뭐 같은 곳으로 바뀐다는 것이었다.


괜히 미련만 더 생길까 봐 위병소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자, 먼발치에서 나를 맞이해줄 준비를 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선두에 서서 눈물을 글썽이며 박수를 치는 김원재 중사. 


나와 전입 날짜가 같았었지.


그 옆에서 씁쓸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는 박준서 병장.


얘하곤 워낙 사적인 얘기를 많이 해서 서로 별꼴을 다 봤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아크릴 상자에 담긴 금칠 된 베레모를 건네는 김상웅 상사.


빽 없는 중대장 만나서 참 고생 많이 했지. 


마지막 경례 구호를 붙이는 부중대장 겸 1소대장 이동혁 중위.


이 친구는 분명, 내가 못다 한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다.


“단! 결!”


그 어느 때보다도 우렁차 보이는 중대원들의 목소리.


내게 보내는 그 마지막 경례에,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려는 시큰한 감정들을 애써 억누르며 화답했다.


“단결.”


잘 있어라, 열쇠부대 번개대대야. 


잘 가라, 내 인생의 꽃다웠던 120개월아.


---


대대 주둔지가 있던 연천읍 통현리를 떠나, 동서울 터미널로 향하는 버스 안.


덜컹이는 버스 창가에 기대어 눈을 감으니, 성인이 되고서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남들 다 가길래 성적 맞춰 따라갔던 대학은 지잡대였고, 차라리 용돈이나 벌려고 전문하사까지 했던 군 생활 24개월이 더 알찼었다. 


2년짜리 전문학사에 있으나 마나 한 자격증 쪼가리 몇 개, 유통기한 지난 어학성적이 대학에서 얻은 전부였으니까.


그렇게 중소기업에서 노예로 부려지느니 명예라도 챙기자는 심정으로 눈을 돌린 곳이 직업군인이었다.


병과를 굳이 기갑으로 선택한 이유는 군 생활을 하던 곳이 전차부대였고, 어차피 군 생활 다시 하는 거 제대로 배워서 가자는 마음으로 3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서의 꿈을 키워나갔었다.


그랬었는데….


‘이번 역은 잠실, 잠실역입니다.’


정처 없이 버스를 갈아타고 지하철에 몸을 실은 지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길래 분위기에 휩쓸려 같이 내린 나는 큰 고민 없이 잠실대교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가족에겐 전역원 제출하는 날부터 군복 벗는 대로 민간경비업체 취업해서 해외파견 근무 나간다고 얘기해 뒀으니 당분간은 날 찾진 않을 테지.


이제 내 나이 서른다섯. 많다면 많고 아직 젊다면 젊다고 할 수 있는 나이.

 

그러나 지금 내게 딸린 스펙으론 어디 가서 밥 벌어먹기가 마땅치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라에 청춘의 전부를 가져다 바친 결과가 이렇게 헌신짝 버리듯 버려지는 것일 줄은, 마지막 진급이 떨어질 때 까지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내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


어차피 망한 인생, 더 추한 꼴 보기 전에 그만 끝내자.


“거기선 떨어져 봐야 안 죽어요.”


그렇게 한참을 감상에 젖어 있기도 잠시,


“여긴 둔치 근처라 떨어지면 병신밖에 안 돼요. 죽을 거면 저기 가서 뛰어내리세요.” 


하는 말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니, 쥐색 양복 차림의 외국 여성이 다리의 정 중앙을 가리키며 그리 말하고 있었다.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그따위로 도발 당하면 아무리 성격 좋은 사람이라도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진 않는다.


“남이야 죽든 병신 되든 뭔 상관인데.” 

“당연히 상관있죠.” 


그러나 내가 무슨 태도를 보이든 간에, 그 여인은 차분하게 자기 할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당신이 죽어버리면 우리 회사에 스카웃을 못 하잖아요?”

“뭐?”

“제가 대충, 이런 사람이거든요.”


내가 얼빠진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명함 한 장을 내밀며 말했다. 


‘Kingdom of Rienen Military Advisor’


리에넨 왕국 군사고문단이라. 


국기에 국장, 소개문까지 그럴싸한 게 다단계나 몰래카메라 같지는 않아 보였다.


“지금 우리나라, 리에넨은 국책사업으로 군의 현대화와 확장에 힘을 쓰는 중입니다.”

“아, 예….”

“그래서 대위님과 같은 분들을 모시기 위해 이렇게 발로 뛰고 있고요.”


유창한 한국말로 설명을 이어나가는 여인의 태도도 그렇다. 


물론 자국의 군 선진화를 위해 민간군사기업이나 타국의 장교를 군사고문으로 삼는 것 자체는 흔한 일이다.


문제는 보통 그런 건 기업의 영업팀이나 외교채널을 통하는 것이 보편적이었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의심이었다. 


“그 말을 지금, 믿으라는 겁니까?”

“뭘 하든 죽는 것보단 낫겠죠.”


그런데 여기서 가불기가 들어올 줄이야.


“아무튼, 생각 있으시면 서류에 지장 찍으시고, 내일까지 쪽지에 적힌 장소로 오세요.”

그 말과 함께 반강제로 서류를 떠넘긴 여인은 내가 미처 질문을 할 겨를도 없이 자리를 떴다. 


그리고 다음 날. 


서류상의 채용 조건이 나쁜 것도 아니었고, 내가 일하게 될 나라가 여행금지 국가도 아니었기에, 큰 고민 없이 쪽지에 적힌 장소를 따라 인천의 어느 허름한 항구에 도착했다. 


외국이라길래 비행기를 탈 줄 알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짐을 좀 더 쌀 걸 그랬나.


무뚝뚝한 항구 관리자의 안내에 따라 낡은 소형 페리에 몸을 싣고 눈을 감으니, 머지않아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이 울렸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다시 뱃고동이 울려 잠에서 깼을 때,


“아니, 대체, 여긴….”


내가 도달한 곳은 태양이 두 개 뜬 다른 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