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어디 출신이에요? 한국? 중국?”


손에 들었던 커피잔까지 내려놓고 벽에 기대어 선 채 말을 거는 그 아이의 얼굴은 마치, 해외 나와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난 것 같은 반가움에 젖어 있었다.


“타치바나 상급상병, 장교한테 그렇게 대하라고 배웠나?”

“그냥 두세요, 행보관님.”


그 병사에게 핀잔을 주려는 중대 행정보급관, 챈들러 상사를 제지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타치바나 상급상병이라 불린 해당 병사는 거리낄 것 없다는 태도로 나를 대하고 있었다.


뭐, 나 같아도 이런 상황이면 계급 이전에 반가움이 먼저 올라왔겠지. 

문화나 주변 환경 이전에 리에넨 국민의 절대다수는 우리 세계의 서양인과 같은 외모와 피지컬을 지니고 있었고, 그건 엘프나 수인 같은 아인종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정도 상식이 통용되는, 같은 세계 출신의 동양인을 만났다면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난 한국 출신인데, 그쪽은?”

“저는 일본, 치바현 이치카와시에서 왔어요.”


싱긋 웃으며 그리 답한 녀석은 자연스럽게 중대장 석 옆의 자리에 앉아 자기 할 말을 이어나갔다.


치바현이라, 학교에서 배우기론 도쿄 옆에 붙은 위성도시 정도의 이미지였는데, 수도권에서 잘 살던 애가 무슨 일로 이런 곳까지 흘러들어온 걸까.


“이야~, 새로 오신 중대장님이 보통내기는 아니라고 들었는데, 설마 같은 문화권 외지인일 줄은 몰랐네요.”

“나도 병사 중에 외지인이 있을 줄은 몰랐지.”


그 부분이야 나중에 행보관이나 소대장 통해서 알면 되는 거였고, 지금은 눈앞의 이 아이가 나의 중대원인 이상, 일단 녀석에 대해 천천히 알아가는 것이 먼저였다.


우선 겉모습과 행동거지만 보면 한국 있을 때 흔하게 봤을 법한 여고생들과 크게 다를 것 없었지만, 입고 있는 옷과 장구류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여기서나 한국에서나 군대 있는 동안 여군 자체는 숱하게 봐왔어도, 리에넨 사람도 아닌 아이가 이렇게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여기엔 어쩌다 오셨어요? 대충 얼굴 보니까 제 삼촌뻘은 되시는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늙어 보여?”

“네.”

“그렇게 바로 대답하면 아저씨도 좀 상처받는데.”


아니, 방금 한 말 취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괜히 의기소침해서 작게 대답하는 나의 반응에 녀석은 보란 듯이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하여간에 저 나이대 아이들, 특히 여자애들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나야 뭐, 먹고 살길 찾아서 왔지. 너는?”

“저도 비슷해요. 집 나간 여고생 받아주는 곳은 드물잖아요.”

“그것도 그렇네.”


스스럼없이 서로의 사연을 밝힌 것과는 달리, 나와 녀석의 사이에 아주 잠시간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먹고 살길 찾아 가출해서 이세계까지 흘러들어온 여고생이라.


보기 드문 걸 넘어 생전 처음 보는 경우였으나, 타인 입장에서 괜히 초면에 이해하는 척 다가갔다간 역효과만 날 것 같아, 나는 그 이상 캐묻지 않기로 했다.


“아무튼, 하시는 거 보면 군 생활 처음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래, 나도 잘 부탁한다.”


그걸 끝으로 발걸음을 돌린 녀석은 행정반을 나가려는 도중, 갑작스레 고개를 돌려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 참, 그 커피, 중대장님 드세요.”


그 말과 함께 녀석의 시선이 가리킨 것은 중대장 석 책상 구석에 놓인 자기 계급과 이름이 주기 된 새하얀 머그잔. 


딱 봐도 개인용 컵이었다.


고맙다는 의미로 머그잔을 집어 들며 짧게 고개를 숙이자, 녀석은 그제야 손을 흔들며 행정반을 빠져나갔다.


그 머그잔을 양손으로 감싸고 향을 음미하며 한 모금 넘기니, 자주 마시던 믹스커피와는 다른 향취를 느낄 수 있었다.


‘커피는 맛있게 잘 타네.’


그런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동안, 마치 한차례 폭풍우가 지나간 것과도 같은 적막감이 행정반을 맴돌았다.


실제로 지금 행정반에 남은 인원은 오전 중에 올라온 초안의 마지막 한 장을 검수 중인 챈들러 상사와 속기 작업이 덜 끝난 웨이드 상병뿐.


무언가 사적인 얘기를 나누려면 기회는 바로 지금이었다.


“어떤 친구예요?”


나의 물음에 챈들러 상사는 마침 잘 물어봤다는 듯 시원스레 입을 열었다.


“타치바나 상급상병 말입니까? 골칫덩이죠.”

“보직은요?”

“중대장 전차 포수입니다. 다른 애로 바꿔드릴까요?”

“아뇨, 오히려 잘됐네요. …가르치는 맛이 있겠어요”


중대장 전차 포수라, 실전에선 내 옆에서 바로 명령을 수행할 보직임을 생각하면 녀석도 나도 서로에 대해 좀 더 알아갈 필요가 있었다.


그 녀석 외에도 추가적으로 중대장 전차에 타게 될 아이들은 조종수, 탄약수, 무전수.


야전에선 중대장도 병사들과 함께 최일선에서 전투를 수행해야 했는데, 같은 전차를 타는 승무원들과의 관계라면 더 말해 봐야 입만 아픈 문제였다.


“조심하세요, 중대장님. 걔, 보통내기 아닙니다.”

“뭐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자기 딴에는 나름 충고한다는 말에 별 감흥 없다는 투로 대답하자, 주위를 둘러보던 챈들러 상사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다른 게 아니고 그 애 생활지도 기록부를 보면 아시겠지만, 위아래 안 가리고 폭행 사건 터뜨렸다가 전출만 3번 당했습니다.”

“그거참 강단 있는 친구네요.”

“보직도 두 번이나 바뀌었는데, 괜찮겠습니까?”

“그런 병사들도 같이 끌고 가는 게 지휘관이 해야 할 일이겠죠.” 


그런 조언을 적당히 흘려넘기는 나의 태도에 챈들러 상사는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쉬었으나, 그 정도 흠결은 중대장으로서 감내할 만한 수준이었다.


오히려 문제점을 알았으니 해당 병사를 대하는 것에 있어 대략적인 가이드라인이 제시된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행보관님 먼저 식사 다녀오세요.”


마침 식사를 끝내고 돌아오는 부중대장 일행 덕에 그 이상 무안한 대화가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중대장님은 안 가십니까?”

“하던 거 끝내고 가려고요.”


생각해 보면 오늘 점심 메뉴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 어제 달린 숙취가 남아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이대로 쭉 일이나 하면서 오늘치 작업량을 일과시간 내로 끝낼 수 있기를 빌어야겠다.


---


다행히도 오늘 분량의 작업이 끝난 시간은 오후 5시였다.


중간에 밀러 중사가 행간 설정 잘 못 해서 서류 몇 장을 날려 먹은 걸 생각하면 더 일찍 끝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획기적인 속도로 일을 끝냈다는 게 부중대장인 웰링턴 중위의 의견이었다.


그 다음은 뭐, 간부 병사할 것 없이 다 같이 행정반을 정리하고 퇴근, 오늘도 마시러 나간다는 2, 3소대장을 배웅하고 곧바로 연병장 아래 전차호로 향했다.


우리 행정업무의 주인공인 이번에 새로 전력화되는 전차를 직접 살펴보기 위해서였는데, 다행히도 중대장 전차가 주차된 전차호에는 나 이외엔 아무도 없었다.


다른 사람 시선 신경 안 쓰고 천천히 둘러보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여유롭게 궤도부터 차체를 거쳐 포탑, 주포를 훑어봤을 때 먼저 든 생각은 하나였다.


‘아니, 셔먼이잖아 이거.’


셔먼. 정확한 제식명은 Medium tank M4, 그러니까 모델 4 중형전차.


내가 살던 세상의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주력으로 운용했고, 한국전쟁 때는 국군의 주 전력으로 활약한 전차였다. 


물론 자잘한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높은 전고에 중구경의 경야포, 완만한 경사장갑을 갖춘 지난 세기의 명전차를, 이런 다른 세상의 군대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어디서 봤다는 눈치네요?”

“아잇, 씨발 깜짝이야.”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리니, 전차장 해치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타치바나 상급상병이 눈에 들어왔다.


일과시간 끝난 지가 언제인데 이 시간까지 전차에 붙어있는 걸 보면, 확실히 행보관 말대로 평범한 병사 같지는 않았다.


주특기 훈련 중이었는지, 오른쪽 눈가에 묻은 조준경의 고무 파우더는 덤이고.


“일과도 끝났는데, 여기서 뭐 하냐.”

“주특기 훈련 중이었죠.”

“지금까지?”

“포수는 전차장 임무까지 숙지해야 하잖아요. 거기에 공통임무인 APU하고 습식탄약고 관리까지 하려면 일과시간 가지곤 모자라요.”


애써 무덤덤한 척 대화를 이어나가자 녀석은 그렇게 자기 속내를 털어놨고, 그 모습이 기특하면서도 설마 내무 부조리라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다른 애들은 어디 가고.”

“조종수야 지난주에 A 라이선스 땄고, 무전수하고 탄약수도 상병 짬이니까 자기 일은 알아서 할 줄 알겠죠.”


담배라도 있었으면 한 대 태웠을 태도로 얘기하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문득 병사 시절 주특기 잘 못 하는 후임을 어떻게 챙겨야 할지 고뇌하던 게 떠올랐다.


결국엔 대대 주임원사 묵인 아래 취침 시간하고 주말 개인 정비 시간까지 끌고 와서 교육시키는 것으로 끝났지만.


“그러는 중대장님은 무슨 일로 오셨어요?”

“이게 대충 무슨 물건인지 한번 보고 싶었거든.”

“셔먼 닮았죠?”


그런 의표를 찌르는 듯한 대답에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었지만, 의기양양한 얼굴로 이유를 밝히는 녀석을 두고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밀리터리 오타쿠라서요.”

“아버지 취미가 특이하시네.”

“근데 세부적으로 보면 좀 달라요.”

“예를 들면?”

“서스펜션은 토션바에 엔진도 형식 가릴 것 없이 8기통 가솔린으로 통일됐어요.”


확실히 그 말대로 이 전차의 궤도는 HVSS나 VVSS보다 용적을 덜 차지하면서도 넓은 접지압까지 가져간 걸 보면, 설계가 마냥 셔먼과 닮았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이거, 병사치곤 너무 자세히 알고 있는 거 아닌가.’


나야 뭐 타이핑 하는 동안 무지성으로 그 내용을 넘긴 게 아니었기에, 이 전차의 특징이나 운용 전술을 아주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녀석은 행정작업에 손을 댄 것도 아니었는데, 하루 이틀 알아본 것 같지는 않은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자세하게 알고 있네.”

“상황 터지면 믿을 거라곤 전우하고 이 친구뿐인데, 잘 알고 있어야죠.”


말 안에 뼈가 있는 말투였지만, 중대장 입장에선 녀석의 그런 태도가 기특하기만 했다.


이런 모범 병사를 앞뒤 안 가리고 흠결이 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배척하는 건, 지휘관으로서 지향해야 할 태도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외지인 신분에 나 같은 특전을 누리지도 못하고 일개 병사로 복무하면서도, 자기 일에 충실한 그 태도는 칭찬받아야 할 부분이었다.


“다른 중대원들도 너같이 생각하면 참 좋을 텐데.”

“그거 칭찬입니까?”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냐.”


나의 그런 농담 아닌 농담에 녀석은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리에넨 사람도 아니고, 징병제는커녕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 못 했을 아이가 이런데 와서 군 생활을 강요받는 걸 보면, 나도 썩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새삼 이 나라의 국방체계와 사회상이 후진적이라는 것을 체감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하나. 


비록 그 계기는 싸구려 연민과 자기만족의 발로겠지만,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런 것뿐이었다.


“타치바나.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중대장님! 큰일입니다!”


막 얘기를 꺼내려는 순간, 멀리서 나의 말허리를 자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다급한 목소리에 언성마저 높았으나, 분명 그 목소리의 주인은 부중대장인 웰링턴 중위.


또 뭔 일이 터졌길래 저렇게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헐떡이며 달려오는 건지, 괜히 불안한 생각이 앞섰다.


“중대장님, 숙소에서, 2소대장하고, 3소대장이,”

“어, 일단 숨 좀 돌리고 말해.”


대대 독신자 숙소에서 전차호까지, 족히 400미터는 되는 거리를 전력 질주한 웰링턴 중위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지금 술에 취해서 난동을 피우고 있습니다.”


이런 씨부랄.